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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신미자 |
날짜 : 03-11-25 22:35
조회 : 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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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산의 소나무
신미자
저녁 모임에 나갔다가 늦은 시각에 귀가한 나에게 갑작스런 이 여행이,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따라 나섰다. 자꾸만 감겨오는 눈을 비비며 차창 밖으로 다가오는 낯선 풍경을 놓칠세라 안간힘을 쓴다.
금강산이 개골산 풍악산 봉내산의 이름으로 4계절을 바라보는 것처럼 대관령의 4계절의 모습도 그에 버금가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봄이 되면 만산홍엽이요. 여름이면 온 산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산아래 마을까지도 초록으로 물들인다. 하늘도 온통 초록 빛깔이다. 가을의 단풍은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쌓인 듯 그냥 지나치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겨울은 겨울대로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풍광이다.
산마루턱에 버티고 서 있는 신사임당의 사친시비는 아들아이를 객지에 두고 떠나오는 어미의 서운한 마음을 헤아려 주었고, 때로는 손윗사람들에게서 꾸지람을 들어 마음이 언짢아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넉넉하게 고쳐먹곤 했었다. 요즈음은 아들아이가 휴학을 해서 대관령의 변해 가는 모습도 사친시비도 자주 볼 수 없었는데, 모처럼 만에 다시 보니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기 어렵다.
이정표를 따라 얼마쯤 달려왔을까. 하늘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별떨기가 머리 위로 금새라도 쏟아질 것 같고, 가로등 하나 서 있지 않은 외진 길가엔 달빛으로 가득하다. 달빛의 안내를 받으며 수년 전 공비가 출몰하여 양민을 학살했다던 마을 어귀를 지나치려는데 머리가 쭈뼛해진다. 달빛이 아니었다면 우린 초행길에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영혼들을 마음으로 위로하고, 목적지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해 보지만 억울하게 숨져간 망령들이 눈앞에 얼씬거려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매봉산의 아침은 신선한 공기와 함께 찾아들었다. 신선한 공기 탓인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머리가 무겁지 않아 일정표에 대로 매봉산을 오르는데 별무리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정상은 아니더라도 근처까지는 올라야 된다고 일행은 벌써부터 야단법석이다.
평소 산행을 즐겨하지 않는 나에게 산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다. 길이 잘 닦여진 한라산 1,100m를 오르는데도 혼쭐났었다. 귀가해서는 다리가 아파 퍽 여러 날 고생을 했었다. 그런 고생을 다시 하게 될까봐 걱정은 되면서도 마음은 벌써 노송으로 둘러싸인 매봉산에 가 있다.
길 양옆으로 병정처럼 늘어선 소나무들이 낯선 객을 반긴다. 만고풍상을 겪은 듯한 마른 나뭇가지 틈새로 수백 년의 나이를 먹었음직한 노송의 우람한 기세가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솔잎을 따서 입속에 넣어 본다. 오랜만에 씹어보는 적송의 상큼한 맛과 향이 입안에 가득해 진다.
"본디 송(松)이란 유덕(有德)한 심정으로 단인정사(端人正士)의 품격이요. 기개도 준초(峻 )하고 자태도 잠용 하니 이 속된 세속에 홀로 서 있으나, 그 나무 있는 곳은 물속 같은 유곡의 그윽함을 느끼게 한다"는 글귀를 떠올리며 노송을 올려다보니 참으로 그 기개가 위용스럽다.
물고기 비늘 같은 노송의 송린은 차라리 용의 비늘이라 하는 것이 옳더라는 비유의 글귀도 틀린 비유가 아님을 노송에서 직감한다. 저 노송은 아마도 붉은 비늘 갑옷을 입고 수수백년 한 자리에 서 있어 매봉산의 터주대감 노릇을 해온 터이리라.
나무의 밑동은 분명 둘인데 위로 오르면서 한 몸을 이루고 있어 마치 금실 좋은 내외 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하다. 이 땅의 아픈 역사까지도 모조리 끌어안고 있을 만큼 넉넉한 가슴이다.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다가 이 나무 곁에 잠이 들었나 보다. 이제는 화해와 평화의 일치를 이루게 하려는 듯 남과 북으로 팔을 뻗고 있다.
매봉산을 오르는 길은 험준하지 않고 산책로 같은 길이어서 산을 탈줄 모르는 나도 수월하게 산을 오른다. 산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명경지수가 얼음장 밑으로 흐른다. 아직은 봄이 먼 것 같은데 계곡은 봄을 만난 듯 물소리에 소란스럽다. 김삿갓이 설악을 오르면서 '청산으로 기어드는데 녹수야 너는 게서 나오느냐'라고 읊었다던 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한번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뿌리가 썩어도 자리를 옮길 수 없는 나무라 했던가. 길섶에 생명을 다한 밑동이 썩은 나무들이 시체처럼 즐비하다. 저쯤 되었으면 잔뿌리에서는 백봉령도 피어났으련만… 모진 세월을 버티다가 병들어 썩어간 나무의 생애가 사람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생명만큼이나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깊은 산 속으로 들어 갈수록 노송이 무성하게 서 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곧게 뻗은 나무는 그 위용이 대단해 마치 화랑의 후예들을 만나고 있는 듯하고 삭정이처럼 메마르고 구부정하여 볼품 없이 서 있는 나무에게선 사람의 늙은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연민이 앞선다.
나무가 크면 그늘도 크다고 했다. 나는 그늘이 큰 노송에게서 젊었을 적 남편의 모습을 만나고 있다. 노송의 그늘만큼이나 크게 드리워진 남편의 그늘 밑에서 편안하게 안주했던 지난 세월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지는 것은 삭정이 끝에 이는 바람에도 비켜서는 남편의 모습이 안쓰러워일까. 앞서가던 남편이 자꾸만 뒤쳐지며 나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제 내가 남편에게 그늘이 되어 줄 때가 온 것 같아 마음이 서글퍼진다. 산을 내려오는데 시원스런 바람 한줄기 지나간다. 노을이 우리를 배웅하는 몸짓인가 보다.
한국수필 1999년 3.4월호 (통권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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