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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바꼭질을 하고싶다 / 아름다운 실버
  글쓴이 : 강현순 날짜 : 03-11-27 23:13     조회 : 5629    
베란다 건조대에 빨래를 널러 나갔다가 오늘따라 너무도 투명한 하늘빛에 매료되어 눈길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치마를 팔랑거리며 황급히 달려오더니 아파트 화단의 나무 뒤로 가서 는 살그머니 웅크리고 앉는 것이었다. 하는 짓이 궁금해서 잠시 일손을 놓고 바라보니 섰자니 저쪽에서 또 다른 한아이가 이번에는 쓰레기통 뒤로 가서 먼젓번 아이처럼 쪼그리고 않는다. 그때사 아하 숨바꼭질을 하고 있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호기심 어린 미소가 살포시 번져 나온다.


요즘처럼 조금이라도 빈틈만 있다 싶으면 네모 반듯한 차가운 회색 건물이 들어서기가 바쁜 도시에서 마땅히 숨을 장소도 없을텐데 더구나 부모가 마련해준 고급장난감엔 눈길을 주지않고 어떻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숨바꼭질 놀이를 생각할 수 있었을까.


나의 키가 나무와 쓰레기통 뒤에서 술래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고 있는 저 아이들의 키와 비슷했던 시절, 내가 살던 동네의 아이들은 학교를 파하기 가 무섭게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하나 둘 골목으로 모여드는 것이 었다. 같은 또래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곳엔 친구들 뿐만아니라 형제들도 심지어는 집안의 삼촌과 조카들까지 손을 맞잡고 나왔다. 우리는 자치기, 전쟁놀이, 숨바꼭질 놀이를 대체로 즐겼는데 이상하게도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시간은 꼭 어스름 해질녁 이었다.


숨바꼭질의 원리가, 감쪽같이 잘 숨어야 하고 또 술래는 족집게처럼 쏙쏙 잘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고 보면 나는 숨바꼭질 놀이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숨을 줄도 몰랐고 술래노릇 역시 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유달리 무섬증 많은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깊숙이 숨으려면 왠지 어둠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언제나 술래와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숨기가 일쑤였고 그렇기에 항상 먼저 찾기곤 하였다. 어떤때는 아주 찾기쉬운 가까운 곳에서 그냥 서있기만 하였는데도 술래가 미처 나를 발견하지 못하면 팽팽한 고무줄 같이 느껴지는 그 잠깐의 침묵이 견딜수 없어 그만 스스로 나오기도 하였다. 더구나 내가 술래가 되는날이면 아예 숨바꼭질놀이는 끝이 날 수가 없었다.


다른 술래들은 나무 위에도 올라가 보고 허물어진 담벼락 뒤로 돌아가 보기도 하고 개울가 다리 밑에 가서 용케 아이들을 찾아내지만 나는 도대체 겁이나서 찿아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서서 눈치만 살피다가 단지 백 퍼센트 확실한 장소에만 가 볼 뿐이었다.


그래서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 만큼은 그런 내가 재미가 없다며 끼워주지 않으려 했고 토라져서 눈물을 글썽이며 집으로 가면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중학생 언니는 그런 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곤 했었다. 그 다음엔 언니와 둘만의 숨바꼭질 놀이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언니는 나보다 더 술래노릇을 못하였다. 내가 아주 찾기 쉬운 방문뒤에 숨었는데도 공연히 엉뚱한 책상 서랍을 열어 젖히며 "어? 우리 현순이 어디 갔지" 하는 것이어서 나는 언니가 나를 쉽게 찾으라고 일부러 발을 방문 밑에다 쭈욱 내밀었다. 그런데도 언니는 내 발의 바로 옆에 펴놓은 애꿎은 이불을 몇 번이나 들어올리며 "이상하네 너무 꼭꼭 잘 숨어서 도저희 찾을수가 없네"하며 혼자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재미있어서 언니가 학교만 갔다오면 숨바꼭질을 하자고 졸라댔었다. 그 무렵 언니는 나에게 숨바꼭질 놀이를 참 좋아한다고 말하였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언니가 나 외에 다른사람들과 숨바꼭질하던 모습은 한 번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윽고 나무뒤에 쭈그리고 앉았던 아이도 쓰레기통 뒤에 숨었던 아이도 술래한테 발각되었고 너댓 명 되는 아이들은 환호를 지르며 놀이터 쪽으로 달려가건만 건조대에 빨래를 널기위해 섰던 나는 꼼짝을 못한다.


누구나 한번쯤 그럴때가 있겠지만 요즈음 나는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어난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떠나 한번쯤 꼭꼭 숨어서 그들에게 과연 내가 필요한 사람인지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해 보고 싶다. 또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과도 시선이 맞닿지 않는 먼먼 곳으로 가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꼭꼭 숨고 싶다.


*************

 아름다운 실버 
 어느 문학상 시상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의 가슴은 내내 감동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권위 있는 그 상을 재정한 사람, 심사위원, 사회자, 수상자 그 모든 분들의 연세가 일흔 이쪽 저쪽이라는 것에 놀랐다. 한마디로 은발 일색이었다. 한결같이 젊은이 못지 않은 씩씩한 모습에 더욱 놀랐다.

