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카드 한 장 /오 순

  30대 후반에 늦깎이 교사가 된 나는 학교생활이 즐겁고 보람차게 느껴졌다.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뛰노는 모습, 낙서가 가득한 칠판 앞에서 파안대소하는 모습, 전통 혼례 실습시간에 신랑, 신부로 분장한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합창대회 때 선생님들의 찬조 출연에 환호하는 함성은 강당이 들썩들썩하는 듯했다. 심지어 교생 실습생이 실습이 끝나서 갈 때 서운하다고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는 모습까지도 아름답게 가슴에 와 닿아 출렁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나 혼자 보고 흘러 넘기기 아까워 사진을 찍었다.

  대학 재학 중 사진 동우회 ‘숙미회’ 회원이었던 인연으로 그 일이 가능했다. 그때 친구들은 내가 카메라 가방이 너무 무거워 키가 못 컸다고 할 정도로 사진에 열성이었기 때문에 그 작업은 재미있고 즐거웠다.

  매일 매일의 일상 중 하루의 대부분을 학생들과 생활을 같이하면서 학생들의 밝고 맑은 표정, 교육현장의 여러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지난 5월 13일 ～ 26일까지 삼성 포토 갤러리에서 사진전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를 열었다.

  이는 생각보다 큰 매스컴의 관심과 성원으로 생방송 ‘아침’프로에 나가게 됐다. 남녀 사회자가 대담 중 내 사진전에 모델로 나온 제자 두 명을 수소문해서 나오게 했다. 중2때 담임을 맡았던 경하와 미숙이다. 그때도 키가 큰 편이지만 지금도 170cm가 넘는 미스코리아 분위기가 나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얼른 못 알아볼 정도로 세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내가 14년 전에 준 사진 카드를 가지고 나왔다. 미숙이는 학예회 때 주인공으로, 친구와 포옹하고 있는 장면과 소풍가서 멋지게 춤추고 있는 사진이고, 경하는 명상의 시간에 입을 벌리고 졸고 있는 장면과 마른 매화잎 두 잎이 카드에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마른 매화 나뭇잎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면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마른 잎은 7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사진 카드 만드는 일에 이용하라고 만들어 주신 것이다. 가을이면 항상 바빠서 분주하게 사는 나를 위해서 은행 나뭇잎, 매화 나뭇잎을 따서 두꺼운 전화번호부책에 넣어 다듬잇돌로 눌러 말려 주셨다.

  학생들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어 사진 카드를 만들어 줄 때, 그 매화잎을 부쳐 주었다. 경하와 미숙이는 그 카드를 14년 동안 보관하고 있다가 그날 TV 스튜디오로 가지고 나왔으니 반갑고 대견했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어머니의 정성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나는 41년 전, 초등학교 6학년 대 담임 선생님이었던 최순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카드를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남이 보면 누렇게 빛바래 보잘것없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거리다.

  졸업 며칠 전에 최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셔서 학생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고서 카드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때까지 인쇄된 카드는 못 보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주신 그림이 점점으로 등사되고 그 위에 그림물감으로 색칠을 한 것이 최첨단 카드였다.

  내 카드에는 ‘몸이 약하니 건강에 유의하여 키다 훌쩍 크도록 해라’라고 두 줄 정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있었다. 그때 그 글귀는 나를 우쭐하게 했다. 뒤늦게 교사가 되었을 때, 나도 선생님의 흉내를 내 보았다. 선생님은 손수 그림물감으로 그리셨는데 나는 사진을 찍어 요리조리 가위질을 하고 편집을 해서 학생들에게 주었다. 나는 최 선생님에게서 한 장을 받고 내 반 아이들 60명 모두에게 10년을 했으니 600명에게 준 셈이다. 내가 받을 때의 기쁨과 따뜻한 마음을 그들도 느끼게 하고 싶어서다.

  나는 그때 최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멋지고 아름다운 줄 알았다. 우리가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학교를 퇴직했기 때문에 우리를 담임했던 3년이 교육 경력의 전부다.

  안성에서 약국과 포도농장을 경영하면서 옛 제자들이 찾아가면 포도농장에서 살아가는 세상얘기와 지혜를 늘 들려주신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교사 생활을 나는 우연히 안성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간간이 자취 생활을 하는 나를 불러 저녁을 대접하곤 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옛날의 정성으로 끝나는 줄 알았으나 어른이 되었어도 선생님의 따뜻한 보살핌이 계속되니 나는 실로 행복한 제자이다.

