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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영월 |
날짜 : 03-11-25 22:34
조회 : 2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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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김영월
다시 만추의 계절이 찾아 와 스산한 바람이 가로수의 낙엽을 휘날려 길가에 뒹굴게 한다. 낙엽들은 지난날의 반짝이는 햇볕과 정열적인 빗방울, 온갖 바람의 속삭임을 가슴에 간직한 채 오가는 사람의 발길 아래나 차량의 바퀴 밑에서 으깨어지고 있다. 어쩌면 가로수는 내년 봄에 다시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하여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견디고 있으리라.
나는 낙엽 지는 거리를 거닐며 한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이 구조조정이란 이름아래 보따리를 싸고 떠나가는 걸 지켜본다. 1998년을 강타한 아이 엠 에프란 바람이 얼마나 많은 실업자를 길거리에서 헤매게 했는가. 자연 또한 한 해도 빠짐없이 무서운 겨울을 이겨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기 위하여 놀라운 구조조정을 계속하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긴 채 한 잎도 허락하지 않고 북풍 한설을 이겨 나가도록 철저히 준비한다.
혜화역에서 종로 5가까지 이르는 대학로 거리의 양옆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로 조성된 가로수 길은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이다. 대학로 근처에 있는 직장 덕분에 출퇴근 때마다 이 길을 걸으면 어느새 가로수는 나의 다정한 친구로 다가왔다. 플라타너스는 유난히 잎이 커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고 가을이면 솔방울 같은 동그란 열매가 빈 가지에 매달려 훌쩍 큰 키에 이국적인 체취를 풍겨 준다. 원산지는 유럽이라는데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건너 와 이처럼 꿋꿋하게 잘 자라고 있을까. 온갖 소음과 매연이 끊이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강인한 생명력을 토해내고 있다. 도심의 거리가 콘크리트 건물만 우뚝우뚝 솟아 있고 아스팔트 길 보도 블록으로만 꾸며져 있다면 얼마나 삭막한 느낌을 자아내랴. 무엇보다도 가로수로 인한 도심의 푸른 녹음은 인간의 정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대부분의 남자들이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그대로 버리거나 아니면 가로수의 나무 등걸에 마구 비벼 끄는 걸 본다. 또는 나무 껍질의 틈새에 담배꽁초를 꽂아 놓고 유유히 돌아선다. 그것뿐인가. 사람들은 가로수를 괜히 발길로 툭툭 차기도 하고 칼로 긁거나 자기 이름을 새겨 놓기도 한다. 산행을 할 때도 나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건 나무를 이용해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턱걸이를 하거나 나무 등걸에 등을 쿵쿵 부딪혀 등다지기 운동을 열심히 해댄다. 나무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의식이 있다면 어찌 그리 몰지각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이기주의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단한 삶 속에서 가로수 잎새들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모습이나 아름다운 단풍으로 채색된 낙엽을 밟으며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건 소시민의 작은 위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부지런한 시청 청소부들은 길거리의 낙엽을 없애기에 바쁘고 아직 때가 이른 가로수 잎새들을 흔들어 일부러 떨어뜨리고 있다.
겨울이 되면 가로수 나목의 가지를 전선줄이나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잘라버려 마치 손발이 잘린 불구자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것처럼 흉측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이래저래 인간의 편의 위주로 수난을 당하는 가로수를 보면 가슴이 아파진다.
나는 가로수 밑을 산책하다가 몇 년이나 자랐는지 모를 우람한 나무 앞에 서서 발길을 멈춘다. 그 나무를 두 팔로 가만히 안아 보니 너무나 믿음직스럽게 여겨지고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것 같다. 큰 몸통 줄기에서 세 갈래로 균형 있게 뻗어 나간 줄기는 또 작은 줄기를 뻗어 고층 건물 위로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박고 공해에 찌든 환경 속에서 어쩌면 숲 속의 나무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나무야, 장하고 장하다'는 말고 함께 그 나무를 여러 번 쓰다듬어 줄뿐이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아실현을 한다는 건 나무나 사람이나 정말 귀하게 여겨진다. 정상인이 이룩해 낸 어떤 성취감보다도 장애인이 역경을 딛고 입시에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거나, 운동경기에서 우승을 했다거나, 훌륭한 예술품을 창작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훨씬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가정 환경이 아주 좋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탈선하는 경우도 많은데, 소년 소녀 가장이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잘 하고 병든 할머니를 돌보고 일인 이역을 감당해 내는 일을 보면 정말 장하게 여겨진다.
나도 힘겨운 자수성가(自手成家)의 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가난을 원망했고 부모님을 탓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자난 후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러한 환경이 감사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선택된 운명에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야말로 축복 받는 길이었다. 가로수도 산과 들에서 다른 나무들처럼 행복하게 숲을 이루며 자라지 못하고 도심에 끌려와 숨막히는 공해 속에서 살아가게 된 신세를 한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로수는 일상 생활을 통하여 인간과 가장 가까운 자연으로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인간의 영혼을 순화시키고 있다는 사명감으로 만족하지 않을까. 나 같은 소시민이 "시몽, 그대는 좋아하는가.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를" 하는 구르몽의 시구를 읊조리며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산책하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한국수필 1999년 3.4월호 (통권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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