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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08-09-21 22:24
조회 : 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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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의 수필세계
- 수필선집 『먼산이 가까워질 때』를 중심으로
1
수필은 대하기 편한 글이다. 읽고 있는 책 속에서 그런 편한 수필을 만나면 오랜 친구를 대하듯 마음이 흡족하다.
가슴속에 술렁술렁 바람이 일어 지나간 일이 그립고 서러워질 때, 한편의 글에서 다른 인생의 향기를 느껴보는 즐거움은 수필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필자가 순수한 수필 독자였을 때부터 여러 월간지를 통해 그렇게 읽어 온 글이 허세욱 선생의 수필이다. 휘문출판사에서 간행된 사상전집의 장자편을 읽고, 그 문장이 주는 자유롭고 풍성한 느낌으로 감탄했는데, 그것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선생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아채었다. 특히 [중국문학소사](허세욱저 을유문화사, 1981)의 머리말에서
수필은 넓이와 깊이를 함께 지녀야 하며, 감정을 위주로 하되 지성이 있어야 했고, 담백하고 전아(典雅)한 색체로되 칙칙하거나 어두워선 아니되며, 평범한 일상의 체험이로되 단순한 신변잡기여선 아니되며, 자아를 표현하되 시대와 사회를 떠나선 아니되었다.
라고 수필에 대한 쉽고 함축 있는 설명은 수필을 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 선생의 수필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말함이 무척 조심스럽다.
『먼산이 가까워질 때』는 수필 선집이다. 이 수필집에는 저자가 1961년부터 1993년까지 발표한 5권의 수필집에 실린 수필 중에서 직접 고른 70편의 수필과 한 편의 수필론이 실려 있다.
수필집 한 권을 엮는 수고를 생각해 본다면, 이 책에 실린 한 편 한편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흡사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상 앞에 앉은 포만감으로 뿌듯하다. 그러나 거친 음식에 익숙하여 조금은 주눅이 들어있는 필자는 앞으로 선생의 수필을 읽어 올 새로운 독자들을 위해서 그간 출간된 수필집 다섯 권을 다시 더듬어 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2
선생은 그의 <어록으로 쓴 수필론>에서 수필을 선비가 지닌 심덕과 정운에 비해서 말한다. 어떤 선비냐면 - 없는 듯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강개하게 바라보는 뜨거운 가슴을 지녔고 목눌한 듯 세상 살기에 모자라지만, 풍운화월의 변화를 관찰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파도처럼 일어나고 때로는 안개처럼 잔잔하다. - 이런 선비 같은 수필을 선생의 글에서 만나기를 독자는 기대한다.
수필의 특성이 ‘자기 고백적 문학’이고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문학’이며 ‘개성의 문학’이다. 수필은 그 글을 쓴 이의 적나라한 모습이 들어나기에 독자에게 흥미를 준다. 어떤 수필을 읽어 감동하여 글을 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 볼 때도 있다. 그러나 전혀 글과는 다른 행동과 말로 독자의 기대를 기만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수필은 글의 내용과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의 고백이다. 선생의 수필에서는 그 기대만큼의 선비적 인품을 발견할 수 있다. 자라온 환경의 점잖음과 인륜을 중시하는 학문을 지닌 결과이다.
- 철은 없었지만 햐얀 두루마기를 보면, 매달려 보고 싶은 어리광보다는 어딘지 옷깃을 여미고픈 일말의 엄숙을 느꼈고 그 엄숙함이 나에겐 든든하였다.
<하얀 두루마기 중에서>
- 작은 할아버지는 내가 체험한 이조(李朝)의 전부요, 내가 마지막 보았던 완고한 가통(家統)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너진 나라, 기우는 가문을 짚고 선 종조부의 지팡이를 잊지 못한다. 그 육척장신에 하얀 수염, 하얀 두루마기, 키를 재는 긴 지팡이에 기대어, 흐르는 시내를 굽어보고 먼하늘 흰구름을 응시하던 그 용태는 어느새 내 마음엔 비석으로 서 있다.
