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인용해 쓰고있는 성어(成語) 중에는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말이 더러 있다. 예컨데 소나무는 깨끗한 곳을 , 대나무는 더러운 곳을 좋아한다는 정송오죽(淨松汚竹)이 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정월은 소나무요, 오월은 대나무란 뜻의 정송오죽(正松五竹)이 그 것이다.그런데 이 말속에는 특기할만한 공통점이 하나 보인다. 그게 뭔고 하니 한결같이 소나무를 높여 대접해 부른다는 점이다. 굳이 이 걸 인용하지 않더라도 소나무는 분명 여느 나무들과는 품어내는 기품이 다른가 한다. 선인들 또한 그렇게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내가 알기로 나무중에 인품(公)을 부여한 나무로는 이 소나무(松)와 두송, 공손수(公孫樹)라 불리 우는 은행나무등 몇나무 뿐으로 안다.그중에서도 소나무는 특히나 근성과 품세가 돋보이는 나무다. 자기 소성대로 자라지만 주위 환경에 맞추어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자리를 잡은 후에는 그 품위를 지키는 나무다. 그러한 까닭에, 문헌에 보면 의외로 소나무를 좋아하고 칭송한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이선생은 세한삼우 중에서도 단연 소나무를 으뜸으로 쳤고, 사육신 성삼문은 죽어 가는 자리에서도 낙낙장송의 기개를 노래했다.
뿐인가. 고산(孤山)선생은, 소나무가 좋아 오우가(五友歌)를 지어 읊고, 완당(阮堂)선생은 귀양지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자신의 청정한 지조를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런가 하면 , 남종화의 대가 남농(南農)선생은 일평생 소나무 하나를 화두 삼아 붓을 잡고 살았으니 실로 소나무의 애찬가요, 대애호가였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아하는데는 멋도 멋이지만 빼어난 기품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자신을 성찰하듯 바늘 같은 잎으로 거북등 같은 인고의 삶을 견디고 사니, 어찌 경외롭다 하지 않을 것인가.보기에는 거칠지만 그 의지의 몸짓에서는 늘 청정함이 베어 있어 쉬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게 소나무다.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아하는 건 즐겨 사용한 아호(雅號)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송현(松玄), 송암(松岩),송재(松齋) 현송(玄松),석송(石松)일송(一松)등이 그러한데, 실로 그 수효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인 것이다. 이렇게 소나무의 이미지를 따르려 함은 노송아래 신선처럼 살고 싶어서일까. 가끔은,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 된 데에는 온 국토에 이 소나무의 기상으로 채워진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 해보는 때가 있다. 그 만큼 소나무에 빙 둘러쌓인 나라요,상시 그 향취가 짙게 번져나고 있기 때문이다. 종종 애국가 가사를 따라 '철갑을 두르듯' 하고 뇌어보면 웬지 힘이 솟고, 또 다른 노랫말 '일송정 푸른 솔은'하고 따라 부르면 선열들의 훤훤한 기상이 어리어 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그걸 보면 소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고 우리의 정신이고 의지같이 느껴진다.
나는 십 수년 전, 소나무 분재를 구해 길러본 적이 있다. 그런데 기르기 까다롭기가 이를 데가 없는데, 한 번 살려놓으니 그렇게 생명력이 강할 수가 또 없었다. 거의 방치하다 싶이 해 놓았는 데도 죽지를 않았다. 그때 느낀 건데 소나무는 사람이 보살펴야 자라 주는 게 아니고 자신이 알아서 스스로 커주는 나무 같았다. 그만큼 성정이 딱 부러졌다. 그걸 보아도 기품 있는 나무가 분명하였다. 한데, 이런 소나무가 경제성이 낮다하여 한때 배척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모르고 한 짓이다. 쓰임새가 얼마나 많고 이 소나무 아니면 아니 되는 목재인가 말이다. 큰 건물의 대들보는 이 소나무가 아니면 견뎌내질 못하고,1200도의 높은 화력이 요구되는 가마불은 소나무 장작이 아니면 감당을 못한다.
옛날 나의 고향마을 뒷산에는 어른 같은 자애고운 노송이 한 그루 있었다. 이 소나무는 읍내로 향하는 풍치재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쉼터의 구실을 톡톡히 해 주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3백년이 넘어 몸통이 장정의 팔로 두 아름이 됐는데, 그 몸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땅에 닿을 듯이 늘어져 여간 운치가 있지 않았다. 그 나무 그늘에서는 통학생도 쉬고, 장꾼들도 쉬고, 산으로 나무를 하려 떠나는 일꾼들도 쉬었다. 누가 일부러 심어놓은 나무는 아니다. 그런데도 무사했던 건 몸통이 심하게 뒤틀려 자란 탓에 쓸모가 없어 거들떠보지 않는 탓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소용이 없어 생존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나무는 그동안 보호되기보다는 괴롭힘을 당해 왔다는 생각이다.
일꾼들이 숫돌에 낫을 갈아 몸통에 꽂아놓는 바람에 그 상처 난 곳에서는 노상 송진이 흘러 내렸는데, 그런 나무를 아이들은 또 무등을 타며 귀찮게 휘청대며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무는 아무런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 흘러내린 송진으로 짐승들의 아픈 상처도 곧잘 치료해 주었다. 그 흔적이 나무에는 늘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이 소나무의 신세를 많이 졌다. 고개 너머 읍내 학교를 다닐 때에 갈증이 나거나 다리가 아프면 쉬어가게 하고, 방학을 맞아 소를 먹일 때면 친구들과 이 나무 밑에서 놀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놀면서 먹이던 소를 산으로 내몰아 놓고서 오수를 청하면 소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불어오는 바람이 콧등을 스치는 게 그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었다.'샤와-샤와-'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마치 파도소리 같아 스스르 잠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잊지 못하는 건 늦은 하교 길에 만나게 되는 소나무의 정취였다. 이 나무를 보아야만 거의 집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마치 가지를 벌리어 늘어뜨린 모습이 어서 오라는 듯 반겨주었다. 그런 가운데, 어쩌다 보게되는 달이 그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기라도 할라치면 별스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고요하게 떠 있는 달이 마치 방패연 같아 보이기도하고, 밀려가는 구름과 함께 달이 있을 때는 마치 밤봇짐을 싸들고 줄행랑 치는 도망자의 뒷모습 같기도 하여 착잡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당시는 먹을게 귀했던 시절이라 살길을 찾아 이 나무 곁을 지나쳐서 읍내로 떠난 사람들도 많았으니 소나무는 개개인의 아픈 내력도 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고단한 삶을 지켜보던 그 소나무가 없다. 태풍에 넘어졌다고도 하고, 누군가가 몰래 베어갔다고도 하는데, 어찌됐거나 베어진 걸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듯 허전하고 허허롭기 짝이 없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 고향에 가보면 아는 노인들이 자꾸 세상을 떠서 몇 분 아니 계시는데 노송마저도 사라지고 없으니 힘이 없다. 눈감으면 상상으로야 영상이 맺혀오지만 어디 실물을 보는 것만 하는가. 그러니 더욱 아쉬움이 클까. 고향을 들리면 나도 몰래 자꾸 눈길이 그 소나무가 서있던 곳으로 가게 되는데 그것을 단지 향수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누대를 걸쳐 조상의 삶들을 지켜 보아온 소나무. 어찌 전하고자 하는 말 한마디가 없으랴.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근자에 고향을 찾으면 그 소나무가 서있던 자리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건너다보고, 어디서 비슷해 뵈는 노송을 만나면 그 나무가 고향소나무를 닮지나 않았나 눈 여겨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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