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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병식 |
날짜 : 03-11-25 22:37
조회 : 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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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나무 곁에 서보는 때가 있다. 더위를 피해 땀을 식히느라 다가가기도 하고, 품세가 좋아 보여 찾기도 한다. 그러다 바람을 만나면 우는 소리가 듣기 좋아 발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봄날의 오동잎 너풀대는 바람소리는 마치 풍경소리 같다. 절간의 풍경이 저 혼자 무료를 달래며 '덩그렁'거리 듯 나직이 너풀대는 오동잎의 움직임은 정적을 깨는 자연의 숨소리다.
그런가 하면 늦가을, 떡갈나무 숲을 한바탕 휘젓고 지나는 바람을 만나면 마치 도둑이 튀는 소란만 같다. 훔친 물건을 내팽개치고 달아나듯 하는 발자국 소리처럼 한동안 수런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초겨울 소나무를 흔드는 솔바람은 참빗으로 머리 빗는 듯 마치 정연히 '쏴아-'하고 소리를 내어서 그 소리만 들어도 금방 이마가 서늘해지고 정신이 명료해 진다.
나무들이 내고 들려주는 소리는 바람소리만 다른 게 아니다. 저마다 소성에 따라 나타내는 느낌도 사뭇 다르다. 엄나무는 전생에 무슨 한이 그리도 많은지 위리안치 된 죄인처럼 제 몸에 가시를 촘촘히 박아놓고 몸을 옥죄고 있어 바라만 보아도 절로 긴장감이 인다. 그런가 하면 대나무는 장마에 오이 크듯 단숨에 쑥 자라버려 너무 삶을 진지하게 살지 못하고 싱겁게 살아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동나무는 또 어떤가. 밑둥을 잘라내면 웬 삶의 애착이 그리도 깊은지 자꾸만 곁가지를 뻗고 나와 민망스러워 보이고 구걸하는 걸인처럼 천박스러워 보인다. 한편 느티나무는 조직을 촘촘히 짜는 재주는 있으나 도저히 융통성이란 없어 보이는 게 아쉽다. 게다가 그 큰 덩치에 매달은 낙엽을 가을만 되면 너무 허하게 설사하듯 주르르 주르르 쏟아내어 주책바가지가 따로 없어 보인다.
이에 비하여 감나무와 소나무는 단연 품위가 으뜸이다. 같은 반열에 있는 은행나무가 남달리 제 스스로 소화력(消火力)과 복원력을 지니고 있지만, 놈의 이파리는 너무 원시적이고 수세(樹勢)마저 그다지 준수하지 못하다.
허나 감나무는 품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심겨진 어느 장소에서나 원추형으로 의젓이 균형을 잡고 능란한 화가의 붓끝처럼 가지를 배열하여 뻗고 자란다. 그래서 화가이면서 수필가인 김용준선생은 이 감나무를 유독 예찬하고, 서양화의 대가 오지호화백도 이 감나무를 즐겨 그렸을까. 그분의 대표작 감나무 그림은 그림자가 땅바닥 가득히 드리워진 게 일품이다. 밤에 늘상 실루엣으로 서있는 이미지가 온전히 그 그림 속에 녹아 있다.화백께서도 진작에 그 이미지를 마음에 두었다가 살려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소나무이다.
씨를 틔우고 나서도 제 탯줄을 그대로 간직하는 탓에 밥상의 지렁종지처럼 아니면 젯상에 단골로 오르는 밤같이, 제 어릴 적 흔적을 기억하고자 함일까. 소나무는 사는 일이 고단하여 비록 거북등처럼 터진 껍질을 지니고 살면서도 배냇적 흔적들을 떨어내 버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날씨가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제 몸을 바늘같은 이피리를 침 삼아 겨누고서 본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잊지 않는다. 그러한 결과로 큰 무게를 지탱하는 대들보는 소나무가 아니면 감당을 못해 내고, 천삼백도를 유지해야만 온전히 구어지는 도자기도 이 소나무가 화목이 되어주지 않으면 어림이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나무의 품위는 그 특유의 빼어난 품세에 있다. 밑둥 잘린 오동나무처럼 구차히 삶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한번 죽을 자라에선 깨끗이 죽고, 단단한 것만을 덕목으로 아는 느티나무처럼 반발력을 키우지도 않는다. 더구나 나아가 한순간 대나무처럼 머쓱 자라서 하늘의 햇빛이나 다투는 그런 나무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엄나무처럼 자학을 일삼지 않고 떡갈나무처럼 과장되게 엄살도 부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나무들을 보면서, 때로 항상 그림자가 멋있는 감나무처럼 그런 인격을 쌓아 향기를 남기고 싶고, 또 한편으론 소나무처럼 근본을 망각하지 않는 가운데 설령 등터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꿋꿋이 자랄 줄 아는 법을 배워 닮고 싶다. 이중에 하나만 닮아도 성공한 삶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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