<지팡이 소리> 중에서
건강한 정신에서 나오는 글은 건강하다. 저자가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그래서 건강하다. 필요없는 것은 과감히 버린다. 번문욕절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시골의 곡사(曲士)가 아니라 정운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수필을 쓴 것이다.
쉬고 싶을 때 불편한 자세로 쪼그리고 앉거나 엉거주춤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전망이 좋은 곳을 찾아 아예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사방을 살피는 여유작작한 성품이 자라온 환경에서 형성이 된 것이다.
그래선지 수필의 문장은 힘차게 달려 나간다. 뚜렷한 목표를 향하여 싱싱하고 젊은 의식으로 일어서는 황톳빛 힘줄이다. 알리고자 하는 상황은 눈으로 직접 보듯 명쾌하고, 내면의 감동은 함께 콧물을 훌쩍이거나, 잔잔한 설렘으로 현기증을 일으킨다.
- 울음소리가 고막을 아프게 진동할 때마다 우리 부녀는 자꾸만 가까워졌다. 더구나 첫날부터 핏기도 가시지 않은 주먹을 붕어 같은 주둥이에 대고 울었을 때, 희멀쑥한 어깨를 뻐근히 눌러오는 게 있었고 내 기침 소리에 약간의 볼륨이 섞여 나온 것도 의식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착오> 중에서
- 그 지팡이는 겨우 가느다란 막대, 볼품없이 민둥민둥했지만, 그것이 백발노인에게 쥐어졌을 때엔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호적(號笛)이나 차디찬 서릿벌의 장검에 비유되고, 그 기침은 흩날리는 작은 목청이지만 한 마을의 장유(長幼)나 시비를 가리는 법령에 상당했다. 온 골목이 왁자지껄 싸움판을 벌였을 때 노인은 기침 몇 번이면 그걸 멎게 했고, 도깨비들이 잔치를 연다는 물방앗간을 지날 때에도 마른기침이면 악귀를 쫓아낸다고 했다.
<지팡이 소리> 중에서
한국현대수필의 이론을 최초로 정립한 윤오영님은 『수필문학입문』의 <서두(書頭)의 득실(得失)>편에서 ‘시작이 중요하다’고 수필의 서두를 설명함으로써 그 글의 종류를 결정지었다.
- 안개같이 시작해서 안개같이 사라지는 글이 가장 높은 글이요, 기발한 서두로 시작해서 거침없이 나가는 글은 재치 있는 글이요, 간명하게 쓰되 정서의 함축이 있으면 좋은 글이다. 『수필문학』(1996. 6. p100)
그 정의에 비하여 허세욱 선생의 수필을 결정해 보고 싶다. 먼저 광범위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재미있는 수필, 잘 쓰는 수필 등을 떠올려 본다. 좀더 점수를 준다면 위의 글대로 ‘간명하게 쓰되 정서의 함축이 있는 좋은 수필’에 해당된다.
선생이 쓴 수필의 서두는 구구하지 않다. 정신의 저변에 깔린 근본적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좋은 추억을 아름답게 기억해내고자 하는 정서와 정해진 제목의 글을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아챌 수 있다. 몇 편의 서두를 살펴보자.
<잃어버린 얼굴> 나는 병든 노모를 고국에 둔 채 태평양을 건너왔다. 옛날처럼 사립문 밖이나 시냇물 징검다리에 나오셔서 연신 눈물로 옷고름을 적시던 걸 볼 수 없었음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젠 현관까지 비척거릴 만한 기력조차 쇠진해진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남겨두고 나는 어느덧 600날을 여기서 살았다.
<들판에 서라> 깊어가는 가을, 들판에 서보라고 꼭 한번 권하고 싶다. 가서 꼭지가 떨어지도록 익어버린 들 과일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고, 면양 한 떼를 구름처럼 휘몰면서 꼴을 먹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제일 좋기로는 혼자서 거기 서라고 권하고 싶다. 짝이 있거나 떼를 지으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다. 그 소리는 혼자라야 들린다.
<산이 거꾸로 누울 때>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산 그림자가 동쪽 벌에 누울 때, 여느 때처럼 나는 어느 산마루 자그마한 바위에 걸터 앉았다. 산그림자는 시시각각으로 두껍게 깔리는데 오늘따라 짙은 신록 냄새가 내 폐를 빨래하는 느낌이다.
