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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원명화 |
날짜 : 13-03-28 19:40
조회 : 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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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작가회의> 27회 심포지엄
수필 창작방법의 고정성과 단조로움 극복을 위해
―수필 창작의 변증법―
신 재 기(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
1. 서 언
2000년대에 들어와 수필은 대중적인 문학 장르로 자리 잡았다. 앨빈 케넌이 선언한 ‘문학의 죽음’이 곳곳에서 감지되는 현재의 사회 문화적인 여건에도, 수필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승 곡선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수필만을 두고 보면 케넌의 ‘문학의 죽음’이란 진단은 오류임이 틀림없다. 오늘날의 디지털문화 혹은 영상언어 매체는 문학의 전반적인 위축을 가져왔으나, 수필은 오히려 물 만난 고기처럼 넘치는 활력을 발휘한다는 말이다. 1980년대 본격적인 산업화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국민 개인의 소득 수준도 향상되었다. 이로 인한 문화 향유 욕구도 한층 높아졌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인 발전은 개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겼고, 삶의 질적인 측면에 눈 돌리게 했다. 오늘날 수필의 확대는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지금의 사회 문화적인 환경은 수필이란 문학 장르가 활성화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서식지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모두 잘 되어가는 것은 아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도 적잖다. 그 중심에 놓인 문제가 아마도 창작방법의 고정성과 단조로움이 아닐까 싶다. 이는 외적 환경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내부적 토대가 마련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즉, 내부적으로 창작방법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오늘날, 수필문학의 중심 과제는 창작방법의 고정성과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일이다.
문학의 창작방법은 작품을 창조하는 기술적인 기교가 아니라, 문학의 원리와 이념에 대한 인식 태도다. 더 넓게는 작가의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을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의 실제 기술적인 방법보다는 수필문학을 인식하는 관점이 창작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세계관은 크게 대립하는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세상을 고정불변하는 틀로 보는 것이 그 하나고,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다른 하나다. 전자를 형이상학적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변증법적 세계관이다. 변증법적 세계관은 내부적 모순이 세계의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파악한다. “변증법적 세계관은 사물과 현상을 전반적인 상호 연관 속에서, 그리고 변화 발전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세계관입니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사물과 현상을 일반적으로 서로 고립된 것으로, 그리고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세계관입니다.” (임승수,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시대의창, 2010)
한 편의 수필이 창작되는 과정에는 수필가의 수필관이 은연중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물론 작품을 만드는 직접적인 요소는 대상으로서 화제의 외형과 성격, 그 화제를 해석하는 주체로서 수필가의 의식과 세계관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수필가의 수필관이다. 수필 창작에 대한 자의식으로서 창작방법이 그것이다. 한 작가의 뚜렷한 수필관은 작품 창작의 출발점이고 방향이다. 작품 전체가 하나의 통일성과 고유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분명한 수필관, 즉 창작방법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수필가는 자기 나름의 분명한 창작방법을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분명하고 뚜렷한’ 방법이 고정불변이거나 다른 사람과의 차별성을 보이지 못한다면 좋은 작품을 낳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수필’이란 문학 장르를 어떤 고정불변의 틀을 가진 형식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수필 자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하고 모순되는 내부적 성격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정된 특성으로 규정하려는 태도가 문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변증법적 사고다. 즉, 수필이 어떤 틀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하고 상호 모순되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다성적인 복합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2. 수필 창작의 변증법
1) 형상과 교술
예술의 순수함은 ‘현상학적 판단 유보’에서 출발한다. 예술적 표현이나 문학적 언술은 어떤 대상에 대한 주체의 명확한 판단보다는 대상 자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발신자로서 작가가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체의 주관적인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서 대상은 객관적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고, 그것의 의미는 밖으로 드러나기보다는 함축적으로 암시된다. 과학이나 철학의 언술이 정확한 정보전달을 위해 소음을 최소화하는 데 반해 문학적 언술은 다양한 소리의 공존을 지향한다. 문학 텍스트에서는 명백한 의미는 숨겨지고, 주체에 의해 재단되지 않은 싱싱한 기호의 육체가 서로 두런거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의미는 오직 수신자의 해석에 의해 확정된다. 이런 점에서 모든 예술과 문학 텍스트는 해석 대상이다. 시공간을 막론하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내포하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예술과 문학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이 같은 순수함을 드러내는 일반적인 전략이 바로 ‘형상화’의 방법이다. 형상화는 예술과 문학의 순수하고 본질적인 특성을 확립해 주는 기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예술적 형상화의 방법은 미적 표현 대상의 구체화이다. 