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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
  글쓴이 : 김광웅 날짜 : 03-12-11 03:33     조회 : 3834    

山 行

金 光 雄

나는 가끔 산을 찾아간다. 그러나 날짜를 정해놓고 가는 것도 아니고, 등반 모임이 있어서 여럿이 함께 어울려 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름 있는 명산을 찾아 다니는 멋이 있는 산행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별안간 가고 싶을 때 쉽게 갈 수 있는 산을 혼자서 터덜터덜 찾아간다. 그러니 고작 서울 주변의 몇몇 작은 산을 다녀봤을 뿐이다. 대체로, 간 곳을 또 가기 때문에 산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好奇心)도 없이 그냥 다녀오기 일쑤다. 일정한 날짜를 정해 놓고 다니는 것도 아니기에 어떤 때는 한 주일에 두 번 갔다 오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한 달에 한 번 다녀오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런 지경이라, 누구에게 등산이 취미라고 이야기할 처지도 못된다. 혹시 누가 산엘 다니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운동 삼아 가끔 가까운 산에 다녀오곤 한다고 할뿐이다. ‘산이 마냥 좋아 산을 찾는다’든지, ‘산이 거기 있어 산에 오른다’는 등의 어려운 뜻과 낭만(浪漫)이 깃들어 있는 그런 산행과는 거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 변변치 않게 보이는 산행(山行)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 삼아 산에 오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상정하고 있는 공통적인 이유이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건강의 의미를 신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둔다면 내가 산을 찾는 의미의 한쪽을 보다 선명(鮮明)하게 해주는 것이리라.
투박한 등산구두를 신고, 흙의 부드러운 촉감을 꾸밈없이 전해주는 지팡이를 짚고, 숲길을 걸어 오르면 그렇게 홀가분해질 수가 없다. 혼자 왔기에 체면 차려 신경 쓸 사람도 없고 경청해야 할 소리도, 또 조리 있게 정리해야 할 말도 없다. 눈이 빠지게 지켜봐야 하는 신호등 쳐다볼 일도, 까다로운 차선을 지킬 일도, 또 브레이크를 밟으며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욕설을 참을 일도 없다. 그냥 무거운 두 다리를 열심히 옮겨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억누르던 온갖 것을 다 접어두고 이렇게 열심히 다리 움직임에만 몰두하면, 내 감각은 안식(安息)을 찾고, 머리는 사람들이 떠들다 나간 빈방처럼 조용해진다. 힘이 좀 들면 가슴이 답답해질 만큼 숨이 가빠오기도 하지만, 오히려 내 마음은 더욱 편해진다.
멋대로 가지를 뻗치고 있는 나무들에 묻혀버린 계곡을 걸어도, 그래서 눈과 귀로 들어오는 정보(情報)는 단순하게 한정되어도 생각의 세계는 한껏 넓어지고 풍요해 진다. 능선을 기어오르느라 몸은 불안정하게 뒤뚱거려도 내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작은 봉우리에라도 올라 도시의 복작거림을 멀리서 내려다볼라치면 그 속에 묻혀 있던 미물(微物) 같은 내 자신의 모습에 한없는 연민(憐憫)의 정을 느낀다. 그러면서, 나는 머리에서부터 가슴을 지나 하복부로 체증(滯症) 덩어리 같은 것이 빠져나가는 시원함을 느낀다.
내가 산을 찾는 일에 자못 정(情)이 들도록 만들어 준 것은 담배였다. 8년 전 늦여름 정확히 말하면 1992년 8월 27일 나는 거의 30년간 피던 담배를 끊었다. 대학 졸업반 되던 해부터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흡연(吸煙)의 역사는 꽤 길다. 그러나 흡연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루에 반 갑 이상을 피우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40이 지나면서 흡연이 심리적으로 부담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담배 끊기를 결심하고 몇 번씩이나, 한 달쯤 끊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고 번번이 내 의지의 박약을 확인했을 뿐이다.
마지막 금연(禁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아들과 딸이 내 건강을 걱정하여 적극 권유한 탓이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식들 앞에서 내 허약한 정신력을 보이기가 싫었던지 생각지 못했던 힘이 솟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딱 끊고 한 달이 지나니 금단증상(禁斷症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겪은 금단증상은 마치 사춘기(思春期)를 다시 겪는 것 같이 들뜨고, 불안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나잇살 먹어서 그런 사연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 우연치 않게 택한 것이 가까운 산을 헤집고 다니는 일이었다. 마침 가을이었고 다행스럽게도 그 해 가을은 잡다한 일들이 적었던 탓으로 기분이 들뜰 때마다 산을 찾았다. 그렇게 혼자서 산을 이리 저리 헤집고 다니면 그런 대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산과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되었고, 산은 나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더구나 이제 산은 내게 있어서 안식을 위한 마음의 고향일 뿐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산해 내는 생각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산행이 제 자리를 잡으면서 부산물이 생기게 되었다고 나 할까, 고맙게도 산은 내게 선물을 안겨주기 시작하였다.
교수라는 직업은, 전공(專攻)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본질상 골치 아픈 일의 연속임을 부인할 수 없다. 별 소득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을 이모저모 돌려봐야 하고, 연구랍시고 하는 일들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지.... 일반적으로 전문직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형식상 매여 있는 부분은 적은 반면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굴레를 쓰고 있는 것이 교수라는 직업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어렵고 답답할 때, 산행을 하면 머리가 맑아진다. 번뜩번뜩 야무지고 멋진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답답하게 꼬여있던 문제들이 시원스레 풀어지기도 한다. 어떤 길을 택하는 것이 적절할까 갈등(葛藤)으로 남아 있던 일이, 저절로 제 갈 길을 찾아가듯 자연스럽게 마음을 정해주기도 한다. 그야말로 산은 닫혀 있던 내 생각의 세계를 부드럽게 열어 주는 요술 주머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열림은 내가 의도적으로 집중하고 몰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묵묵히 땅만 보고 걸으며 오르내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이런 저런 일들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분명 ‘산’과 ‘산행’이 가진 신비한 조화(調和)임에 틀림없다. 불가(佛家)에서 이르는 이고득락(離苦得樂) 전미개오(轉迷開悟)의 길이 바로 거기 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절은 깊은 산에 묻혀있고, 스님들은 그 산을 묵묵히 오르내리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것이 아닐까.(2000년 4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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