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최원현(수필문학가)

아카시아꽃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향기가 짙어진다. 유난히 햇볕 밝은 오후, 뵙고싶은 분을 만나는 마음은 쑥쑥 날아 오르는 연이 되는 기분이다.
효령대군의 묘역을 마주한 아파트의 군락, 기운 봄, 설은 여름 햇살이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로 하여 더운 기운을 몰아내어 한껏 날씨 좋은 날을 만끽하게 했다.
오늘은 평생을 대학 강단에서 국어학을 가르치시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계시는 서울대학교 이응백 교수님을 찾아 뵙기로 한 날이다.
방배동 신동아 아파트 6동 805호, 약속 시간에 맞춰 초인종을 누르니 교수님께서 손수 문을 열어 맞아 주신다. 아들 내외와 두 손자 모두 나들이를 나갔다고 한다.
얼마 전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던 걸 생각하며 조심스레 교수님의 안색을 살폈더니 염려했던 것보다 아주 많이 좋아 보이신다. 평소에 워낙 건강하셨음에서인지 큰 일을 겪으신 분답지 않게 여유도 있어 보이시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신 듯 해 보여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기신 머리결 하며, 티셔츠를 입고 계신 것이 훨씬 더 젊어 보이시는 것 같다.
세검정의 단독주택에서만 20년 넘게 사셨으니 아파트 생활이 답답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벌써 이곳에서 사신 게 5년이시란다. 그만큼 적응도 되셨겠지만 아이들의 교육환경 및 열쇠 하나로 문단속이 되는 아파트의 장점은 그런데로 사모님이 떠나신 후의 교수님께는 오히려 편리함이 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문소리가 나더니 손자인 상돈이와 상협이를 선두로 나들이 나갔던 가족들이 돌아왔다. 거기 사모님이 계시지 않아 아쉬움이 컸지만 교수님댁의 단란한 가족 모습을 보는 순간이었다.

수필은 인격의 반영이라 했다. 문학장르 중 작가의 프로필이 속속들이 나타나는 문학이 수필이기에 자아(自我)에 대한 탐구 및 확립, 구성, 성찰, 반성 그리고 판단에 이르기까지 수필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수필 한 편은 그 사람의 인격 내지 품격의 나타남이요, 그런 작가의 삶의 모습이 수필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독자는 부담 없이 보아 알게 되는 것이다.
해서 한 편의 수필을 내놓는다는 것은 웬만큼 용기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읽는 이에게 책잡히지는 않을 만한 수준은 되어야 할 테니 어찌 쉽게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특별히 등단의 과정 같은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았는데도 자타가 공인하는 수필가로 이응백 교수님을 꼽는 것은 그만큼 그의 수필이 격조(格調)가 높으며, 독특한 한 경지를 이루고 있음을 말하고 있음이 아닐까.
내가 아는 이응백(李應百) 교수님은 견고하고 강직하며 기품 있는 선비 국어학자요, 교육자이시다. 정봉구 교수님의 표현을 빌면 '사람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수필에 애착하며, 삶의 많은 의미를 글 속에 정리하는 분'이다. 그런가 하면 아내를 지극하고 지순하게 사랑하는 성실한 남편이요, 자식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갖는 인자한 아버지시다.
그런 분이시니 그가 빚어내는 수필은 진솔하고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아니 될 수 없으리라. '글은 인간이다'란 말이 이응백 교수님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싶게 그의 수필마다에선 그런 삶의 일치 모습이 나타난다.
이응백 교수님의 수필은 바로 그의 마음이다. 그의 수필이 독자에게 부딪혀 가는 충격은 곧바로 마음으로 전하여진다. 작가의 가족 얘기며,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그것들은 그대로 읽는 이의 가족 얘기로, 읽는 이 자신의 얘기로 공감되어진다.
평생을 국어교육의 연구와 가르치는 일에 바쳤고, 국어학 분야의 연구에서는 남다른 업적을 많이 남기신 분이니 만큼 어찌 생각하면 수필도 지극히 논리적이고 딱딱한 글일 것 같은데 오히려 지극히 서정적(抒情的)으로 독자의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을 준다.
이응백 교수님은 경기도 파주가 고향이시다.