<해는 져서 어두워도> 하루 종일 집 안에 곰질거리다가도 황혼이면 나서고 싶다. 뒤란에 사립문을 살며시 밀고 어디론지 나서고 싶다. 아직도 어릴 적 내가 살던 두메라면 뒤란을 지나 멀리 뒷들이 보이는 반석에 앉거나 동구밖 늙은 느티나무 아래 그런 곳에 우두커니 서 있고 싶다. 그것은 땅거미가 내릴 무렵 누가 올 것만 같아서다. 연기처럼 안개처럼 시나브로 내리는 어둠을 밟고 누가 뚜벅뚜벅, 아니면 살랑살랑 무엇인가 흔들면서 나타날 것만 같아서다.
3.
수필 <성체와 풀잎사이>를 읽으면 저자의 마음속에서 무수히 꿈틀거리는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글 전체를 예문으로 들고 싶은데, 아쉽다.
김열규님의 허세욱론(선생의 세 번째 수필집 『달이 뜨면 꽃이 피고』수록)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해 놓았다.
- 작가의 내전하는 시선은 서정(抒情)과 명상(瞑想)의 해조(諧調)에서 더욱 개성적인 빛을 발하고 있다. 문체의 근원이란 필경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그 눈의 빛이 작가의 문체에서도 빛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서정과 명상의 조화란 아름다운 사색이고 무게 있는 아름다움, 꽃이 고개 숙여 사념에 잠기고 사념이 꽃망울 터뜨리는 그런 경지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이 밝고, 그것을 깊은 내면으로 받아 아름다움으로 표출 시킬 수 있는 경지는 연륜이 말한다. 그러나 먼 이국에서의 격한 감정을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해결한다. 마음의 흔들림을 감당할 수 없어 찾아낸 것이 가족이다. 독자의 편에서는 너무 싱겁다. 그런데 그것이 선생의 글을 값지게 하고, 문학을 살찌우는 원동력이다. 결국 인간의 내면에 녹아있는 고향으로의 귀소 본능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고향을 떠나 넓은 세상을 헤매는 이들의 당연한 마음인데 유독 저자의 향수만이 별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자라나면서 고향에서 체험한 것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저자의 내면에서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다.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마음은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모든 추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추억에 덧붙여 쌓여진다. 아직도 열일곱의 나이로 고향의 산마루에 앉아서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다. 마음껏 분출되지 못한 열정을 한아름 끌어 앉은 채 수필 속에서 망망하다.
- 아련하게 초연이 뭉게 오르고 능선마다 흐드러진 진달래, 솔방울 사이로 먼 들을 조망하노라면 노란 언덕에 푸릇한 새싹, 분명 봄은 땅구멍을 뚫고 오는데, -중략- 나의 눈동자는 먼먼 수자리를 지키는 망루(望樓), 그 망루는 환하다. 진달래 꽃보라 속에서, 그 망루는 망망하다. 먼 산에서 밀려오는 포성의 물결 속에서, 그 망루는 깜깜하다. 첩첩한 한자의 진흙더미에서.
<춘망> 중에서
떠남은 그리움에 대한 확인이다. 제 자리에 있으면 둔감해져 버릴 두려움으로 아직도 움직이는 고향을 그리워한다. 스스로 누구의 고향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했기에 그것에 관한 허탈감으로 쓸쓸해 한다. 그래서 저자의 수필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있고, 바람이 휘몰아치고,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듯 외롭다.
- 그런데 풀과 나무, 그것들과 함께 사는 인간이 끝내 순환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풀과 나무는 이 가을에 죽을지라도 이 겨울이 가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싹으로 돋아서 이 땅의 무거운 껍질을 뚫고 나온다. 타향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타향으로 뛰쳐나오듯 말이다.
<들판에 서라> 중에서
선생의 수필에는 소리 없이 밀려와 몽롱하게 퍼지는 황혼의 아름다움도 있다. 저자의 수필에는 황혼, 혹은 노을에 대한 유난히 이야기가 많다.