여류시인인 심사위원장이, 수상자가 상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또렷한 음성으로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발표하였을 때 우리는 일제히 두 손바닥을 힘차게 맞부딪쳤다. 젊은 시절에 등단한 이후로 오늘날까지 오로지 문학 외길을 걷고 있다는, 일흔이 훨씬 넘은 수상자가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단상에서 겸손하게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장내는 차라리 숙연해지기조차 하였다.

단상에 있는 분들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문단에서만큼은 후배들에게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문학적 업적이 실로 대단한 분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을 주는 사람한테서 목에 힘을 준다거나 어깨가 뒤로 젖혀지는 따위의 권위의식에 젖은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수상자 역시 당연하게 상을 받는다는 느낌으로 당당하기는커녕 언행이 그저 송구스럽고 황송할 따름이다. 숨어서 묵묵히 착한 일을 하다 담임 선생님한테 들켜서 상을 받는 순진한 초등학생을 연상케 하였다. 실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고향의 뒷동산에 팔베개하고 누워 마냥 두둥실 떠가는 흰구름을 올려다보는 듯한 안온한 시간이었다.

기실 젊음은 듬직하고 강건하고 매혹에 차 있다. 반면에 어쩐지 불안하다. 그 열정이 어느 순간 어디서, 어떻게 발산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년은 젊은이 못지 않은 우아한 매력은 있으되 불안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이와 함께 지혜가 자라고 주름살과 함께 품위가 갖추어지므로 뜨거운 감정을 우선 차가운 이성이 일단 정지시킨다. 또한 인생의 깊숙한 맛을 앎으로 인생을 사랑할 줄도 안다.

사람도 식물의 그것과 같아서 싹을 내고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시들고 그리고 마르는 것을 보면, 그분들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면서도 한갓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꽃은 아무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하고 평범한 그런 꽃이 아니다. 그 찬란하고 눈부신 꽃은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영광이었다. 또한 그분들은 아름답게 피운 그 꽃을 금세 시들게 방치해 두지 않는다. 좀더 향기롭고 아름답게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수반하겠지만 슬기롭기에 지혜롭게 대처할 줄도, 극복할 줄도 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대하면 나는 마냥 든든해진다.

나는 대체로 나보다 젊은 사람보다는 인생의 깊은 멋과 맛을 아는 그런 분들 곁에 가길 좋아한다. 그런 분들 곁에 가면 좋은 향기가 난다.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는 사향노루의 그것과는 견줄 수가 없다. 그 공기는 너무나 영롱하고 신선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심호흡을 하곤 한다. 그 향기를 나의 영혼에 닿게 하기 위함이다. 모든 게 부족하고 서툴기만 한 나로서는 그렇게 하여 나의 영혼을 정화, 미화시키고 싶은 것이다.

문우 중에서 예순이 넘었는데도 초등학생에게 수 년째 피아노 레슨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 언젠가 누구에게 그 얘기를 하였더니 그 사람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 연세에?’하고 ‘핫-’ 웃는 것이었다. 가르치는 분도, 자녀를 맡기는 학부형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 표정 속에는 그분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 같은 것이 엿보였다. 정말이지 내적으로 외적으로 얼마나 고우신 분인지 모른다. 자신의 맡은 일을 묵묵히 그리고 깔끔하게 처리해 나감은 말할 것도 없고 효부에, 현모양처이신 그분은 우리 후배 문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나이를 잊고 사시는 또 한 분이 있다. 직장에서 퇴직하신 지는 이미 오래이다. 칠순이 가까운 연세임에도 천성이 부지런하여 가만히 계시지를 못한다. 문학 모임에서 새까만 후배들이 있음에도 궂은 일, 허드렛일까지 곧잘 하여 후배 문인들이 당황할 때가 많다.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올곧은 성품은 한 그루 푸른 소나무를 연상케 한다. 작품활동도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하시는 모습을 보노라면 존경심이 절로 솟구친다.

사회는 갈수록 노년화 되어가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 곳곳에 실버의 그늘이 깊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한때 ‘낙엽’ 또는 ‘황혼’으로 실버세대를 인생의 변방에 비유했다. 한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실버의 마을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해가 없으면 그늘도 없고, 눈부신 신록이 없이는 가을의 낭만인 낙엽을 밟을 수도 없다.
쨍쨍한 햇살이 빛날수록 황혼은 더 아름다운 고요로 우리 눈을 적신다.
나는 실버를 우리 삶의 원두막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는 세월 오는 세월 잠시 불러 앉히고 부는 바람 뜬구름도 손짓해 부르고 넉넉한 온유와 편안한 눈길로 누구라도 다정하게 끌어 안아 주는 포근한 품 같은 것.

요즘처럼 삶에 지치고 믿음이 부실한 사람들, 오만과 독선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들 틈새에서 하루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울 때 그래도 우리 삶의 공간에 ‘실버’라는 큰 울타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위해 삶의 그늘이 되어 주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어깨가 축쳐진 사람들 가슴을 다독거려 주고 싶다. ‘실버의 축제’인 시상식을 나오면서 삶을 잘 살아오신 그분들에게 나는 속으로 ‘아름다운 실버’라고 외쳤다.

김영월   11-04-30 21:50
두편의 아름다운 수필, 술래와 실버 얘기 잘 읽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꼭 필요한 존재인가, 가끔 자신에게 자문하며
숨고 싶은 마음이 그렇고 인생의 깊이와 맛을 더해가는 숙성된 실버로서
누군가에게 남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되고 싶습니다.
  참 오랫만에 수필을 통해 만나는 군요. 새봄의 향기 속에 좋은 글 많이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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