한 그루 거목으로 서 계시어

변해명 (수필가)

국제 PEN 클럽 활동 이야기

엘리자베스 페터슨(Elizabeth Peterson)은 영국 사람으로 국제 PEN 본부 행정비서와 사무차장으로 29년을 봉사한 사람이다. 그녀가 퇴임하고 쓴 회상기 <해외에서 온 편지(Post cards form Abroad)>의 한국 번역본을 보면, 서문에서 조경희씨와의 영원한 우정이란 말을 쓰고 있다.

‘지난날 나에게 그렇게 넉넉한 인심을 베풀더니 이번에 또다시 고맙게도 펜클럽 회상기 한국판을 출판하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70년 모윤숙씨 초청으로, 84년과 88년에 전숙희씨 초청으로 세 번의 한국 방문을 한 사람으로, 이승만 대통령 당시 청와대 초청이며 경주 문화관광 등 ‘해외에서 온 편지’속에 한국에 대한 인상기도 여러 번 나오는데, 85년 5월 그의 기록에는 ‘미스 모(모윤숙)와 미세스 전(전숙희) 미세스 조(조경희)가 한국펜을 창설하고 이끄는 인물’이라고 썼다. 그리고 어느 날 기록에는 ‘통통하고 활기 찬 모습의 미세스 조는 짧게 깎은 머리에 자애롭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선생님의 모습을 적고 있다. ‘그녀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에게서 의상을 마련해 주었다. ……화려한 의상에 압도되어 불안해하는 눈치를 챈 미세스 조가 “당신과 나는 일하는 여자들이니까 실용적인 옷이 좋을 거예요”하는 그녀의 재빠른 이해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금줄로 레이스가 된 갈색 벨벳 이브닝 자켓을 찾아내었다’ 라는 대목도 보인다.

페터슨의 회상기 이야기를 선생님께 펜 이야기를 청하자,

- 나는 세계 펜 대회에 많이 참석했고, 많은 외국 문인들과 친교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온 작가들과의 우정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고 뒷바라지한 것이지요. 숨어서 한 일이니 내세울 게 없어요.

하며, 겸손해 하신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고 제멋에 겨워 한 일이니 기록에 남길 일이 못 된단다. 어느 누구를 시작으로 이야기해야 할지 실타래가 풀리지 않을 것같았다. 선생님의 한국 펜에 대한 사랑이 남다름만을 느끼며 펜의 이야기는 다음에 듣기로 했다.

들에 핀 하얀 꽃

선새님의 수필은 가식 없는 성품만큼이나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당신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수필과 수필집을 여쭤 보았다. 당신은 모르겠다고 하시며 더듬더듬 <하얀꽃들> <구두> <제떨이> <얼굴> <소나기> 등으로 꼽아 나가신다.

- 나는 어느 것이 내 대표작인지 모르겠어요. 수필 <우화>가 실렸을 때 최정희 선생이 칭찬을 해 주셨고, <음치의 자장가>을 썼을 때는 김진섭 선생이 좋다고 칭찬을 주셨지. 지금보면 유치할지 모르지만 그 시대에 공감했으면 그때는 잘 쓴 글일지도 모르지. 내가 수필을 쓸 때에는 노천명, 모윤숙, 전숙희 정도였으니.

남들은 선생님의 대표 수필을 <얼굴> <선물> <네거리> <골목> <자기도취> <들> <아침길> <아일랜드의 인상> <해피의 슬픔> <소리 노이로제> <면역> 드을 꼽는다.

대표 수필집으로는 『偶話』(1955) 『가깝고 먼 세계』(1986) 『낙엽의 침묵』(1994) 등을 꼽고 있다. 최근 선집으로는 『치자꽃』(1999)과 『하얀꽃들』(2000)이 나왔다.

선생님은 다양하고 화려한 경력이 소재가 된 폭넓은 수필들을 많이 쓰셨다. 글을 꾸미거나 의도적으로 쓰신 것이 아닌 생활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는 마음과 생각이 담긴 글들이다.

수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기로 했다.

- 고전이 된 수필에는 요즘같이 자신들의 생활 주변 이야기로 쓴 수필은 없지. 고전은 근본이 되는 것이니까. 예전에도 오늘같이 쓰면 수필로 보지 않았을 것이고…….

왜 그렇게 되어가느냐 하면 매스컴의 작용이 크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라디오 여성수기는 미주알 고주알 가정 이야기를 쓴 것들인데 그것을 명문으로 발표해 주고 있으니 그 글을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필이라고 생각하고, 또 수필을 쓰는 것을 너무 쉽고 우습게 여기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몰라요. 처음에는 그런 의도로 출발한 것은 아니겠지만 수필을 쓰는 여성필자들도 그들과 비슷한 글을 쓰면서 수필이라고 생각하니 수필의 위상이 떨어지지요.

- 나는 그런 글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 수필 한 편을 쓰는 것은 시나 소설보다 쉽거나 가볍지 않다는 것을 수필 쓰는 사람들은 알 거요. 우리의 수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재의 다양성과 깊이 있는 삶의 체험이 소재가 되어야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지. 문장이야 물론 본인이 지니고 있는 기본이니까. 내가 수필을 쓸 때는 주제를 객관화시켜 의미 부여를 하려는 의도로 쓰려고 노력했지. 가끔은 사소설 모양 개인에 치우친 이야기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고향 이야기, 아버지 사랑 이야기, 학창시절 이야기 등 후에 변해명씨가 나를 정리하다 보면 고향이 어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게 말이야. 조경희가 죽은 뒤 나를 연구하려고 하면 참고가 되게. <하얀꽃들>은 내 첫 번째 수필집 『偶話』에 실렸던 것인데, 나는 그 수필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 햐얀 것일수록 향기가 진해. 꽃도 흰 백합이 향기가 진하고, 술도 마틴이나 소주가 그렇고, 인간도 그런 향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깨끗하고 소박한 향기를 품은 생각의 글이어야 하는데…….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씀도, 글도 <야산의 들꽃 같은 소박한 향내>가 풍긴다고 생각했다.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가식이 없으면서도 많은 삶의 이야기로 우리를 당신의 그늘로 유혹하는 따뜻한 어머니. 정말 저명한 평론가에 의해 60년 간 써 오신 선생님의 수필세계가 정리된다면 한국의 현대 수필문학사를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고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빌어 본다.

2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말씀을 들려주신 선생님께 감사할 뿐인데, 선생님은 도리어 내게 수고했다며 소녀처럼 활짝 웃어 주셨다.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말씀을 옮기는 것이 부족한 제 능력이라 생각하고 이 글을 마침에 선생님께 죄송할 뿐이다.’

-월간문학 2002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