- 추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담담한 눈망울로 저 혼자 밀물처럼 다가오는 어스름 황혼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아주 몸에 맞는 옷을 한 겹 두 겹 올려 입는 느낌이다. -중략- 그래서 황혼이 내게는 하루의 끝마무리가 아니라 아직도 누구를 기다리는 설렘이다. 그것은 정녕 누구를 기다리고 마중했던 소년이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황혼이 좋았다. 하루해가 저무는 그 짤막한 토막 시간보다는 소리 없이 강물처럼 밀려와서 몽롱하게 퍼지는 그 반투명의 빛깔이 좋아서였다. 눈이 오는 벌판이나 안개 자욱한 거리, 달빛 몽롱한 호숫가나 가랑비 내리는 강가를 좋아하는 것도 황혼의 정경을 닮았기에 그렇다.
<해는 져서 어두워도> 중에서
4
선생의 수필에 높은 글이란 의미를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정서는 고요다. 문장이 거침없이 달려가다가도 문득 침묵한다. 글을 따라 읽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추어 서야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행간이 주는 여유를 만끽할 수 있어야 허세욱 수필의 묘미를 알아챌 수 있다. 그것은 한자를 상용하는 중국의 문화가 몸에 베인 결과다. 글자 하나에도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여유에서 오는 쉼이다.
- 40년이 지났는데도 그 날 밤, 우리 집 안마당에 요즘 젊은이들의 이른바 캠프파이어처럼 불을 밝혔던 밤, 사지가 떨리면서도 폭포 같은 불길을 타고 우리 집 4대를 내려온 고서들이 하얀 재가 되어 눈송이처럼 너울너울 하늘로 사라지면 아버지를 따라 그 깜깜한 하늘을 우두커니 응시하던, 더구나 아버지의 그 망연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분서(焚書)> 중에서
- 나는 섬사람이었다. 손님이 있어도 쉽사리 오지 못하는 섬, 갈 곳이 있어도 얼른 갈 수 없는 섬, 언어와 풍속이 단절된 섬, 소식과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섬이었다. 나는 다만 고물고물 일하는 필부, 조개도 캐고, 굴도 따고, 그러면서 혼자서 빙빙 돌아가는 방아처럼 살았다.
<섬사람> 중에서
그 고요의 또 다른 근거는 죽음이다. 가장 사랑하던 사람, 인생의 스승인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이 선생의 수필문학을 대하는 정서의 자락에 말려 있다. 아버지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반가의 기질이 또 다른 고요로 수필을 엄숙하게 한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어머니, 딸 등 가족을 소재로 한 수필에서 저자의 물기어린 정감을 만날 수 있다.
- 나의 한국수필은 1972년, 아버지를 저승으로 전송하고부터 였다.
<수필집 『인간의 흔적』책머리에> 중에서
필자가 선생의 수필을 즐겨 읽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수필 속에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만나, 저 가슴 깊은 곳에 고이 담아 두었던 피부치에 대한 무조건의 그리움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먼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는 듯 가슴이 시원해졌다. 그 시절의 생활방식이 다 그랬겠지만 공감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사물을 대하는 시선의 평행이 수필을 편하게 읽어 내릴 수 있다. 잊고 있었던 사건들이 어느 순간 선명히 그 모습을 드러낼 때의 공감이 선생의 수필을 읽는 즐거움이다.
- 사랑채의 군불을 넣는 부뚜막이 보였다. 군불을 지피는 머슴을 밀어젖히고 그 아궁이 앞에 바싹 다가앉아서 훨훨 타는 솔가지 불길에 두 손을 쬐면서 그 손등을 호호 불고 있는 나의 소년 적 모습이 보였다.
그 솔가지 군데군데에 붙어있던 송진이 타느라 피식피식 튕기는 파열음이 들리고 그 부뚜막이 바로 눈앞에 있는 느낌이었다. 등짝이 시렸다. 그리고 등짝 밖으로는 어둠이 깔렸는데 이윽고 함박눈이 등짝에 내리고 있었다.