  이번 사진전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에서 바가지에 감광 유제를 발라서 거기에 인화를 한 ‘박 사진’을 선보였다. 박 위에 우리 학생들의 모습이 인화된 것이다. 물바가지, 됫박, 막걸리잔, 탈바가지 등으로 쓰이는 바가지처럼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나의 기원이 들어 있다. 이것 모두가 최 선생님의 제자 사랑 법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 나의 많은 제자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내가 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큰 절  / 오 순

 얼마 전 TV에서 ‘효(孝)에 대한 특집 방송이 있었다. 유한 공고생이 등교하면서 “저는 효자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또 수업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차려!”, “경례!”하면 “저는 효자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매우 인상적인 인사였다. 과연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학교답게 철저하게 인성교육을 시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부모님께 큰절하기를 10년째 실천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한 어떤 학생은 자기는 아버지가 안 계신데 어머니한테 큰절을 하면 어머니가 운적도 있다고 했다.

  외증조할아버지는 당신의 부모님 산소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찾아가서 절을 해서 무덤가에서 당신의 두발, 손, 무릎, 이마 자리가 생겼다고 한다. 그것이 이웃에 알려져서 ‘효자묘’라고 불리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또 손, 발, 무릎, 이마 자리를 맞추어 보기도 했다. 특히 이마 자리를 신기해했었다.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도 10년 전까지 보존되었었다. 

  그 할아버지께서는 40년 동안 산소를 다니셨다. 겨울에는 해가 늦게 떠서 캄캄할 때 가셨다. 이 때 산소 뒤쪽에 호랑이가 있어 눈에 광채가 서리는 것이 보이고 절이 끝나서 마을로 내려올 대면 호랑이가 따라와서 당신이 동네 입구 개울을 건너는 것을 보고 되돌아가곤 했단다. 이렇게 호랑이가 할아버지를 보호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그 할아버지의 효성이 지극해서 자손이 잘되었다고 한다. 아들 셋 중에서 두 명이 판사이고 그분들의 자녀들이 한창 전성기에는 열한 명의 판검사가 나왔었다. 판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간의 우애가 유별나게 좋았다. 형제간 뿐 아니라 일가 친척 이웃에게 ‘효’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때에 외할아버지는 어떤 청년의 길에서 만날 때마다 흙탕물에 엎드려 큰절을 해서 그 청년을 사위로 삼았을 만큼 큰절을 중요시했다. 외할아버지의 판단은 적중해서 그 청년이 지금의 큰 이모부인데 매우 훌륭한 분이시다. 그 영향을 받은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에 집에 손님이 오면 큰절을 시키셨다.

  그래서 나도 어머니처럼 우리 집 애들에게 오랜만에 어른들을 뵈올 때는 큰절을 하도록 시켰다. 오랫동안 실행이 잘 되었는데 절을 받는 쪽에서 돈을 자꾸 주어서 폐가 되는 듯하여 그만 두게 했다. 지금 생각하니 계속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큰절을 할 때는 아이들의 태도는 분명 겸허하고 의젓해진다. 또 큰절은 어떤 에어로빅 운동보다 더 훌륭한 온몸 운동이라고 한다.

  대학 입학에 실패한 큰애가 3년, 군 제대 후 수능시험을 보고 재도전을 할 때 절에 가서 108배를 지극 정성으로 한 적이 있다. 108배를 하고 나니깐 운동을 갑자기 한 사람처럼 온몸이 아팠다. 불교에서는 108배를 하면 삼독심(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아만심이 사라진다고 한다. 온몸이 아파도 몸과 마음은 맑아지고 개운해진다. 거기다가 소원까지 이루어 큰애는 대학생이 되었으니 절의 덕을 단단히 본 셈이다. 그러니까 큰절의 생활화는 현대인의 좋아하는 건강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윤리와 양심이 무너지는 요즈음 우리의 전통적인 효 사상을 되살릴 수 있다면 윤리와 도덕이 제자리를 잡지 않을가? 우리의 이 전통 문화 중에 오늘을 이만큼 버티게 한 것은 효 사상이 그 뿌리라고 생각한다.

  농산물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정신적 신토불이는 효 사상을 되살리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 2-3반 뒤 출입문에는 ‘효’ 자 포스터가 붙어 있다. 흰 바탕에 ‘효’자를 가운데 크게 쓰고 뒷배경에는 ‘효’를 권하는 ‘시’가 여기저기 많이 쓰여 있다. ‘효’자가 풍기는 정서와는 좀 다르게 현대 조형 감각에 맞는 세련된 포스터이다. 담임선생님이 젊은데 ‘효’에 관심을 가지고 교실 출입문에 붙인 것을 보고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자식 사랑은 본능이라서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되는데, 부모 섬김은 이성(理性)이라서 오랜 세월 동안의 계획된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유한공고생이 “저는 효자입니다.”라는 인사법도 ‘효’ 실천을 위한 좋은 훈련이 된다고 하겠다.

