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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 거목으로 서 계시어
변해명 (수필가) 나는 외가 마을 동구 밖에 있는 은행나무를 기억한다. 몇백 년은 족히 된 나무로,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려 줄기가 썪고, 가지가 찢기고 많은 상처가 역력한 고목이지만 봄이면 수줍게 잎을 피우고, 그 품으로 어김없이 왜가리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가을까지 깃들이다 가곤 하는 나무다. 여름이면 청청한 그늘을 드리우고 그 품에 새들을 품어 키우는 나무. 그 나무는 마을의 자랑이요, 보물이요, 마을을 돋보이게 하는 나무였다. 그리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애정과 존경을 지니게 하고, 그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고 싶은 휴식으리 즐거움을 주기도 하는 나무다.
조경희 선생님이 그 은행나무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거목으로 그늘을 깊게 드리우고 우뚝 서 있음이 바라만 보아도 아름답고, 의지롭고, 자랑스럽다. 선생님은 우리 수필계의 그런 거목이시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5년 경희대 소강당에서 한국수필가협회 모임을 가질 때였다. 그때 선생님은 작은 체구에 패기가 넘치는 50대의 모습이었다. 재치와 유머로 장내를 압도하던 걸 기억한다. 넉넉한 웃음과 소탈한 목소리, 격의없이 대하는 편안함, 그래서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분으로 느꼈다. 지금껏 그 인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뵌 적이 거의 없다. 선생님 댁이 멀어서가 아니라 언제나 사무실에 나와 계시어 사무실로 가야 선생님을 뵈올 수 있어서이다. 지금도 한국 수필가 협회 사무실로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이다. 팔순을 넘긴 연세인데도 언제나 직장 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처럼 아침이면 남보다 일찍 출근을 하고 저녁이면 늦게 퇴근을 하는 생활을 하고 계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안방에 앉아 남에게 시중을 들라 하고 문밖 출입이 불편하다 할 연세인데도 선생님은 나이를 잊고 사시듯 사무실에서의 하루가 분주하기만 하다. 사무실로 찾아가도 가끔은 뵙지 못할 때도 있다. 어떤 일을 생각하고 결정지으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시고, 그 일을 성사시키려는 집념과 추진력이 남달라서 그만큼 늘 분주하시고 하시는 일이 많아서이다. 그런 분주함과 정력적인 활동이 20대 초반에서 60대까지 언론인으로 종사해온 기자 근성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수필 <구두>에서 보듯 ‘구두는 될 수 있는 대로 해어뜨려야 된다’는 구두 철학을 가지고 계시고, ‘해진 구두는 나의 생애의 기록’이고 ‘구두는 나의 그 시대의 일을 샅샃이 알고 있어’ ‘지난날의 행장을 알고 있는’ 구두가 좋다는 대목처럼 발로 뛰며 개인의 역사를 창조해 가신 행동적이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누리는 데서 오는 것같았다.
2000년 5월 모스크바에서 개최하는 국제 펜 대회에 선생님과 동행한 때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공항에서 내가 진 배낭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또 큰 옷가방을 손수 끌고 다니셨다. 누군가 짐이 가벼운 분이 도와주었으면 생각하면서 내가 다가서자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여행은 남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하면 안되고 ‘내 짐은 내가’라고 도움을 마다셨다. 그런 선생의 의지는 육신의 건강이기보다 마음의 굳은 심지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정신의 굳건함에서 배어나오는 것으로 그때의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선생님은 언제나 젊은, 그리고 누구에게 의지하기보다 모두를 자신의 가슴에 품어 안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너그럽고 애정이 많은 어른이시다.
한국 수필가 협회 30년
1월 15일.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선생님은 무교동에 있는 사무실에 계셨다. 신년 인사가 늦었다는 말씀을 드릴 사이도 없이 곁에 있던 사람을 대하듯 테이블에 앉으라고 하시고는 당신도 내 곁으로 와서 앉으셨다. 세 사람이 책상을 놓고 일하기에도 비좁은 사무실, 수필가협회에 쏟는 애정만큼 다른 일에 정성을 쏟으셨다면 이토록 비좁은 공간에서 고생하시지는 않으실 것같아 민망스러운 생각이 들어 『한국수필』만드시기에 얼마나 힘드시냐고 여쭈었더니,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어 그들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고 『한국수필』의 회원들과 후원자들에게 노고를 돌렸다. 한국수필가협회가 1971년 창립되고 회장을 맡아왔으니 30년이 된 살림살이인 셈이다. 내가 테이블에 앉자 옛날 잡지 세 권을 펼쳐 보이셨다. 『隨筆文藝』라는 김충현 선생의 글씨의 창간호와 2.3집이었다. 『隨筆文藝』는 71년 4월에 창간된 것으로 한국 수필가 협회 창립과 동시에 만들어진 잡지다. 선생님은 마치 아름다운 보석을 보여주듯 30년 전 잡지를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셨다. 창간호에 실린 필자는 언론인․ 시인․ 소설가 등 문단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지금은 타계하신 김동리․ 신석정․ 이주홍․ 설창수․ 김사달 등이 눈에 띄였고, 지금 원로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정범․ 허세욱․ 김시헌․ 정봉구․ 윤재천․ 박연구 등의 필자도 보였다. 표지 앞뒷면에는 문인 협회장 김동리, 시인 협회장 박목월, 현대시인 협회장 서정주, 평론가협회장 조연현, 아동문학가 협회장 이원수, PEN 본부장 백철의 창간축하가 보이고, 현대문학․ 월간문학 그리고 한국․ 동아․ 경향․ 서울․ 조선 등 그 당시 서울의 일간 신문사장들의 축하광고가 실려 있었다. 수필 잡지 창간이 이렇게 언론과 문단 각 분야에서 관심을 보일 만큼 대단했던 것이었느냐는 말에 선생님은.