<원점> 중에서
- 겨울 밤 이슥할 때, 어머님은 커다란 질화로에 인두를 묻고 바느질을 하셨었다. 가물가물한 호롱불에 어머님의 치렁치렁한 서편제 가락이 끊겼다 이어지면서 불씨를 다둑거리는 부삽소리, 딸그락거리는 인두소리. 초가을 이른 아침, 어머니는 고추밭에 이슬 맞히던 이불 호청을 걷어 길다란 마루에 누군가와 마주 잡고, 하얀 옥양목 위로 이리저리 쟁기질하던 숯불의 까만 다리미.
<수필집 『먼 산이 가까워질 때』서문> 중에서
이 부분을 읽다가 숨을 멈추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잠겨있던 광경이 마침 그곳에 담겨 있는 것이다. 사진처럼 선명히 떠오른 모습, 할머니와 막내고모가 대청에 마주 앉아 있었다. 맞잡고 있는 무명옷 위호 숯불 다리미가 지나갈 때마다 옷감 밑으로 뿌옇게 김이 번져 나왔다. 가끔 나도 다리미질감을 잡았다. 다리미가 가까이 오면 얼굴은 뒤로 보내고 손만 뻗쳐 뜨거움을 피했다. 할머니께서는 숯불 다리미를 자주 흔들어 불꽃을 일으켰다.
허세욱 선생의 수필을 읽으면 언젠가는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거기에 들어 있어 섭섭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 된다. 선생의 수필은 독자들에게 수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의 파문을 만든다. 한편 그 추억의 선명함에 입을 다물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고요함에 빠지게 한다.
5
수필은 사람과 가장 친근한 문학 장르이다. 수필문학은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 냄새가 가까이 나고, 사람이 사는 모습이 치열하게 엉켜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자연은 사람의 생활에 밀착되어 공존한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자연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뿌리를 어떤 식으로 사람의 생존과 일치 시킬 수 있는 가를 선생의 수필은 말한다. 모든 수필이 자연과 일치되어 있다.
특히 여러 편 실려 있는 기행수필은 낯선 곳에서의 이질감을 자연을 통해서 해소시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연은 인간이 위로 받을 수 있는 피난처이다. 그래서 자연을 향해 떠난다. 떠나기 전의 준비 작업으로 지도를 본다.
우리의 나그네 길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물의 본성을 알아 그 지닌 모습대로 인정하여 사물의 가치를 높여주는 관용을 선생의 수필에서 만나 그 방법을 배운다면 인생의 길이 고달프지 않을 것이다.
선생의 수필은 지나칠만큼 주관적인 글이다. 독자의 마음을 뚫어보는 눈이 날카롭다.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헤아리기에 그 주관이 충분히 객관화 되어 있다. 그만큼 기교가 많은 수필이다. <어록으로 쓴 수필론>의 첫 번째 글에서 보이듯이 오랜 친구와 두세 시간 쯤 편지하는 마음으로 한담하기에 수필의 현란함이 묻혀지는 것이다.
- 초가을 귀뚜라미가 울 때나 어스름 겨울밤 진눈깨비가 내릴 때는 물론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초승달이 돋거나 하룻밤 사이에 목련이 질 때 누군지 불러서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이제 갓 사귄 사람이 아니라 오랜 친구면 좋겠다. 오랜 옛 친구로되 되바라진 이야기가 아니라 조용조용 담담하게 말하는 친구라면 더욱 좋겠다. 가슴을 두드리게 사무치는 이야기나 주먹을 불끈 쥐도록 분노하는 이야기보다 그냥 이야기하다가 서로 끄덕이는 화제라면 좋겠고, 하룻밤을 새면서 폭포처럼 쏟는 이야기보다 두세 시간쯤 편지하는 마음으로 한담하는 이야기라면 좋겠다. 그리고 일어서서 아쉽게 돌아가는 그런 이야기의 수필이면 좋겠다.
<어록으로 쓴 수필론> 중에서
허세욱의 수필선집 『먼 산이 가까워질 때』에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 듯 친근하게 읽혀지는 수필이 실려 있다. 柳
『수필문학』 1997년
* 이 글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필자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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