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을 고르듯

이 재 월

사랑에 눈을 뜨면 시인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마침표를 찍고 ‘이별의 서러움’을 달래기 위해 중년부터 글을 썼다. 그 누군가에게 이내 심정을 하소연한들 뭐해…. 가슴을 쥐어짜며 한참을 울다가 볼펜을 찾아본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을 볼 때 아-! 예쁘다, 감탄사만 연발하듯 막상 서러움이 극에 달하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내어 울기만 했다. 부끄러워 남몰래 흐느낄 때도 영혼을 씻어내는 눈물인지 마음은 조금 가벼워지지만 글은 쓸 수가 없었다.

슬픔이 최고조에 올랐다가 세월이란 약을 먹고, 그 감정이 한풀 꺾여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는 연습을 한 후 비로소 감정을 추수릴 수가 있었다. 격정보다는 냉각만이 내면의 정서를 흔들어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았나싶다. 이것은 자기 절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용감하게 나의 삶을 진솔하게 쓴다며 무턱대고 써나가다 보니 두 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중견 작가들도 습작시절에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기록하고 짧은 글은 통째로 베껴 두었다고 한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짧은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끙끙거리며 몇 번인가 고쳐 쓴다는 것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글을 쓸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독자의 마음을 단방에 붙잡고 끝까지 읽어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글머리를 어떻게 써야 할까? 생기가 넘치게 쓸 수 없을까?

수필은 체험을 토대로 그 하나를 되살려 그곳에 스며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 의미화는 작가만이 해석하는 내용이며 평가이다. 우리들은 흔히 무슨 사건이 생기면 “수필감인데” 라는 말을 곧잘 한다. 그 선택은 단순한 동기가 아닌 것만이 재음미할 소지가 된다.

나의 어린 시절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산과 들로 쏘다니는 천둥벌거숭이였다. 봄이면 나물 캐고 진나달래꽃을 꺾으며,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던 그때가 내 글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쓰기 교과서를 보면 글을 쓰는 순서가 나오는데, 예를 들면 “장미꽃”이란 주제에 삥삥 돌아가며 줄기에 가지를 만들어 자기 나름대로 장미꽃에 대한 연상을 있는 대로 써 나가는 것이다. 다음에는 개요를 쓰도록 되어 있고 다시 산문으로 쓰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걸 보면 누구나 글을 쉽고 부담 없이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起, 承, 轉, 結에 따라 뼈대를 잡아 개요를 쓴 후 많은 연상을 통해 쓰다가 여러 번 고쳐 어휘를 다듬고 합평을 거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합평을 하다보면 놓쳤던 어휘들도 되돌아오고 나 자신 의미화시킬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각인각색의 합평으로 조그마한 힌트가 뜻하지 않은 사고력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한 사람의 생각보다 세 사람의 두뇌가 모이면 해결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긍정한다. 드디어 앙상한 뼈대 위에 새싹이 돋아나고 과일이 열려 무르익듯 하나의 작품으로 태어난다. 그렇지만 나를 즐겁게 할 만큼 만족하지는 않았다.

나는 외국 여행을 하는 기회가 있어 기행 수필을 쓰게 된다. 여행하기 전 그 곳에 관한 정보를 백과사전이나 책, 인터넷을 통해 넓은 지식을 사전에 찾아 프린트로 준비하면 여행 중 수시로 볼 수 있다. 시각적 공간적으로 낯선 그곳에서 주변의 나뭇잎이 다르고 그 사이로 부는 바람 냄새도 달랐다. 내 나름대로 그곳의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문물을 보고 끈끈한 교감을 이루고 감동을 받는다. 그때마다 나의 느낌이나 가이드의 해설을 빠짐없이 메모하고 사진을 찍어 오는 일도 돌아와서 글을 쓸 때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기록문을 그대로 덮어 두기엔 너무 아깝고 보석처럼 자꾸 꺼내 보고 싶어 글로 안 쓸 수가 없다.

나의 등단작 중 한 편도 마야 문명지를 찾아보고 썼던 “사라진 문명과의 만남”이란 기행 수필이다. 밀림 속에 있는 신전은 과학적인 기법으로 현대인도 풀기 힘든 수수께끼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신전과 흩어진 유물들, 생명을 담보로 하는 그들의 신앙심 등에 초점을 맞추고 서사와 묘사, 의미화를 해 나갔다.

글 쓰는 우리들은 매순간 스치는 영감을 즉시 잡지 않으면 놓치게 된다. 침상사(枕上思) 마상사(馬上思)해야 하니 번갯불처럼 스쳐가는 어휘나 화두를 잡아야 하기에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메모를 하고 버스 안에서도 물론이다. 어떤 이는 운전을 하다가도 갓길로 비껴 세워 놓고 메모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화두를 잡기 위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지필묵의 상비는 필수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내 방은 국어사전과 수집한 자료들, 습작품들이 대작이나 쓰는 사람처럼 항상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이렇게 그때그때 뽑아 둔 어휘들이 모두 진가를 발휘한다고 할 수 없고, 키로 알곡을 고르듯 다시 몇 번인가 키질을 해 골라야 한다. 그러다 보면 빠뜨린 것이 다시 돌아오거나 찾게 되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흘린 말을 주워 올 때도 있다. 때로는 주워온 낱말이 문맥에서 없어서는 안 될 玉이 되기도 한다.

여자가 불화를 그리는 일을 금기시 했던 장벽을 뚫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무형문화재 단청후보자가 된 친구가 있다. 전시회 때 머리카락처럼 가는 붓을 세워 단전호흡을 해 가며 수천 번의 붓놀림을 해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고 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붓놀림 흔적을 보며 우리는 혀를 내둘렀다.

중견작가들도 한 줄의 글을 쓰려면 열 장의 원고지를 버린다고 했다. 헤밍웨이도 18년에 걸쳐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고백했으니 어느 분야에서나 인정을 받기란 피나는 노력의 댓가이지 공짜는 없다. 작품이 거의 되어간다고 생각할 때 덮어 두고 있다가 며칠 후 열어보면 뜯어내야 할 곳이며 보수해야 할 곳이 또 보인다. 조각가가 원석을 깎아내고 파내고 닦아서 하나의 모양을 만들 듯 사물을 보는 또 다른 안목으로 사색하며, 비유법 직유법 등의 다양한 방법도 동원한다. 긴 문장은 지루하니 짧은 문장과 섞어 쓴다던가, 과거 현재 미래형을 적당히 믹서 하는 세심한 주의도 필요하다. 거기에 많은 공부와 퇴고만이 작품을 살리는 길일 것 같다.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 슬픔”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숙명적으로 체험한 것이라고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학과의 만남은 숙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정과 직장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젊은 날에는 내가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아름다운 삶 속에서 독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향기나는 글을 쓰고 싶은 게 나의 희망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