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음덕
김의순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전지가 절 된 정원수보다는 심산에서 잡목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숲속의 나무를 더 사랑한다.
산에 가보면 나무들과 어루러져 듬성듬성 놓인 바위며, 산을 감싸안고 흐르는 비단폭 같은 냇물과 뭇새들의 지저귐도 아름답지만, 이 모두가 거기 나무가 있기에 산의 향연이 펼쳐지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나뭇잎 사이로 소슬바람을 걸러서 살갗을 간질이고, 풋풋한 향기는 코끝을 취하게 하여, 그저 황홀하기만 한 것도, 그 또한 거기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온갖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려면 무궁무진하겠으나 그 중에서도 나무만큼 변화무상한 미를 창출하기는, 자연 중에서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는 전혀 뽐낸다거나 교만하지 않는다.
계절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절기를 뚜렷이 알려 준다. 하여 그 색의 조화는 화가의 손끝을 떨리게 하고 시인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며,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가 낭자하게 낙화를 흩뿌려놓고, 질탕하게 놀다가 여름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왕성한 성장으로 맘껏 팔을 벌려 세상을 온통 끌어 안을 듯이 땅을 잰다. 그리고 어느 날 찬바람이 스산해지면 잎새는 윤기를 잃어간다. 홍조를 띠고 영화롭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부지런히 씨앗과 열매를 여물게 해서,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전을 준비한다.
그는 또 한번의 변신으로 꽃보다 더 성숙한 단장으로 가을 산을 물들였다가 마침내 가진 것들을 다 돌려주느라 사태져내리는 가랑잎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입은 옷까지 훌훌 벗어놓고 온 산에 묵도(默禱)를 올리는, 참담한 가을 제식(祭式)을 끝낸다. 그리고 겨울 산에 들어가서 그는 하얀 소복을 입고 인고의 아픔을 견디며, 하늘에 속죄하며 봄을 기다린다.
우리는 그의 미색과 향기로 기쁨을 얻고, 여러 가지 편리한 쓰임새와 부를 얻는 덕도 보이지만, 성자 같은 그의 삶에서 깊은 철학과 무성 무음의 설법을 듣게 된다.
우리는 나무를 볼 때, 잘 뻗는 수형의 자태와, 현란한 꽃과 탐스러운 열매 등을 보고 감탄할 때가 많다. 하지만 좀더 심미안을 뜨고, 뿌리를 본다면 땅 밑의 어둡고 습습한 지심 속을 깊이 깊이 파고들면서, 실핏줄 같은 잔뿌리로 수분을 빨아올려, 지상의 몸체에서 가지 끝까지 양분을 공급하는 뿌리에는 무심해지기 쉽다.
뿌리는 지상의 호사나 영화 같은 것은 아예 눈을 돌리고 나무는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제때에 맺도록, 밤낮 없이 펌프질만 하는데 꾀를 부리지 않는다.
그뿐인가 뿌리는 흙을 끌어안고, 사태를 막아서 산을 보호한다.
그리고 그는 밖을 엿보는 일이 전혀 없다. 나무는 제 몸만 가꾸는 게 아니다. 새들에게 둥지를 틀도록 가지를 양보하고, 팔을 벌려 지친 새들을 쉬게 한다. 또 여기저기 표피각질 속에는 곤충의 집을 짓게 하고, 그들이 방자하게 오르내리며 간지럽혀도 털어 낸다거나 화를 내는 일이 전혀 없다. 그리고 꽃 속에는 꿀을 안쳐서, 벌과 나비를 불러 친구 해 주고 꿀을 주면서도 추호도 공치사가 없다.
또 그의 삶은 어떠한가? 사철 밤낮 없이 비탈에 서서 비가 올 대는 함초롬이 비를 맞고, 엄동에는 눈을 덮어쓰고, 그 무게에 눌러 생 가지를 찢기는, 설해 목의 아픔을 보게 된다. 그는 땅으로 고꾸라지면서도, 누구에게 구원을 청하는 일도 없다. 또한 어떤 고초도 혼자 겪으면서 인고의 쓴잔을 거부하는 일도 없다. 그리고 사람의 손에 심겨지고 사람의 손에 베어져도, 베일 것을 왜? 심었냐고 저항한다거나 따져 묻는 일도 없이 순종한다.
또 그가 죽어서는 어떠한가? 같은 나무라 해도 어떤 나무는 좋은 목기도 되고, 또는 고급의 거리가 되어서, 주인의 사랑을 차지하고 매만짐을 받게도 되며, 웅장한 건축자재로 쓰여서 사람에게 부를 안겨 준다. 하지만 어떤 나무는 화목으로 밀려나서, 한줌의 재로 사위게 되면서도 그는 세상일에 전혀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운명이려니 하고, 절대자의 섭리에 따라 순종한다.
수없이 많은 날을 낙뢰에 놀라고, 풍상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한시도 나태하지 않고 분수를 지키며 삶에 충실한다. 그의 소박하고 준수한 미와 건강하고 줄기찬 생명력을 볼 때 마치 해탈한 성자의 자세같이 느껴져서 차라리 숙연해질 뿐이다.
살아서는 꽃과 열매와 향기를 주어 우리를 기쁘게 하고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지친 이를 쉬게 해주는 나무!
그런 그가 죽어서는 온갖 쓰임새로 우리에게 편리와 부를 주지 않던가. 그러고도 그의 마지막 혼을 사르는 불길로, 우리에게 따스한 온기를 주면서 한 줌의 재로 잠시 남았다가 흔적도 없이 사위어지고 만다.
얼마나 숭고한 그의 일생인가! 그런데 과연 그는 잘리고, 찍히고, 뽑히고, 버려지면서도 무저항 무폭력이다. 늘 순종만 하는 무심한 천치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도 토라지면 비정하리 만큼 무서운 힘이 내재해 있다. 호시탐탐 화기를 찾아 산불의 기회를 노리는 무서운 화재가 실눈을 뜨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방심을 해서는 안 된다.
나무를 사랑해서 심고, 가꾸고, 애정으로 기르면서 그를 잘 보호해 주면 나무는 부를 약속할 것이다.
한국수필 1999년 3.4월호 (통권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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