" 나는 경기도 파주(坡州)의 기차역에서 30리나 떨어진 농촌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서당(書堂)엘 다니다가 열살 때 면(面)의 4년제 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한 학기만 다니고 다시 서당엘 다니다가 동기생(同期生)들이 3학년에 올라갈 때, 이웃 군의 6년제 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을 했어요. 농사일에 일손이 딸리지만 공부에만 전념하게 해 주신 부형(父兄)의 배려로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에 입학을 했고, 그 덕으로 8·15 광복 후 대학과정에까지 자동 연결로 1949. 7. 15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하게 되었어요.
대학 졸업 후 중등학교 교단에 잠시 머물고 1954년 4월에 梨花女大 전임이 되었다가 1957년 4월에 모교(母校)인 서울대 사범대학으로 옮겨 31년 1학기 동안 근무하고, 1988. 8. 31 정년으로 퇴임하여 지금은 명예교수(名譽敎授)로 있습니다."
교수님은 본관(本貫)이 전주(全州)로 정종대왕(定宗大王) 제4남 선성군(宣城君)의 16대손이시란다. 그래서 전주이씨대동 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이사 및 선성군파종친회(宣城君派宗親會) 회장을 지내시는 등 종친회 일도 많이 하고 계시단다.
하지만 이응백 교수님은 누가 뭐래도 국어학자이시다. 1955. 2. 25에 한국국어교육연구회를 설립하여 1994년까지 회장 등으로 무려 40여년을 관여해 오셨으며, 지금도 사단법인(社團法人) 한국어문회(韓國語文會) 이사장으로 계시다.

교수님은 대학 때 중매로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혼인(婚姻)은 대학 4학년 때 보통학교 은사이신 경갑경(慶甲景) 선생의 중매로 그 보통학교 동기동창(同期同窓)의 따님인 민영원(閔瑛媛)과 1949. 4. 30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혼인한 지 9년 만인 1957. 4. 26 외아들 선중(善中)을 낳았는데, 선중도 1986. 12. 8. 해평 윤씨(海平尹氏) 미정(美貞)과 혼례를 치러 상돈(商敦)과 상협(商協) 두 아들을 두고 있답니다. 그러나 1993. 10. 29. 내 아내 민영원(閔瑛媛)이 65세 2일을 살고 세상을 뜨매, 20년을 살던 세검정(洗劍亭) 동네였지만 아들 내외의 제 자식들 교육 문제도 있고 해서 1994. 11월에 이곳 서초구 방배동 아파트로 이사 와서 살고 있어요."
교수님의 수필과 저서에도 나타나듯 유난히 금슬(琴瑟)이 좋으셨다는 두 분이시라더니 사모님 말씀이 나오니 말씀까지 젖는 듯 싶다.
이응백 교수님의 문학과의 만남은 그냥 자연스런 삶의 부분이 아녔나싶다.
"나는 어려서 서당(書堂)에서 한문 수학을 했는데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보통과 3학년 여름방학에 몽양(夢陽)의 종조부이신 여철(呂喆) 선생 앞에서 맹자(孟子) 통독을 한 인연으로 대학 과정에서 국어과를 택했고, 대학 시절에는 우봉(又峰) 한상갑(韓相甲) 선생께 고문진보(古文眞寶) 공부를 함으로써 수필과 인연을 맺어 김승우(金承禹)씨가 운영하던 월간 수필문학(隨筆文學)에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무슨 등단(登壇) 등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나중엔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1986년 5월부터 12년간을 한국수필문학진흥회(韓國隨筆文學振興會)의 회장으로 季刊「隨筆公苑」을 발간해 왔습니다.
하지만 보통학교 시절, 사랑(舍廊)에 말꾼들이 모여 목청 좋은 사람이 이야기책을 읽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들었는데, 나도 그때 춘향전이나 숙향전, 유충렬전 같은 딱지본(6전소설)과 당시의 신소설까지 읽게 되었으며 그것은 훗날 내가 문학을 하게 된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교수님은 교육자로서 국민훈장 동백장('82.12.14). 대한교련의 교육특별공로상('87.5.15 )과 국민훈장 모란장('88.8.31)을 수상 하셨으며, 1988. 9. 25일엔 財團法人 東崇學術財團 제정 제2회 東崇學術賞을, 1998. 8. 29엔 隨筆과 批評社가 제정한‘제3회 隨筆과 批評 大賞’을 , 수상하셨다.