현실에 실재하는 구체적인 실물과 사건 등과 같이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으로 재현하는 방법을 형상화라고 말한다. 즉, 형상화는 어떤 것을 구체적인 사물로 ‘재현’하는 것이다. 형상화에 의한 결과로서 형상은 “물질적 형태 혹은 대상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실재’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소유물이다.” 그런데 조각이나 회화와 같은 조형예술에서는 예술가가 만들어낸 형상을 물질적인 형태로 확인할 수 있으나, 음악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문학은 어떤가? 문학적 형상화도 완전하게 물질적 형태로서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상상에 의해 추상적인 것에 관여하는 비물질적 형태도 문학적 형상화에서 피할 수 없다. 가령 서정시에 나타나는 시인의 개성적인 정감은 물질적인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문학적 형상화는 반드시 물질적인 형태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에서 형상화는 작가가 작품 속에서 개성적인 것으로, 즉 타자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새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학적 형상화를 현실과 대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방식으로 넓게 받아들일 수 있으나, 좁은 의미에서 그 방법은 대상을 물질적인 것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시각적인 형태로 드러내 보인다는 측면에서 형상을 말한다면, 문학의 형상화는 회화와 음악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추상적인 개념을 배제하고 감각적인 구체화라는 측면에서 형상화를 이야기하면 문학은 반예술적이다. 언어예술로서 문학은 완전하게 구체적인 감각으로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적 언술은 많은 부분 개념이나 사상을 구체화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직설한다. 그리고 장르별로 문학적 형상화의 특징이나 농도도 차이를 보인다. 시가 구체적인 심상을, 소설이 사건과 인물을, 수필이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문학적 형상화를 달성한다. 그런데 언술의 성격상 수필의 문학적 형상화는 다른 문학 장르와 차이를 크게 드러낸다. 그것이 바로 수필이 지니는 교술적인 측면이다.
수필을 교술문학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런 분류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깊이 이루어져야겠지만, 수필이 교술의 특징을 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교술(敎述)’은 어떤 개념인가. 학계에서 통용되는 관점에 따르면, ‘교(敎)’는 정보를 알리거나 주장한다는 의미이고, ‘술(述)’은 사실이나 경험을 서술한다는 뜻이다. 실제 존재하는 사실에 충실하고, 될 수 있으면 그 사실을 다른 층위로 전환하지 않고 서술하는 방식이 바로 교술이다. 실제 사실을 서술한다는 점은 기록성에 바탕을 둔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학 창작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사실이나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 행위이다. 수필을 교술로만 규정한다면, 수필은 비문학이 되고 만다. 수필도 문학이다. 따라서 교술이란 개념으로는 수필 전체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수필이 교술적인 성격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수필이 가지는 이러한 교술적인 속성은 문학적 형상화를 약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수필 창작이 완전한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어내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다 보니 수필은 더러 소설의 서사나 묘사를 빌리기도 하고, 시의 함축적인 문장 표현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수필은 소설이나 시가 될 수 없다. 수필은 태생적으로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반문학적이다. 이것이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핵심 요소다. 형상화를 문학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제하고, 모든 수필을 ‘수필은 문학이다’라는 명제의 카테고리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논리는 그저 논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수필 안에는 형상화를 거부하는 힘이 언제나 작동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수필 쓰기는 화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의미 부여는 해석을 말한다. 그런데 이 해석 작업은 어떤 언술 형태로 작품에 나타나는가? 화제와 의미 사이 경계가 표시 나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재료가 어떤 특정한 의미를 향해 구성되었을 때, 재료와 의미는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이는 문학적, 혹은 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다. 수필도 문학이 되려면 기본이 형상화다. 형상화를 통해서 의미가 간접적으로 암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문학 장르와 비교하여 수필에서는 이 같은 형상화가 유연하게 이루어진다. 교술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는 말이다. 사실을 직접 설명하거나 의미를 직설할 수 있다. 구체적인 형상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만을 수필로 간주하는 것은 수필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이다. 형상화라는 문학의 기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 형상적인 측면도 포함하는 것이 수필의 고유 영역이다. 이것은 수필의 융통성이고 가능성이다. 어쨌든 수필도 교술의 비율을 줄이고, 주제의 구체적인 형상화를 제대로 이루어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작가의 교술과 구체적인 형상화 사이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수필도 하나의 문학이라고 전제한다면 문학적 형상화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수필을 문학의 3대 장르에 하나 더해 ‘교술 장르’라고 분류하는 것은 허구적인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세계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설명’한다는 점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수필은 사실과 허구, 기록과 문학 사이에 놓이는 셈이다. 그러니 주제를 형상화하여 암시하는 경우와 메시지를 날것으로 진술하는 경우의 두 극점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모호성과 선명성,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 어느 쪽을 지향할 것인가가 문제다.
