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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의 날
  글쓴이 : 김행자 날짜 : 03-12-11 02:55     조회 : 4000    

부부의 날

김매원(본명 김행자)

외출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동네 제과점 앞을 지나다 보니 쇼 윈도우에 붙은 포스터에 눈길이 갔다.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라고 큰 글씨로 써 붙여있다.

픽- 하고 웃음이 나온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가정의 달 5월답게 부부의 날로 마감을 하려는 것일까?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빼빼로 데이 등 상인들의 상술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기념일들처럼, 결국은 부부의 날 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나보다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치려다가 나도 모르게 제과점으로 발길이 돌려졌다. 크림과 과일로 화려하게 만들어 놓은 케이크가 눈에 많이 띄인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축하 케이크를 하나 사다가 촛불을 켜 놓고 와인도 한잔 곁들여 기분을 한번 내어볼까? 그러나 건강을 생각해서 웰빙 코너에서 건포도와 호두가 듬성듬성 박힌 호밀빵을 하나 사가지고 들어왔다.

빵을 잘라 반쪽씩 나누어 먹으며 우리야 매일 같이 부부의 날인데 뭐하는 남편의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렇다. 우리는 특별한 날이 없이 항상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37년이었다. 우리가 먹고 있는 호밀빵이 꼭 우리 부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화려하지도 않고, 달콤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다. 거죽은 딱딱하고 뻣뻣하나 속살은 그래도 보드랍다. 건건 찝찌름한 것이 목에 넘어갈 때는 거칠지만 몸에는 좋다고 한다. 거죽은 거무스름하고 뻣뻣하지만 속살을 씹을 때는 가끔 달콤한 건포도가 씹히고 뒷맛이 고소하다.

문득 얼마 전 어버이날에 찾아왔던 아들 부부의 일이 생각난다.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 올 때였다. 아들 부부가 음식점까지 오고 갈 때 둘이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을 보며 남편은 저 아이들은 저렇게도 좋을까?라고 말한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어른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서 이상할 것이 없는데도 보수적인 남편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사랑스러우면서도 보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하는 소리같다. 요새 젊은이들이야 다 그런데요, 뭘하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도 손잡고 갑시다하며 남편의 손을 잡으니 며느리를 의식해서인지 겸연쩍어 하면서 잡힌 손을 슬그머니 뺀다. 며느리 보기에 부끄럽다. 같은 여자로서 자존심도 상했다. 나이는 먹었어도 마음이야 젊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어도 자기 아내의 마음을 그리도 모르는가 싶어 남편이 야속하고 서운했다.

내가 소녀 시절엔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서 나의 배필감의 이상형을 그려 보았었다. 토니커티스 같은 남성미와 케리그란드같은 지성미를 갖춘 남자이기를 또는 신성일씨 같은 신선함에 온화하고 너그러운 김진규씨 같은 남성상을 그려 보았었다. 능력있고 영어도 아주 잘하는 외교관 부인이 되어 외국을 많이 돌아다니며 살고 싶었다. 또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정열적이고 나만을 사랑하는 그런 남자와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그려보다가 지금의 남편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나의 남편은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였다. 과묵하면서도 남성미 넘치는 투박한 사투리에 매력이 있어 결혼까지 했으나 매력으로 보였던 그 무뚝뚝함이 그렇게 재미없는 남편으로 된다는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었다. 결혼 초기에는 말없이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였었다.

그러다가 점점 닥쳐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며 숨가쁘게 살아오면서 사랑한다는 말조차 별로 듣지 못하고 그저 서로를 믿고 살았을 뿐이었다. 소녀 시절의 꿈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어려움을 겪으며 참고 이해하고 부딪치며 모난 곳이 깎이고 동화되어 둥글게 만들어 졌다.

아직도 서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37년을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아온 남편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세 마디 말 밖에 안한다는 경상도 사람이지만, 그래도 하루에 다섯 마디는 하고 사니 세 마디 하는 사람 보다 나은 편이고, 양은 냄비 사랑이 아닌 무쇠솥 사랑이라 아기자기한 재미는 없어도 은근한 맛은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자위해 본다. 또한 자식들 넷이 부모의 도덕적 관념 밖으로 탈선한 일 없이 잘 자라주어서 그것도 다행한 일이고, 그 중 셋은 배필을 만나 새로운 부부 세 쌍이 탄생되어 가정을 이루었다. 앞으로 막내아들이 애인이 생겨 결혼한다면 우리 부부에서 파생된 네 쌍의 부부가 탄생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 부부의 사랑의 결실을 한번 평가해 본다면 평균수준은 될까?

그렇지만 자식들은 성장과정이 우리와 달라 요즘처럼 이혼이 난무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처럼 참으며 잘 융합하며 살아 줄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그들도 궤도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는 부부로 살아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부부란, 호밀처럼 좋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도 건포도와 호두를 넣어 새로운 맛을 창조해 내는 솜씨 좋은 제빵사와 같이 부부의 행복은 그들 부부가 서로 융합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 부부는 60을 넘어 70을 향해가고 있는 노년이다. 지금까지 무덤덤하게 살아온 지난 날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그래도 호밀빵에서 가끔 씹히는 건포도와 호두의 맛처럼 간간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입안에서는 또 한 개의 새콤달콤한 건포도가 씹힌다.

내년 부부의 날에는 더 멋있는 이벤트를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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