교수님은 저서도 많이 내셨다. 국어학 관련 저서로 <國語敎育史硏究>, <資料를 통해 본 漢字 . 漢字語의 實態와 그 敎育>, <放送과 言語>, <국민학교 學習用基本語彙 硏究> 외 여러권이 있고, 詩文集으로 가족문집「제비」(1979), 부부해외기행문집「旅滴」(1983), 隨筆集「기다림」(1988),「고향길」(1990)과 時調集「因緣」(1992) 등이 있다. 그리고 '아내 追慕文集'으로 매년 1권씩 낸 <永遠한 꽃의 香氣>(1994)가 네권째 나와있다.
이응백 교수님은 삶이 곧 사랑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랑의 삶을 표현한 것이 수필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수필 마다엔 진한 가족애가 끈끈하다.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펴낸 가족문집 <제비>에 피천득 선생은 '축하의 말씀'으로 '이 책 속에는 정성, 애처로움, 아낌, 신념, 이런 행복한 가정의 정서가 세련된 필치로 아낌없이 표현되어 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교수님은 '책머리에'에서 '둘이 사이좋게 보금자리를 꾸며 가자는 뜻에서, 그리고 억센 비바람도 서로 의지하며 견디어 나가자고 그 이름을 <제비>라 하였다.'고 했다.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그토록 할 일들이 많은 중에도 가정을 사랑의 보금자리로 가꾸고 보존하려는 마음이야말로 좋은 수필을 쓰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그런 그였기에 부부는 일체요, 각기 그 분신으로서의 반쪽이라 하지만 생과 사를 통하여 일관된 마음,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그것을 표시하고 간직하려 한 것이리라. 그런데도 마음속에는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교수님은 이런 당부를 하셨다.
"별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속누(俗累)에 얽매여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주말도 모자(母子)와 즐기지 못한 것을 미안히 여기면서, 지금도 바쁨을 핑계로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주말만은 없는 것으로 여기고 가족을 위해 눈 딱 감고 비우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그런 교수님께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을 여쭤 보았다.
"술, 담배를 못하니 人生의 3분의 1은 물에 물탄듯 덤덤한 평생을 살아 왔다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사범학교 교육을 10년 반 받은 덕에 교육의 길에서 한 발짝도 다른 데로 눈을 판 일이 없이 한 우물만 판 것이 幸福이라면 행복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문교육(語文敎育) 정상화를 일념(一念)으로 관철하던 중, 지난 2월 9일 정부에서 공문서와 간판·도로 표지에 한자를 병용하겠다는 발표를 한 것은 매우 반갑고 후련한 소식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의 수필은 가족 문집에서 선보인 것처럼 가정적인 것들도 많지만 목적이 있는 글 또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단체의 책임을 맡고 계신 연유로 거기에 맞는 청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작품들 중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고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작품들엔 어떤 것이 있는 지를 여쭈어봤다.
"代表할 작품이라지만 몇몇 군데 내 隨筆이 실려 있는 책을 겅터듬어 볼 때 「푸른 불」. 「초가을의 멋」,「春心」,「孝」. 「健康 이야기」. 「두루마기」, 「휘파람」,「구름을 쓸면 눈이 오지」, 「월부 도둑」「君子 大路行」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군요."
이응백 교수님의 수필을 읽다보면 박학다식해 지게 된다. 소재로 택한 것 하나 하나에 대한 적확한 표현과 묘사, 그리고 고증을 거친 것들로 오랜 동안 우리에게서 희미해져 있던 것까지 선명하고 확실하게 기억을 새롭게 해준다. 그만큼 그의 수필이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다는 것이다. 학자다운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수필을 통해 독자에게 무언가 꼭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기도 하리라. 수필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독자를 아끼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그런 작가의 마음을 독자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응백 교수님의 수필에 대한 사랑은 그 뿐이 아니다. 그는 수필이 우리 문학 전반에 끼치는 비중(比重)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文學을 시·소설·희곡·평론·수필·일기·기록 등으로 나눌 때, 수필은 산문 형식을 취하는 글로 그 정의가 여러 가지로 나가지만, 개인의 축적된 경험과 사유에서 빚어지는 내용을 유머와 위트를 곁들여 세련된 문장으로 엮어 나가는 심정적인 글이라 할 것입니다.
수필이 너무 생활 주변의 사생활에 치우치면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폐단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일상적인 상식의 차원에 맴도는 사실을 과감히 도려 버리고, 신선한 자극을 줄 만한 소재나 줄거리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필이야말로 인생의 다채롭고 깊이가 있는 생각과 판단을 지혜로 꽃피운 인생 여정의 글로서 시·소설·희곡 등 창작성이 강한 문종(文種)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하겠습니다.