2) 내용과 형식 : 주제와 구성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무형식’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내는 글쓰기가 수필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는 작용할는지 모르지만, 수필 문단에 발붙이고 있는 사람이면 대부분 공개적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형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각인되었다는 증거다. 이는 수필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줄기차게 이를 비판, 교정해왔기 때문이다.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무형식의 글이 아니라는 주장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논리대로라면 생각과 정서를 물 흐르듯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을 축조하듯이 잘 짜인 설계도에 따라 작품을 창작한다는 의미다. 무형식이 아니라는 것은 말 그대로 수필에도 형식이 있고, 그 형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창작 과정에서 형식에 대한 고려 없이는 좋은 작품을 얻기 어렵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수필의 중핵은 ‘주제’나 ‘사상’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수필의 ‘구성’이나 ‘형식’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태도다. 이는 문학의 심미성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어떻게 말하는가’에 달렸다는 생각과 맥락을 같이한다.
미국 신비평가인 클리엔스 브룩스(Cleanth Brooks)의 저서 잘 빚은 항아리(The Well Wrought Urn)를 기억한다. 널리 알려진 영시를 텍스트 자체에 밀착해 치밀하게 분석한 실제비평서다. 브룩스는 “시가 어떤 진리를 제공하는가, 그리고 시가 어떤 명제를 예시하는가에 관한 진술들을, 시 자체의 본질적 핵심으로 여기”는 것을 부정한다. 예술이나 시에서 내용과 형식, 혹은 내용과 매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대상을 직관하고 나서 그것을 매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로 표현하는 가운데서 그 대상에 대한 직관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작품은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언어 매체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발생론적 환원주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다. 이러한 생각은 문학작품 창작 과정에서 표현 언어, 구성, 형식의 역동적인 역할에 대한 재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이 작품의 총제적인 의미를 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뉴크리티시즘의 관점은 지금까지 드러낸 장단이나 허실과는 관계없이, 오늘의 우리 수필 창작에 본보기가 될 방법을 암시해 준다. ‘잘 빚은 항아리’라는 말이 비유하는 바가 그것이다. ‘빚다’는 말은 재료를 활용하여 무엇을 만든다는 말이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것과는 정반대다.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은 다양한 인생 체험과 심오한 사상이 출구만 열리면 제약 없이 쏟아져 나와 작품이 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작가는 언어를 동원하여 그것을 담아내면 그만이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표현하고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고정된 기이한 체험이나 특정한 사상이다. 이는 창조적인 예술 행위로 보기 어렵다. 체험을 기록하거나 이야깃거리를 정리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오늘날 문단에서 활동하는 수필가 대부분은 창작 기초 공부를 거쳤기 때문에 이 정도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저절로 써질 수 없다는 것을, 공들여 잘 만들고 다듬어야 좋은 작품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닐진대, 수필 전문지에서 만나는 많은 작품이 어찌 ‘붓 가는 대로’ 방치되었을까?
게오르그 루카치는 <에세이의 본질과 형식>에서 “형식은 하나의 세계관이고 하나의 입장이다. 또 형식은 그것이 생겨나는 바의 삶에 대해 갖는 일종의 태도 표명이다.”라고 했다. 전후 문맥이 생략된 인용이라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지만,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 형식은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생각, 형식과 내용은 분리되어 있다는 견해에 제동을 걸어온다. 형식은 이미 고정된 틀로 내용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오해임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루카치는 형식이 세계관에 닿아 있다고 본다. 세계관이 형식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이는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최적의 형식이 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형식은 모든 감정과 체험이 압축되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삶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그 작가만의 고유한 방식이라고 하겠다.
