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앵초 화분을 안겨주는 꽃집 아저씨가 있다. 아저씨의 꽃집은 내가 전에 나가던 학교 근처에 있다. 학교를 오가며 가끔 들른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도 안부를 묻고 지낸다.
‘앵초 나왔는데요.’ 하는 아저씨의 말이 내게는 가장 이른 봄인사다. 그로 하여, 아직은 찬 바람 속에 봄이 실려 있음을 알게 되곤 한다.
아저씨가 내게 주는 앵초는 ‘프리뮬러’라고 하는 서양 앵초다. 사오 월이면 우리나라 산에서도 앵초가 핀다. 20㎝쯤 되는 꽃줄기 끝에서 일곱 여덟 송이의 진분홍빛 꽃이 피는데, 프리뮬러 말라코이데스가 그와 비슷하다. ‘프리뮬러’는 라틴어로 ‘제일 먼저’라는 뜻이다. ‘폴리안사’는 꽃이 많이 핀다는 그리스어의 ‘폴리안토스’에서 왔다고 한다. 이름에 담긴 뜻대로, 이른 봄에 빨강과 분홍,주황,노랑,보라,하양 등의 꽃을 피운다.
올해 아저씨가 준 것은 하양과 분홍빛이다. 꽃시장에 나오자마자 가져왔다며, 어서 들르라고 성화였다. ‘꽃이야기’ 많이 쓰라며 화분을 건네주는 아저씨의 얼굴이 받는 나보다 환하다.. 벌써 한두 송이 꽃이 피기 시작한 화분 두 개를 안고 버스에 올랐다. 빈 자리가 있어 앉고 나니, 차가 흔들릴 때마다 소복히 올라온 꽃대가 부러질까 조심스럽다. 문득 ‘행운의 열쇠’라는 앵초의 꽃말이 떠오른다.
먼 옛날 독일의 한 마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리스페스라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꽃을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앵초를 아꼈다. 병이 깊어지면서 어머니는 유난히 앵초를 찾았다.
눈내린 산에 앵초꽃이 피어 있을 리 없지만, 리스페스는 여기저기 헤매다녔다. 지쳐서 주저앉았을 때, 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분홍빛 앵초꽃으로 머리를 단장한 앵초의 님프였다.
님프는 리스페스가 원하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길로 똑바로 가면 성이 나타나는데 거기에 네가 원하는 게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는, 머리에 꽂았던 앵초꽃을 하나 뽑아 주었다.
‘이 꽃이 바로 잠긴 성문을 열 수 있는 열쇠란다.’
님프가 손짓해준 길을 따라가자, 과연 성이 나타났다. 잠긴 성문의 열쇠 구멍에 앵초꽃을 집어 넣으니, 손잡이가 스르르 돌아갔다. 안에는 수려한 외모의 왕자가 있었다. 왕자는 리스페스에게 두 개의 방을 보여 주었다. 한 방에는 보석과 황금이, 한 방에는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었다.
‘원하는 걸 가져요.’
효녀인 리스페스는 물론 약 하나만을 선택했다. 그러자 왕자는 당신은 내가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함께 가서 어머님을 구합시다 하며 기뻐했다.
내가 만일 리스페스라면 그렇게 서슴없는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내 앞에 있는 앵초꽃이 그런 행운의 열쇠라면, 욕심내지 않고 가장 절실한 것 하나만을 고를 수 있을까.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남편과 나와 아이 모두 열쇠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우리가 돌아오는 시간에 어머님이 늘 집에 계셔주었기 때문이다. 한데, 어머님이 병으로 쓰러지시는 날부터 열쇠가 문제를 일으켰다.
대문과 현관문 열쇠는 어머님이 잠그고 다니시던 것 한 벌뿐이었다. 비상용이 한 벌 있기는 했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와 남편이 응급실로 달려간 사이, 중학생이던 아이가 돌아와서는 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열쇠부터 서둘러 맞춰서 한 벌씩 나눠 가졌지만 습관이 되지 않아, 먼저 나가는 사람은 그냥 나가기 일쑤였다. 열쇠 때문에 아이에게서 내게로 전화가 오고, 내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몇 달이 지나서야, 열쇠는 각자 챙겨야 하는 물건으로 자리잡았다.
그 무렵에 아이가 쓴 글이 있다. ‘집에 오니, 아차 열쇠가 없다. 또 안 가지고 나갔다. 할머니가 계셨더라면, 아무 걱정없을 텐데. 눈물이 난다’. 할머니의 부재를 아이는 열쇠를 통해 실감한 거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학교를 그만둔 뒤, 어머님의 역할을 내가 맡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우리의 귀가길에 대문과 현관문의 열쇠가 되어주기 위해, 어머님이 얼마나 많이 마음을 다스리셨는지.
시고모님댁에 갔다가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 더 놀지 못하고 서둘러 왔노라던 말씀을 그때는 흘려 들었다. 시골 당신의 친정 어머님이 왔다가실 때, 터미널까지 간 김에 차 떠나는 걸 보고 싶어도 아이 올 시간이 되어 헐레벌떡 돌아왔노라던 말씀 역시.
열쇠없이 다니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가 한시나마 집 밖에서 서성일까 걱정되어, 어머님은 직장이 없으면서도 시간에 쫓기던 분이었다. 남편과 어느새 청년이 된 아들은 가끔씩 내게 말한다. 열쇠 안 가지고 나간다고.
어머님이 그러셨듯이, 자기들이 돌아올 시간에 집에 있어 달라는 요구다. 그걸 받아주기 위해, 때론 나도 외출을 했다가 서둘러 돌아오곤 한다. 시계를 보며 조바심을 내다보면, 왜 괜한 고생을 시키나 하는 불평이 터져나온다. 그러다가는, 식구들을 위해 줄곧 그러셨을 어머님이 떠올라 입이 다물어진다. 참으시던 그 마음을 이제라도 헤아리게 됐으니 다행이다.
열쇠에는 어쩌면 연다는 큰 의미말고도, 나의 시어머님을 통해서 배운 절제라는 작은 의미도 담겨 있는지 모르겠다. 성문을 연 리스페스가 욕심을 다스리지 못해 황금이나 보석을 택했더라면, 성이 삽시간에 무너져 버리지는 않았을까.
내가 가진 앵초꽃이 그런 성문의 열쇠라면 하던 마음에 찬바람이 지나간다. 재물과 명예가 주는 안락과 환희도 아는 내가, 그보다 절박한 하나를 망설임없이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다. 벚꽃 모양을 한 예쁘장한 앵초꽃이 갑자기 경계의 목소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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