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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다발 / 동백의 씨
  글쓴이 : 고동주 날짜 : 03-11-27 23:05     조회 : 5051    
나에게 있어 연중에 든 칠월의 첫날은 역사적이면서도 뜻깊은 날이다. 몇해전인 민선시장으로 첫출발을 하던 그날도 그랬었고, 작년 그날도 내 생의 페이지에 못잊을 장면으로 각인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법령을 준수하고 주민의 복리 증진 및 지역 사회의 발전 과 국가 시책의 구현을 위하여...."

두 번의 시장 선서 . 치열한 인물 경쟁속에서 나를 선택하여준 많은 시민들과 직원들 앞에 섰던 그 날은 , 무거운 책임감이 두 어깨를 누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회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험난하고 거친 "선거" 라는 고지를 탈환하고 ,승리의 깃발을 꽂게 된 기쁨. 그것은 호박이 덩쿨 채로 굴러 들어온 듯 운이 좋아 그저 얻은 결과가 아니었기에 더욱 보람된 것이었다. 상대후보의 흑색선전 속에서, 내 보잘 것 없는 이력은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람에 흩어져 날리는 인쇄물과 함께 찢겨지고 뭉개졌다. 하지만 시민들의 귀는 진실로 통하는 통로로 열려 있었고, 덕분에 지난 1차 때보다 더 많은 표를 선사 받을수 있었다. 하긴 외적인 조건으로 인물을 고른다면, 후보자들 중에서 나는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임에는 분명 하다. 일류대학 출신이 아니고, 행정고시 출신도 아닌, 너무나 보통 인물이다. 무엇하나 자신있게 내세우며 "나는 이런 사람이요"하고 자랑할 만 한 게 없다.


어릴 때 부모를 여위고 일찌감치 홀로 서기를 하였다. 어린 가슴에 뻥 뚫린 구멍사이로 바람 시린 날들이 지나갔고 남아 의 용기도 빠져나갔다. 그 눈물 젖은 유년의 뜰에는 밤하늘의 달이 유난히 추웠고, 한낮의 태양까지도 쓸쓸 하였다. 마당에 드리워진 대나무 숲의 그림자가 은하수 아래에서 우수수 흔들리던 밤, 나는 사람이 아닌 대나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몸부림 치는 듯, 대나무와 나는 한마음이 되어 해풍이 유난스러운 밤을 틈타 그렇게 울곤 하였다. 참으로 외로웁고 막막한 시절이었다. 그시절 나는 숙부님 댁에 얹혀 살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란 존재가 사라진 내 어린 가슴속에 숙부님은 따스한 부정으로 다가오셨고,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반세기여 년 전, 그때는 나라의 살림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랬듯이 남쪽바다 작은 섬의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끼니 굶기를 밥먹듯 하였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육지에 있는 학교에 까지 나를 유학 보내실 정도로 조카의 장래를 생각하셨다. 그 당시 유일한 생명의 젖줄인 토지를 팔아 학비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숙부님 힘으로 감당할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부터는 내 스스로 해결해야 되는 일인 줄 알고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 대학을 기웃거려야 했다. 이런 부족한 까닭으로 소위 "일류"라고 대접하는 이 나라의 보편타당한 진리(?) 앞에서 늘 주눅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삶의 질은 최고학부 졸업장으로 그 가치가 평가되어 지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늘 외적인 잣대로 사람이 평가되어지는 사회의 한쪽 구석에서, 나는 불타는 향학열을 마음대로 펼칠수 없었던 미망을 끌어안고 외로움을 추스르며 살 수밖에 없었다. 과연,나의 학력이 선거를 치르면서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 죄 없는 과거가 사정없이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외적인 조건 중에는 타고난 인물도 들어간다. 고생에 찌들려서인지 왜소한 체구에 특징없는 얼굴. 어디를 봐도 십수만 시민의 대표자격으로는 부족한 듯 하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죄송할 따름이지만 어쩌겠는가. 이건 정말 하늘의 뜻인 것을...


어느 친구가 말했다. 나를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그것은 훌륭하다는 의미가 아닌, 부족한 부분이 그렇게 많은데 시장 선거에서 두 번씩이나 당선되었으니 놀랍다는 뜻이리라. 또 어떤 분은 나더러 관운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런 요행으로 어찌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랴.


