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기만 해도 정겨운 게 탱자울타리다.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 그리워지는 법이지만, 내게 있어 탱자 울타리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 선다. 어느 산비탈 텃밭에서 탱자울타리가 쳐진 전경을 목격하고 발걸음을 멈춘 것도 실은 그런 까닭이었다. 때가 5월이어선지 내가 만나 본 탱자 꽃은 마침 제철을 맞아 한창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걸 보며 발걸음을 멈춘 건, 진한 향기가 발걸음을 잡아 맨 탓도 있었지만, 그 것 말고도 꽃과 이파리들이 얼비친 사이로 드러난 텃밭의 전경이 한사코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곳, 겨우내 묵혀둔 밭두렁에는 똥장군 하나가 놓여있는데, 금방 작업을 마친 듯 장군은 입구가 열린 채로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풍겨오는 냄새가 꽃향기 뿐만이 아니였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눈이 보아주니 코가 뒤따라 확인한 거라고나 할까.
옛날에는 무시로 맡아온 냄새인데, 진한 탱자꽃이 역한 냄새를 중화시켜 주어 깜박잊 했는지 몰랐다.아무튼 탱자꽃의 향기는 강렬하였다. 머물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반가운 새들이 눈에 띄지 않는가. '찌지직 찌직' 마치 쥐가 내는소리처럼 울고있는 새는 다름 아닌 뱁새다. 놈은 작은 몸집을 움직여 가시투성이인 탱자나무 사이를 곡예하듯 '포르르 포르르' 잘도 날아 다닌다. 그런데, 전경은 옛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데, 마음에 다가오는 정감은 옛같지가 않다. 왜 그런 것일까. 고개가 갸웃거려 진다.
내가 탱자울타리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수년 전에 섬을 들렸을 때도 아주 규모가 큰 탱자울타리를 만났었다. 그때는 시절이 이보다 늦은 6월이어서 꽃들은 이미 지고 아파리들만 무성해 있었다. 다만, 탱자울 아래쪽이 하나같이 줄기를 드러내고 있는 양이 마치 소녀들이 줄을서서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종아리를 내놓은 모습같아서 인상적인 풍정을 보여 주었다. 그런 울타리밑 밭고랑에는 성찬을 마치고 시들은 꽃들이 아직도 누렇게 변색되어 바람에 휩쓸리고 있었다.그 모습이 한때의 영화를 보여주는것 같아 스산하였다.물론 그 때도 크기에 압도되어 ' 아,괭장히 큰 울타리구나!' 하고 감탄을 했었다.
나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의 편집 경향이 있다. 그건 유형의 것들보다는 무형의 추억에 집착하는 버릇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의도적이고, 미신적이라고 해도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 정월 대보름날의 전통 놀이인 '더위팔기' 다. 대보름 날 아침에 친구들을 마나 서로 먼저 이름을 불러 "내 더위!"를 외치며 놀던 풍습은 얼마나 애교스럽고 인간적이기까지 하였던가. 그리고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부적을 지니고, 노둣길에 징검다리를 놓아 동전을 감춰두던 풍습은 얼마나 정겨웠던가. 짚단 속에 찰밥을 넣어두고 누가 가져가기를 바라던 풍습은 궁핍한 생활 가운데서도 남을 배려한 행위였으니 미풍양속이 아닐 수 없다.
어렷을 적, 학교길 옆에는 과수원이 하나 있었다. 이 과수원 역시 울타리가 탱자나무로 빙 들러 쳐져 있었는데, 봄철만 되면 인분을 퍼내어 밭에다 뿌려놓은 바람에 지나다니기가 여간 곤욕스럽지 않았다. 해서 그곳을 지날 때는 코를 쥐고 뛰거나 잰걸음을 걸아야 했다. 하나 그러한 냄새도 탱자꽃이 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인분 특유의 역한 냄새를 탱자 향이 중화시켜 주어 눈치채지 못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신경 쓰이는 게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내걸려 있어서 손으로 눈을 가리고 황급히 지나치는 일이었다. 눈병이 난 누군가가 붉은 헝겊에 눈썹을 뽑아 싸서 탱자나무에 걸어놓고는 '제발 내 눈병 좀 가져 가다오'하고 방술을 해놓은 게 많아서다.
속설에 의하면 이렇게 해 두면 자기 눈병이 남에게 옮겨가 낫는다고 믿어서 한때 성하였다. 그러니 그걸 보면 기겁을 하여 피해 달아날 수 밖에. 당시에는 그런 비방술이 매우 못되 먹고 비열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 그런 풍습도 살아진 지금은 그게 아니다. 그렇게 액땜을 하겠다는 것이 어쩐지 인간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비록 의도는 불순했어도, 사전에 붉은 색깔로써 미리 경고를 취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피하도록 해주고, 그러면서도 자기는 병을 떨쳐 버리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한 행동이었으니 얼마나 소박한 발상이던가. 내가 산비탈 텃밭에서 무언가 아쉽고 허전하게 느낀 건 혹시 그런 비방 같은 걸 만나보길 기대한 건 아니었을까.
현대 사람들이 외향은 차려입은 옷, 먹는 음식, 몸매 치장으로 세련은 되었으나, 옛사람들이 물씬 풍겨주던 사람의 냄새가 이들에게선 느끼기 어려움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바라보아 눈병이 옮더라도 좋으니 어디서 그런 비방을 좀 만나볼 수 없을까. 탱자울타리를 보니 갑자기 소름 오싹 돋게 하는 꽃뱀 비늘 같은 그 부적들을 한번 만나 보고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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