문학 작품의 구성은 단순히 형식적인 틀이라기보다는 인식의 내용이고 방법이라 하겠다. 형식이 자유롭다는 수필의 기본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는 것과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구성 문제에 밀착되어 있다는 두 가지 측면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지양의 문제임을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다.
3) 일상의 구체성과 삶의 보편성
좋은 수필은 당연히 깊이와 넓이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작품일 것이다. 이는 양자의 적절한 비율이나 관계보다는 넓이와 깊이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한 것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내었느냐의 문제다. 넓이를 가진 글은 넓이를 가진 채로, 깊이를 가진 글은 깊이를 가진 채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넓이와 깊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가능하다. 우선 넓이는 수필가 내면과 외면의 적절한 조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수필은 작가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많다.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고백적인 것이 수필의 일반적인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글감이나 수필가의 관심이 개인의 신변과 일상의 테두리에 갇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는 넓이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관심으로 확대가 필요하다. 깊이는 제재를 해석하는 통찰력이다. 작은 것 혹은 변두리의 것도 전체를 아우르는 법칙과 구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드러나는 겉면에만 집중하는 성긴 관찰력으로는 사건과 대상 너머의 의미를 찾아낼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제 나름의 의미를 깊이 간직하고 있다. 얼마나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그 잠재하는 의미를 찾아내느냐가 문제다.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개별성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보편적인 의미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깊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넓이와 깊이를 함께 갖추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적절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좋은 작품 쓰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수필은 인생살이의 구체적인 경험을 담아낸다. 수필이 담아내는 이러한 인생살이라는 것이 종종 소소한 일상이나 신변잡기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때가 잦다. 물론 이 소소한 일상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차원에 머물고서는 문학으로서 감동을 주기 어렵다. 독자와의 공감대를 얻으려면 그것이 인간 삶의 보편적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운명만큼 삶의 가장 보편적인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통된 운명, 즉 늙어 병들고 죽는다는 것은 부인하거나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생살이에서 죽는다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것인 만큼 가장 보편적이고 순수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수필은 인간의 죽음과 운명을 순수한 보편적인 사건으로만 전제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이렇게 하는 것은 수필 쓰기가 아니라 철학하기에 속한다. 수필을 포함하는 문학이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를 사유함으로써 철학적인 면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문학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형상화를 통해서 그곳에 도달한다. 따라서 문학이 다루는 운명과 죽음은 보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인칭적인 사건이다. 수필가는 작품에서 자기의 운명이나 죽음과 관련된 구체적인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출발하는 운명과 죽음에 대한 사유 과정에서 얼마만큼 깊이를 얻느냐가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 깊이가 주는 무게가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의미로 상승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운명과 죽음의 문제로 귀결되는 인생살이에 관해 보편적인 의미와 개인의 구체적인 사건 사이의 균형과 긴장이야말로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중핵일 것이다.
수필은 일상을 먹고 사는 일상의 자식이다. 일상을 글감으로 취하여 해석하는 것이 수필이다. 그런데 수필은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기회가 되면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한다. 즉, 일상에 귀착하려는 구심력과 그곳에서부터 탈주하려는 원심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시·공간이 수필의 장이다. 수필가가 취하는 다양한 글감과 상상력의 출발지는 일상이지만, 수필은 일상의 다양한 글감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고 해석한다. 해석하는 과정은 일상을 충실하게 추종하기보다는 그 속으로 파고들어 가 숨은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 여기에는 일상의 질서에 대한 부정과 해체가 따르기 마련이다. 미숙한 작품일수록 일상을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담아내는 데 힘을 소비한다. 수필은 일상이 해체되고 재해석되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고, 문학적 가치도 확보한다. 일상의 해석 능력은 좋은 수필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수필가의 주관적 정서가 보편적인 의미로 상승하지 못하고 날것으로 작품에 넘쳐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서정성을 수필의 핵심 요소로 착각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수필의 화법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작품 속 화자는 실재하는 수필가이고, ‘나’라는 일인칭 화자가 자신에 관해 말하기 때문에 ‘나’의 주관적인 개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필이 공감을 불러오고 감동을 주려면 이야기의 정점이 ‘나’의 내면에 있어서는 안 된다. 내면에서 출발한 이야기와 정서가 밖으로 구체화될 때 타자와의 공유점을 확보할 수 있다. 서정성을 수필의 핵심에 두게 되면, 생각과 느낌이 ‘나’의 주위에 머물고 밖으로 확산할 힘을 상실하고 만다. 이것이 우리 수필 문학의 오래된 과제다.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정수필만 수필로 인정받고 있다는 데 있는 것” (황필호, 「우리 수필 평론」, 집문당, 1997) 이라는 지적이 아직도 유효하다.