이모든 영광은, 따지고 보면 숙부님 덕택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험란한 세상에 혈혈 단신으로 남은 어린 조카를 거두어 바람막이가 되시고, 비빌 언덕이 되시고, 마음의 지주가 되어주신 어른. 외적으로 부족한 것을 이겨낼수 있는 힘은 돈주고도 살수 없는 것이다. 바다를 집어삼킬듯한 태풍 속에서도 침착 할수 있는 지혜는, 성장기 시절에 숙부님의 따뜻한 손길을 감지하며 자라난 덕택이며, 성상 같은 그분의 인품 밑에서 세상사는 법을 터득하여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숙부님께 효도한번 제대로 못한 나는 마음이 늘 무겁고, 죄스러웠다. 아비 만한 자식 없다고, 풀지못한 숙제를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미루기만 한 것이다.


마침내 한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건 취임식 자리에 숙부님을 모시는 것이었다. 취임식이 있던 자리에서 숙부님의 표정은 참으로 행복하셨다. 애써 안으로 감추시려는 모습이 역역하셨지만, 조카가 이룬 꿈이 당신의 소원인 것을 내 어찌 모르랴. 식이 순서대로 거행되었다. 한 시민이 앞으로 나와 축하의 뜻으로 나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그걸 받는 순간, 이 기쁨의 순간을 숙부님께 드리자는 생각이 또 문득 드는 것이다. 그래서 예정에는 없었지만 숙부님을 시민들 앞에서 소개 하였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은 일찍 여위었지만 길러주신 부모님께서 오늘 이 자리를 함께 하셨습니다. 조카의 외로움을 감싸 안아서 바르고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여 주신 나의 숙부님 이십니다. 병으로 고생을 하시면서도 당신의 치료비 보다 조카의 학비를 먼저 걱정 하시고, 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는 천하가 무너져도 부르거나 방해하는 일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가난 했던 시절,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조카의 배고픔을 걱정하시고, 앓을까 다칠까 늘 염려해주신, 그 뜨거운 사랑과 희생과, 땀과 눈물을 나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합니다...."


소개를 하다 말고 나는 중간쯤에서 그만 목이 메이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식장안은 그만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다음 말을 이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커다란 희생을 어디에다 비교 하겠습니까. 결국 오늘의 영광은 숙부님의 것이나 진배 없기에 여러분께서 주신 선물을 숙부님께 드리 겠습니다."


당신의 가슴에 꽃다발을 안겨드리자,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진 가난만 아니었더라면 일류 대학도 나오고, 행정고시도 무난히 거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나의 삶이다.


하지만 그러한 엘리트가 되었더라면 행여 자만으로 인하여 오늘 이 자리 에까지 오르지 못했을지 또 어찌 알겠는가.


붉은 물감이 수평선에 쏟아진 듯, 석양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내 고향. 이 운치있는 통영에다 나는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은은한 향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낙조의 불그스름한 모색이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푸른 물빛에 스며들 듯, 더 깨끗하게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내 꿈이 시민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또 이러한 노력이 그들 곁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일이다.



동백(冬柏)의 씨 
가을이 오붓하게 익어가는 어느날 동백의 섬 고향마을을 찾았다 .

밭 언덕마다 줄지어 늘어선 동백나무 들은 성장이 둔한 탓으로 어릴 적에 눈에 익은 그대로인 듯하여 더욱 정겹다. 멀리서 보면 녹색의 아름다운 관상 상록수 이고, 가까이 보면 윤기 흐르는 잎사귀마다 햇빛을 하나씩 나누어 간직한 초롱초롱한 눈빛들이다. 그 눈빛 이파리들 사이를 자세히 보면 작은 사과처럼 푸르고 불그레한 볼을 살짝 내민 야무진 동백 열매를 만날 수 있다. 그 열매 속에 간직된 검은 갈색의 씨는 가을이 짙어 지면 두꺼운 껍질을 스스로 깨고 땅에 떨어진다. 그 씨에서 짜낸 동백기름을 옛여인들은 아주 귀히 여겼다.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나서면 여인의 정갈한 품위에 윤기가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옛 멋은 이제 70고개의 할머니들에게나 드물게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을 뿐 흔적을 감춘 지 오래여서 아쉽다. 이처럼 동백의 씨가 상품가치를 상실하게 된데 대해 작은 안달을 해보는 것은 내게 그럴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연과 만나기 위하여 20대 초반의 시절을 떠올려 본다.