수필은 그 사람의 人生의 깊이와 고뇌(苦惱)와 향훈(香薰)이 풍겨 나오는 글로, 재치와 반짝이는 순발력(瞬發力)으로는 이룩하지 못할 무게가 있는 글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좋은 수필이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도 이에서 멀지 않은 것 같다.
"좋은 隨筆이란 부담감이 없이 담담한 심경으로 읽어 갈 때 입가에 저절로 빙긋이 웃음이 뜨이면서도 두고두고 생각되는 수필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현란하게 늘어놓아 읽을 때는 꽃밭 속을 헤매듯 매료(魅了)되다가도 읽고 난 다음에는 아무 여운(餘韻)도 남지 않는 수필은 종이와 시간의 낭비로 독자에게 일종의 배신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글이라 할 것입니다."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머무는 글, 읽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잊혀지지 않고 오래 오래 생각나는 글, 가슴에서 가슴으로 흘러 들어가는 한 겨울 얼음장 밑 물줄기처럼 수필은 그렇게 안에서 안으로 흐르는 마음의 강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수필은 많지만 수필다운 수필이 없다는 지적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자비(自費) 출판 성향이 강해지면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수필류의 책들은 독자들이 한 권의 책을 선택하는 데까지 어려움을 주고있고, 더러는 수필 전체를 평가절하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는 자책마저 갖게 하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매서운 채찍과도 같은 비평을 필요로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해서 교수님께 수필 평론에 대해 한 말씀 부탁 드렸다.
" 隨筆 評論에 대해서는 평론자와 평을 받는 자의 자세 그리고 평의 내용으로 나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評論者의 자세'라 함은 글을 쓰는 이가 하는 평론과 평론만을 하는 이의 평론은 각기 그 자세부터 다르다 하겠습니다. 가령 실제로 농사를 짓는 경험을 통해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과, 그 일을 客觀的으로 보고 評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評은 評者의 자위(自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작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어 좋은 결과를 얻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장 理想的인 것은 서로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수필의 質을 높이는 길이라야겠습니다.
'받는 사람의 자세'라 함은 評을 받는 사람은 몸의 건강을 진단하는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겸허(謙虛)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직하지 못한 評者의 評이라도 겸허하게 자량(自量)하되, 次元 높은 면을 發見하여 배움으로 받아들이는 아량(雅量)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評의 내용'은 무엇에 대해 평하는가 하는 것으로서 소재, 짜임, 내용, 표현, 메시지, 여운 등 여러 면에 걸쳐 언급할 수도 있고, 그 어느 한두 부면에 집중적으로 심도(深度)있게 논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그마한 장점이라도 발견해서 그것을 먼저 내세워 칭찬하고, 그 뒤에 좋지 못한 것을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논평하면 장점의 인상으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열림의 자세를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隨筆 評論에는 여느 평보다 어려움이 있다. 수필은 창작물이 아닌 작가의 인생 이야기요, 따라서 그것은 작가에 대한 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금강산엘 다녀오시겠다고 사나흘의 일정으로 시험 및 준비여행을 다녀오셨다지만 너무 무리 하시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교수님의 문학세계에 대해 듣고 싶어졌다.
"나는 국어학 가운데서도 그 응용 부분인 국어 교육을 전공했습니다. 국어 교육에 文學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전공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중국고전 선문집인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에 들어 있는 여러 글을 접하다 보니, 아 이런 글이 훌륭하고, 써 볼 만한 글이로구나 하는 자극을 받아 김승우(金承禹) 교수가 關東出版社에서 내던 月刊 隨筆文學에 수시로 글을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대학 강단에 몸담고 있는 때라 써 보내면 싣고 했던 것이다. 그러는동안 1986년 7월부터 12년간 한국수필문학진흥회의 회장으로서 季刊 隨筆公苑 발행의 책임을 지고, 現代隨筆文學(大)賞과 隨筆公苑을 통한 登壇作家를 배출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글도 써내고 行事도 해 오는 동안, 隨筆에 대한 견식(見識)을 높일 수 있게 된 것으로 고맙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 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실까?