수필의 서정성 지향은 일인칭 서술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일인칭 서술에서는 화자가 표면에 존재한다.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자신의 내면을 향하면 구체적인 상관물이 부재하여 정서가 관념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고, 밖으로 향하더러도 화자가 보는 것만 이야기해야 하므로 그 시야가 협소해진다. 평평한 벌판 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격이다. ‘나’ 가까이에 있는 것만 볼 수 있다.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지평선 너머는 캄캄한 암흑이다. 높이가 같은 평면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기도 어렵다. 많은 수필이 작가의 신변이나 일상에 갇혀, 독자와의 공유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필의 진원지는 개인의 잔잔한 일상일 뿐만 아니라, 그 발성도 내면성을 지닌다. 수필을 자기 고백적인 문학이라고 규정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잔잔한 일상과 내면의 목소리가 개인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학 작품이 될 수 없다. 개인의 단편적인 일상이 외부 사물이나 타인의 삶과 만나 다채로운 무늬로 퍼져갈 때, 그것은 개별성에서 전체로 나아갈 수 있다. 즉 구체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구체적 보편성의 원리는 모든 예술의 기본 속성이지만, 특히 수필 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말해 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문제는 개인의 일상과 내면성이 어떻게 외부와 관계를 맺고 확대되어 갈 수 있는가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수필의 언어가 해석적으로 사용될 필요가 있다. 체험을 기록하는 수준에서 탈피하여 해석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해석한다는 뜻은 작가의 시선이 현실과 대상의 현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상 너머에 숨은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학은 창조적인 행위이다. 언어를 통해 현실을 재배치하고 재발견하는 것이 문학 창작이다. 수필이 현실의 비전환적 표현이고 산문적 진술로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를 과학적 언어처럼 건조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지시 대상의 개념 전달을 뛰어넘어 대상과 지각의 시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산되는 빛을 포착한다.
4) 미메시스와 상상
수필쓰기는 역사와 문학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수필이 작가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불문율처럼 통용된다. 허구를 용납하지 않고, 있었던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수필은 역사와 동류항이다. 이때 수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실 기록’이다. 물론 그 기록이 역사와 같이 정확성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역사의 방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역사가 단지 사실을 있었던 것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에 의해 해석되고 구성된 것이라고 본다면, 사실에 충실하려는/충실해야 한다는 수필 쓰기의 방법과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다만, 수필은 주체의 주관적인 해석과 정서의 개입이 역사보다 더 두드러질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수필은 역사 옆에 위치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수필은 역사의 건너편으로 뛰어넘어 문학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역사 건너편에 있는 문학의 위치는 가능성의 세계다. 가능성의 세계는 실제가 아닌, 허구와 상상의 세계다. 수필이 문학이고자 할 때 ‘허구’와 ‘상상’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문학이 되려면 수필이 꼭 허구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실재의 ‘아날로곤’을 무화하여 어떻게 상상의 세계로 향하는가이다. 수필이 사실의 정확한 기록에 머물고서는 문학이고자 하는 욕망을 성취하기는 어렵다. 사실의 ‘아날로곤’을 어떻게 지워나가느냐는 수필가 개인이 선택하고 지향하는 방법의 문제일 것이다.
