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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03-11-25 22:19
조회 : 2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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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야기 - 나무의 옷
류인혜
밤새 내린 눈으로 산천이 희다.
흰색의 밝음이 번져 마음까지 환해진다.
순백의 정결함으로 겨울눈은 사람에게 어린아이의 순수를 일깨워 준다.
그때는 설날이 다가오면 새 옷을 장만하였는데, 밤이 늦도록 화로 앞에서 인두를 꽂아놓고 식구들의 옷을 짓던 할머니와 어머니, 작은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새로 만든 옷을 입고 새해의 인사를 드리는 일은 세뱃돈의 유혹이 아니라도 무척 즐거운 추억이다.
자연도 겨울옷을 입고 좋은 내색을 숨기며 그 즐거운 마음의 무게로 숨을 죽이고 있다.
차창 밖으로 무심히 내다보다가 나무들에게로 시선이 간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무거워진 잎새를 떨구어 내고 빈 가지로 심심하게 서 있다가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새 친구는 나뭇가지마다 소복이 쌓여 을씨년스럽게 떨고 섰던 나무를 단장해 주었다. 겨울옷을 두툼히 입어 춥지 않아 보여서 고맙고 또 반갑다.
나무는 옷을 입어야 어울린다.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지은 초록의 옷을 입는다. 초록이 짙어져 더 이상의 푸름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았는가. 시인은 그 광경을 초록이 지쳐 잠이 든다고 했다. 지친 초록 잎이 가을의 햇살을 받아 마음껏 채색의 솜씨를 발휘하였다. 나무마다 고운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어 그 아름답게 단장을 한 나무구경을 하느라고 설악산 가는 길은 그리 멀고 먼 것이 아닌가. 뭇사람의 눈길을 받는 마음은 우쭐하지만 행동이 조심스러워 시간이 갈수록 그 어려움은 감당이 어렵다. 나무도 사람의 눈초리를 피하여 쉬고 싶어, 아름다운 옷을 떨구어 내고 빈 가지로 쓸쓸히 지내더니 이제 흰눈으로 새 옷을 지어 입었다. 그 모습이 우아하고 귀부인처럼 의젓하다.
흰색은 신부의 상징이다.
일생의 가장 귀한 날에 입는 순결한 처녀의 가장 아름다운 치장이다.
평생을 같이할 신랑을 만나는 날, 흰색의 드레스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 성스러운 순결을 자랑한다. 정결한 의식을 상징하는 흰색의 절정은 이제 굳게 닫아두었던 처녀림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곳의 나무들은 무성한 사랑의 숲을 이루어가려는 새 가정의 주인을 기쁨으로 맞이한다.
나무는 옷을 갈아입는다.
해마다 나이테를 만들어내는 세월의 옷을 한 벌씩 속 깊이 쌓아간다.
2002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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