- 그 당시 수필이 문단에서 인정을 받았지요. 또 수필이 모두 수준급이었고, 수필을 쓰는 사람들도 학자, 언론인, 문단의 대가들이었으니까. - 예전에는 내가 쓰는 글이나 정지용이 쓰는 글이나 동일하게 취급했지, 똑같이 신문에 실리는 글이니까. 글 한 번 쓰면 모두 칭찬하고 수필집 한 번 내면 신문마다 평을 해주었지. 일제시대에 신문사에 근무하던 사람들, 문화부나 학예부에서 기사를 쓰던 사람들은 대개가 엘리트 문인들이었어. 그들이 쓰는 칼럼이 바로 수필이기도 했으니……. -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수필 쓰는 사람들 스스로가 수필의 질을 자꾸 떨어뜨리고, 그런 경향으로 이야기하며 우렝이(우렁이)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지금 수필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 대점을 못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야.
선생님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선생님이 쓰신 창간사를 읽었다. 수필가들이 늘어나고 그 가족들을 위한 터전과 무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에 시작했고, 『隨筆文藝』에 실린 수필로 모두 명인(名人)이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수필 가족을 서로 아끼고 돕고 길을 열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원칙을 아직도 지키고 계신 것같았다. 2집에서는 추천 작품이 눈에 띄는데, 지금처럼 등단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추천하고 그 추천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문단에 등단을 시킨다기보다 문인은 아니지만 좋은 수필을 쓴 사람을 찾아서 격려하는 것같은 추천이었다. 『隨筆文藝』가 제호를 『한국수필』이라고 바꾸고, 계간에서 격월간으로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113호를 내었으며, 회원은 70여 명에서 800여 명으로 늘었으니 많은 변화가 아니냐는 말씀과, 1982년부터 수필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한국수필문학상’도 제정하여 20회가 되었고, ‘한국수필’사에서 주는 ‘한국수필상’도 17회가 되었다고 하신다. 또 수필가들의 졀속과 자질 향상을 위해서 그리고 문학단체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세미나를 개최해오기 벌써 국내 세미나는 20회, 해외세미나는 7회을 맞았다고 했다. 그중 『한국수필』지령 100호 기념 국내 세미나를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미국의 작가 Phillip Lopata가 직접 사인을 해 준 The Art of the Persond Essay 라는 책을 내보이며,
- 미국의 서점에서 전 세계적인 수필들의 모음집 The Art of the Persond Essay를 발견하고 펼쳐들었는데 한국 수필은 눈에 띄지 않았어. 전 세계 소설가․ 시인․ 철학자들의 수필이 다 들어있는데 한국 수필만 빠져 있는 거야. 럿셀․ 오웰․ 쌔네카까지 들어있는데. 나는 한국이 빠져 있는 것에 분개해서 그 작가를 천신만고 끝에 찾아냈지. 그리고 한국으로 초청을 했지. 비행기표, 체재비 그가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그를 한국으로 오게 하는데 성공했어. 그리고 그가 주제발표를 한 세미나가 『한국수필』 100호 기념 세미나였어. 뉴욕에서 해외세미나를 가질 때에도 뉴욕에 있는 그에게, 당신을 초청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초청할 수 없다고 하니까 돈 안 받고 와 주겠다고 해서 뉴욕 세미나 때도 그가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지. 그는 한국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부산영화제에도 참석을 했고, 뉴욕에서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을 보고, 뉴욕 타임즈 1면에 기사를 쓰기도 한 사람이라 한국 수필과 문화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이 내가 해낸 일이었어. 우리네 여성들 그림도 마찬가지야. 세계무대로 나가야 하는데.
선생님은 소녀처럼 눈이 빛나며 이야기를 미술 분야 쪽으로 이어가셨다. 미술에도 관심이 높으신 것을 처음 알았다.
-월간문학 2002년 2월호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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