"한국 수필문학은 월간·격월간, 계간으로 등록된 단체와 전문지가 9개이고, 기타 同人誌는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리고 文化센터 등을 통해 실시하는 수필강의도 많아 우리 나라 수필인구는 상당수에 이르고 있습니다.
專門誌에서 각각 등단작가(登壇作家)를 내는데, 심사절차에서 엄격한 여부에 차이가 있고, 작품 수준도 차이가 많은 것을 自他가 公認하고 있는데, 그러한 차이가 수준이 높은 쪽으로 향상되어 좁혀지기를 바랍니다."
교수님은 피천득 선생님과 김소운 선생님의 수필을 좋아 하시며, 또 높게 평가하고 계셨다.
"우리 나라의 훌륭한 수필과 작가라면 깔끔한 抒情 수필 作品으로 琴兒 皮千得 선생의 隨筆이요, 素材의 어떠함을 가리지 않고 抒情的이건 社會 批評的이건 간에 능란하게 처리해 내는 것은 金素雲의 隨筆입니다."
사실 요즘처럼 수필집이 많이 나오는 때도 일찍이 없었을 것 같다. 좋은 일일까, 아니면 그렇지 못할까? 이에 대해 교수님은 상당히 비판적이셨다.
"모든 것을 電話와 인터넷에 의해 처리하는 요즘 같은 때에 편지 한 장 쓴다는 것, 더구나 隨筆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상(嘉賞)한 일입니다. 그러나 글이란 것은 부질없는 것은 다 덜어 버리고 꼭 필요한 말을 골라 속으로 품은 생각이 충분히 格調 높게 펼쳐져 感動을 주면서 두고두고 여운(餘韻)이 마음에 깃들도록 써야 할 것입니다. 朝鮮時代에는 孝의 하나로 자식이 아버지의 글을 文集으로 출판하는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용이 별 것도 아닌 글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책으로 엮어냄으로써 공연히 書架만 차지하게 해, 後世人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 일이 현대판 孝道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스스로 자기 文學碑를 세우는 실례처럼 質의 헤아림도 없이 출간하는 隨筆集은 물자의 낭비이고 남에게 짐스러움을 안겨 주는 행동임을 명심(銘心)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活字化하면 훌륭한 것으로 둔갑한다는 것은 착각이니 알 만한 이의 판정을 받아 쓸 만하다 할 때 내는 心的 여유가 필요합니다.
隨筆集도 수필도 낼 때에는 조심스럽게, 적어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우린 분명 출판물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수필집들이 거기 큰 몫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아야 한다는 교수님의 지적은 아픈 채찍이 되어 가슴을 때린다. 사람답지 못하면서 수필을 쓰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나는 아닌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말씀을 맺으시는 교수님의 안색이 소년처럼 붉으레져 있다. 지금도 국어학 관련의 각종 행사를 주관 하시는 등 열정적이신가 하면, 1999. 3. 10부터는 社團法人 重峰趙憲先生紀念事業會 회장도 맡고 계시며, 고향 파주에서 나오는 주간 파주신문에는 250여회째 <論語>를 중심으로 1,000자 분량의 '어문 수상'을 연재하시는데 365회까지 연재가 되면 하루에 한 편씩 읽을 수 있도록 한 권으로 묶어 출판하실 계획이시란다.
효(孝)는 백가지 행함의 근본이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장하시는 교수님, 길거리의 표지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분명한 우리의 것을 알게 하려 하시는 젊은 마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귀감이 될 것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밖으로 나오셔서 포즈를 취하시는 교수님의 모습이 풍경화 한 폭으로 저녁 햇볕을 받고 있다.
문득 교수님의 수필 <신방돌>의 한 부분이 생각난다. '신방돌 위에 신들이 같은 방향으로 질서있게 놓인 것을 보면 그 집안의 질서가 정연하게 잡혀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뒤섞이고 더러는 밑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가도(家道)가 문란(紊亂)함을 느낄 수 있다.' 흐트러짐 하나 없으신 매무새에서 우리 삶이 신방돌 위의 신들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평생에 한 편밖에 못 쓰더라도 수필다운 수필을 쓰라는 무언의 말씀이 내게로 물결처럼 전해져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부디 더욱 강건하셔서 오래도록 많은 가르침과 훌륭한 작품 베풀어주시길 기원해 본다. 저만치 넘어가는 저녁 햇살이 초록 나뭇잎에 쏟아져 내리며 풋풋한 잎내를 바람 속에 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