3. 결어 : 수필 장르의 새로운 패러다임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자기를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한 언어 테크놀로지, 즉 매체(media)는 크게 4단계로 전환되어 왔다. “음성언어 → 문자언어 → 활자언어 → 디지털 언어”가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도 앞 매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매체를 일거에 폐기하고 신매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첨단의 디지털 매체가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에도 가장 오래된 매체인 음성언어가 절실히 소용될 때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볼 때 신·구 매체는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공생의 원리를 바탕으로 각자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정립하면서 역동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구매체가 신매체의 등장으로 사라지지는 않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 신매체 탄생과 함께 구매체는 변화한 새로운 여건에 적응하고자 자신을 변형시키고 강화한다.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기존의 활자 매체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재매체이론이다. 언어를 활용하는 모든 행위도 이러한 언어매체의 원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활자언어가 주류였던 때의 문학과 디지털언어가 새로 등장한 현 단계의 문학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 질적 차이는 여러 측면에서 감지된다. 다만,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을 따름이다. 활자 매체가 첫 단계에서 필사본을 모방하려고 애썼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디지털 매체는 은연중에 활자 매체와의 차이가 줄 수 있는 충격을 줄이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변화를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완전한 변별력을 드러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디지털 매체의 부각으로 기존의 문학은 어떤 모습으로든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갱신해 갈 것이다.
문학으로서 수필도 마찬가지다. 활자 매체 단계에 정립되었던 수필의 원리와 가치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시대의 수필은 과거와는 다른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다른 모습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늘의 수필문학이 과거의 것에서 벗어났다고 비난하고, 활자 매체 환경의 수필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오늘의 수필은 과거와 다른 새 국면에 진입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해서 ‘문학 본연의 가치와 역할’까지 변질한 것은 아니다. 구매체가 일거에 사라지지 않듯이 오랫동안 전통으로 내려온 수필문학의 기본 문법은 변하지 않고 이어지겠지만, 그 가운데에서 한편으로 자신을 변혁시켜나갈 것이다. 어쨌든 사이버문화의 다양한 특징이 수필 쓰기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수필이 사이버문화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수필 창작이나 읽기가 가상공간에서 이뤄지는 때가 잦다. 그렇다고 해서 수필이 특별하게 달라진다고 볼 수 있는가? 오늘날 수필가 대부분은 컴퓨터 화면에서 작품을 창작한다. 이때 컴퓨터나 부수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활자를 조합하고 저장하고 배송하는 데 물리적 편의를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종이에 친필로 글을 써서 컴퓨터 자판에서 타자하여 이메일로 잡지사에 원고를 보내는 과정에서 편리한 도구로서 컴퓨터를 활용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의 등장 초기에는 그랬었다. 그런데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은 글쓰기의 전적인 공간으로 바뀌었다. 한 편의 글이 생산되자마자 컴퓨터 기기를 떠나는 경우, 얼마 동안 머무는 경우, 아예 그곳에서 끝까지 소비되는 경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갈수록 후자 쪽으로 무게가 실릴 것이다. 컴퓨터나 인터넷은 단지 도구의 차원이 아니다. 글의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환경으로서 디지털 공간은 글의 내용과 그것을 구성하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이 종이 위에 글쓰기와 컴퓨터 글쓰기를 인수분해하면 글(형식 혹은 메시지)은 불변의 인수로 남는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가 단순한 디지털기기에서 가상공간이라는 새로운 글쓰기 장으로 탄생한 이상, 우리가 쓰는 글은 형식이나 내용에서 사이버문화의 영향을 받아 변화된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기존의 활자 기술에 의해 굳어진 좋은 글쓰기, 이것에 대한 세심한 독서의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활자 텍스트의 유구한 전통에서 존중되었던 가치, 즉 활자로 고정된 데에서 오는 안정성, 유일무이한 창조물이라는 점에서의 기념비성, 위대한 작가의 창작물이라는 점에서의 작가의 권위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는 이제 보장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디지털 환경에 의해 글 쓰는 표면, 독자가 글을 읽는 리듬, 글쓰기 형식 등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를 목격한다. “디지털 글쓰기의 개념적 공간은 저자와 독자의 사이 유동성과 상호작용적 관계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이 같은 상이한 개념적 공간들은 글쓰기의 상이한 스타일과 장르들, 문학의 상이한 이론들을 형성한다.” 지금으로서는 “디지털 언어는 전대미문의 새로움과 전통성 모두를 유지한다.”(김성도의 디지털 언어와 인문학의 변형,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는 판단이 적절할 것 같다.
신재기(申載基)
경북 의성 출생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문학박사
현재 문학평론가, 수필가, 경일대학교 교수
비평집 : 비평의 자의식, 여백과 겸손, 수필과 사이버리즘, 수필과 시의 언어」,
수필의 형식과 미학, 수필창작의 원리
수필집 :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계획한다, 분서를, 경산 신아리랑,
프라이버시의 종말」, 앉은 자리가 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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