  방위 복무 중인 작은 녀석이 어느 날 대대장이 어머니의 이불을 펴 드리라고 했다면서 내 이불을 깔아 주었다. 대대장이 확인 전화 오면 ‘이불 잘 깔아준다’라고 대답하라고 신신당부였다. 그래서 네 이불도 개고 다니라고 했더니 대대장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며 그냥 외출을 해버렸다. 이불을 깔아주라는 훈련법도 훌륭하지만 부모님께 ‘큰절’ 하라는 명령은 어떠할까? 효과가 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의 ‘효’ 실천일 것이다.
효자 집안에서 효자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를 잘 섬기면 바로 그게 내가 받을 섬김이라는 너무 평범하고 쉬운 순리를 잊고 지내기가 일쑤다.
난 부모님 생전에 잘못한 것이 많으면서도 군인인 다 큰아들들에게 효자이기를 바래 의도적으로 “내 효자 아들아”, “효자야”, “효자 아들” 이렇게 늘 크게 부르고 있다. 메시지 전달용 작은 칠판에는 “나의 효자 아들 원설에게: 냉장고에 딸기가 있으니 꺼내 먹어라!”라고 써 붙였다. 염치없게도 자식들이 효자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어느 해는 가정 방문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어떤 학생 집을 방문했을 대 그 학부형이 담임선생인 나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맞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성적도 우수하고 예의 바르고 예뻤다. 그 어머니의 그 딸이라더니 그 딸은 실로 여러 면에서 모범생이었다.

  며칠 전에 치른 이모의 장례식에서 꽃상여를 멘 상여꾼들이 “북망산천 멀다 해도 건너 산이 북망산천이로다. 어화 넝차 어화…….”를 구슬프게 부르며 가고 있었다. 이모의 북망산천인 가족묘로 향하고 있다. 4각 묘대를 한 시숙, 시동생들의 6개 묘가 나란히 있는 곳에 4번째 묘로 가는 것이다. 꽃상여는 북망산천으로 가는 것이 싫은 듯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그러면 상복을 입은 아들, 딸, 며느리들이 돗자리를 깔고 흰 봉투를 놓고 넙죽 엎드려 큰절을 차례로 하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상여가 자식들의 지극한 효심이 닿았는지 움직인다.

  요즈음 신세대 젊은이들은 제사와 차례 때 음식은 자기들 좋아하는 음식 ‘피자’ 등을 장만하고 제사상에는 ‘북어포, 사과, 밤’ 이렇게 써놓고 지낸다는 말이 있다. 제사를 지내고 웃어른을 섬기는 마지막 세대. 마음의 준비 없이 자식들에게 배신당하는 처음 세대인 50대를 ‘마처족’이라고 한다는데 알고 보면 ‘마처족’을 만든 것도 결국은 ‘마처족’ 자신들이다. 자식들을 과보호로 키우고 ‘간편함’만을 찾느라 ‘효’사상 실천훈련을 게을리 한 자업자득이 아닌가?

  유한공고에서 실시한 ‘큰절하기’만이라도 가르쳤다면 ‘마처족’이라는 말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효란 감사한 마음이 진정으로 우러나올 때 비로소 싹트는 것이다.

오순 <빛바랜 카드 한 장>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은 수필이다. 작자는 예전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카드 한 장을 받은 일이 있다. 그리고 그 후 선생이 된 작자는 10년 동안에 모두 600명되는 제자에게 카드를 주었다. 카드마다 물론 기억에 남을 말도 적었다. 한 장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600배로 갚았으니 참으로 많이도 갚은 것이다.

 그 제자들은 10 수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되던 날까지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데 아마 죽는 날까지도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수필은  일상적인 평범한 소재에다 심오한 주제를 담는 양식이다. 그런데 이 수필의 경우에는 그 소재 자체가 훌륭한 주제를 담고 있으니 좋은 표현력만 따라주면 그것으로 끝내도 되는 작품이겠다.

<큰 절>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고 어른들에 대해서 큰절을 잘 하라고 강조한 작품이다. 점점 변해가고 사라져 가는 전통적 윤리관에 대한 교훈적인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도를 살리려면 왜 그래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좀 더 분명히 전달되어야 한다. 작자의 주장이 옳은 것은 사실이지만 옳은 것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으니까 이유가 따라야 한다.

다만 이유를 말하지 않더라도 그런 사상을 실천하는 많은 예를 들어 나간 것은 좋은 점이다.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에서는 그것이 엄연히 현실로 존재하는 사실의 증거제시가 되기 때문에 다른 장르의 경우와 달리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