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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03-11-25 22:16
조회 : 2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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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야기(7) - 서 있는 나무
류인혜
암사동 선사유적지로 오동나무를 보러 갔다.
며칠동안 오락가락 하는 비로 스산스러워진 채 허공을 떠돌던 마음이 문득 오동나무에게로 향했다. 선사유적지로 가는 넓은 길에는 인적이 없고 바람만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곳에 무엇이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하는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서있는 나무에 대한 신뢰다. 언제나 원하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고마운 실체다. 아무 때는 가서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장소가 가까이 있어서 좋다.
오동나무가 저기 있구나 바라보는 순간 비가 후두둑 쏟아졌다. 갑자기 거센 바람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시야를 가려 우산을 펼칠 사이도 없어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뛰어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며 뿌려지는 빗속에 묵묵히 서 있는 오동나무의 밑둥치가 눈에 들어왔다. 몸을 드러내놓고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는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움직임이 아무리 비감할지라도 나무와는 상관없으리라는 계산은 완전한 착오였다. 모든 생각이 뿌연 유리창 밖의 풍경처럼 흐릿하니 뒤엉켜 간다.
빗살이 뜸해지자 나무 밑으로 다가섰다.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 흩날렸다. 넓은 나뭇잎에 닿는 무수한 빗소리가 가슴으로 전해져 흘러내렸다.
조지훈 님의 <승무>를 배울 때 너무나 그 시에 도취되어 오동잎 사이로 지는 달이 되고 싶었다. 한편 넓은 잎을 너울거리며 적막하게 서 있는 오동나무가 되고 싶기도 했고, 햐얀 고깔에 승무를 추는 비구니가 되었으면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도 그 나무를 보지 못하다가 여기 암사동으로 이사를 와서야 무더기로 모여있는 오동나무와 만났다.
어느 봄 날 가까이 살고 있던 시인과 함께 동네의 한적한 곳을 산책하다가 보랏빛 꽃 등을 달고 있는 오동나무와 만났다. 오래 되어 고목이 된 수십 그루의 오동나무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도 장관인데 무수하게 달려있는 보라색의 꽃이 환상적이었다. 마음 속으로만 그리워 하며 만나기를 기다려온 터라 그 실현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 후로 수시로 만나러 다녔다.
원래 그곳이 오동나무 밭이라고 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뿐, 이태가 지난 후 꽃이 필 때를 기다려 가보았더니 어느 틈에 그 무성한 나무들이 다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아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허망한 느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유적지 안과 입구에 서른 그루쯤이 모여 나무 밑에 놓여진 통나무 의자 위로 그늘을 지어 주고 있다.
4월 하순쯤부터 피기 시작하는 꽃은 마치 나무에 무수히 매달아 놓은 꽃 등처럼 어울려 있다. 멀리서 보면 환하게 미소짓는 것이 아니라 우수에 찬 느낌으로 다가온다. 꽃잎이 약간 도톰하여 선지 은은한 향기가 오래간다.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어두면 옷을 다시 입을 때마다 흩날리는 향으로 즐거워진다. 그 나무에 대한 친밀함이 새롭게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계절이 깊어지면 그 꽃이 핀 자리마다 생긴, 푸르고 조그마한 열매의 색깔이 누렇게 변해가서 오동나무 가지마다 가을이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느낌을 준다.
어떤 생각이 깊어지면 자주 산책을 한다. 마침 집 주변에 나직한 산과 한적한 들길이 많아서 혼자 서성이기에 좋다.
혼자 있어 생각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진다. 그것에 흠씬 젖어 오직 홀로라는 게 뚜렷해질 때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깨닫게 되고 존재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나보다.
그래서 어느 날 하루쯤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어떤 모습으로 어느 곳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
또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 일상적인 습관과 지켜야 할 모든 도덕적인 인습에 대한 저항감이 생길 때, 제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나무가 보고 싶어진다.
나는 내 자리를 떠나서 나무를 찾아가지만 나무는 자기 자리에서 나를 맞이한다. 입고 있던 그대로, 슬리퍼를 가볍게 끌며 한가한 나들이를 하듯 걸어가서 오동나무 밑 의자에 앉는다.
유적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작은 나무들과 온갖 잡초들이 그 주변에서 함께 자랐지만 이제는 오동나무가 제대로 숨이나 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밑둥치 가까이 까지 보도블록을 깔아 두었다. 시멘트의 딱딱함에 발바닥이 아프다.
그리고 유적지 안은 조경 공사로 어수선하다. 그러나 그곳에 오면 옛날 언젠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 안에 있는 오동나무들은 그래도 나보다 행복하다. 제 마음대로 가지를 뻗어가고, 고개를 숙여 깊은 사색에도 잠기고, 유적지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심심하지 않다. 그래서 서 있는 모습이 당당하다.
비에 젖은 오동나무는 어디론가 떠나는 나그네의 심성을 닮고 있다.
객창에 뿌려지는 하염없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 속에 무수히 그려지는 그리움의 날개. 오동을 심어 그 날개 같이 넓은 잎사귀에 내리는 빗소리를 그윽한 정취로 벗삼은 이들의 깊은 마음의 수성을 어찌 다 알아 낼 수 있을까 .....
가을이 깊어져 무수한 잎이 떨어져 버린 후 빈 가지 끝에 홀로 떠오르는 달을 생각한다. 차갑게 번뜩이는 달빛아래 선 오동을 닮아 더욱 적막하고 비감한 모습으로 세상 위에 우뚝 선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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