군에 입대하여 두 번째 휴가를 갔을 때로 기억된다. 영하 30도의 추위와 싸우면서 교육에 열중하다가 휴가를 받으면 사병들은 모두들 정다운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고향으로 달리는 발걸음이 가볍고 신이 난다. 나도 그들 틈에 끼여 군용열차를 탔다. 밤을 세워가며 달리는 열차가 남해안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마음 속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 졌다. 어릴 때 어버이를 여윈 서러운 외톨이의 고향은 이미 따스한 정이 식은 타향이던 것을....


그래도 첫 휴가를 고향마을 숙부님 댁에서 묵고 귀대할 적엔 몇푼의 차비를 쥐어주는 숙부님의 손길에 차가운 시선을 꽂던 숙모님의 모습이 확대되어 회상되었을 때 휴가를 출발한 것이 원망스러워 졌다. 그러나 달리는 열차를 되돌릴 수도 없었다. 찻길 뱃길 합하여 하루 밤낮의 여독에 지친 몸으로 그리웠던 섬마을 가장 가까운 혈육의 대문을 두드렸을 때 예상했던 반응보다 더욱 싸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조카의 문안 인사조차 묵살되는 듯한 숙모님의 모습보다도 한가닥 정의 끈인 숙부님이 장기 출타 중이시라는 충격 때문 이었으리라.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독을 스스로 달래면서 친척집들을 전전 하다가 귀대 일자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귀대할 여비 마련이 문제였다. 나룻배를 타기 위하여 바닷가로 내려오면서 텅빈 호주머니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앞을 가렸다. 나룻배에 오르기는 했으나 큰 섬의 여객선 부두에서 승선을 거절당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귀대하는 것을 포기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퍼런 바다에 뛰어들어버릴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마냥 즐거워야 할 휴가가 이렇게 낭패스럽게 까지 될 줄은 몰랐다.


아쉬운 배웅의 눈길 대신 외면의 설움.......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저 먼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 어머니!" 하고 소리쳐보고 싶었다. 나룻배는 나를 포함한 10여 명의 손님을 실은 채 저만치 떠나고 있었다 그때 마을 뒷산 언덕에서 "오빠!" 하고 울부짖으며 천방지축 뛰어 내려오는 열세 살의 어린 사촌 여동생 모습이 젖은 시선에 어렴풋이 나타났다. 나룻배 노를 젖던 사공은 다시 뱃머리를 돌려주었다.


위태롭게 뛰어내려오는 그 아이도 나와 비슷한 처지인 조실부모한 고아로서 일곱 살 때부터 숙모님의 시중을 들어 가냘픈 손마디가 거칠었고 총명한 까만 눈은 학교의 문턱마저 까맣게 잊고 사는 불쌍한 아이였다. 오빠가 귀대하는 날 아침 숙모님을 대신하여 동리 아주머니 들을 찾아다니며 동백의 씨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팔아 갚겠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애원했었다. 어렵게 빈 몇푼의 돈을 손에 꼭 쥐고 뱃머리를 향하여 달렸던 것이다. 눈물범벅이 된 어린 동생은 따스한 형제의 정을 건네주고는 바위에 주저 앉아 외로운 오빠의 처지와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겹쳐가며 파도처럼 흐느꼈다. 가슴깊이 와닿는 갸륵한 정의 전율을 느끼며 터지는 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두 고아의 가엾은 눈물을 보고 나룻배의 일행도 모두들 측은해 눈시울을 적셨다. 바다 저쪽 하얀 갈매기도 같이 울어주었다. 다시는 휴가를 나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이렇게 나의 낭패를 모면케한 동백의 씨로 하여 동백나무에 까지 정겨움이 더하게 되었고 그 동백을 볼 때마다 여동생의 따스한 정과도 만나게 된다.


동백꽃의 아름다움과 사철 변함없는 그 잎의 윤기와 그 열매의 야무진 껍질과 그 속의 씨. 그 씨의 은혜를 입고 아찔한 고비를 이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동백처럼 살지 못하고 허술하고 꺼칠하고 밋밋하게 살아온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지금부터라도 그 동백의 씨 하나를 마음밭에 묻어 사철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눈부신 윤기와 야무진 열매를 주렁주 달수 있도록 가꾸어 보리라.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차가운 갈바람 속에서도 붉은 빛의 꽃을 빚어내는 강인한 아름다움을 배우리라. 그리고 여동생의 따스한 정의 씨도 부지런히 심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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