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順 子

새해 들어 한 달 여 동안은 무엇에 좇기는 사람처럼 괴로웠다. 가정 내의 근심도 아니고 하고자하는 일이 안 된다거나 경제사정이 어려워서도 더욱 아니다. 칠순에 가까운 나이이니 주위 사람들과 다툴 이유도 없고 홀로 사는 삶이어서 외롭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작가회 회장님으로부터 ‘나의 수필작법’을 써서 수필 한 편과 함께 보내라는 당부가 있었다. 수필을 쓴다지만 신변잡기가 아니면 너절하게 과거사나 들추어내어 글이라고 써서 지면만 더럽힌 꼴이니 특별한 수필작법이 있겠는가. 이렇게 어물어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시 독촉 전화가 걸려왔으니 괴로울 수밖에. 

내가 수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 중에 우연이었다. 어느 날 사십 여 년 간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해오다 IMF로 경제 사정이 어려울 때 내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육십이 가까운 나이었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고, 그렇다고 뾰족이 할 일도 없어서 김치를 담거나 만두를 빚고 녹두지짐을 붙여서 지인들에게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 일을 대충 마치고 TV를 켜니 서정범 교수님께서 북극성이 머리 위에 떠 있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숫가에서 상복을 입으시고 어머님께 제를 올리는 장면이 나왔다. 나도 월남한 이산가족이어서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이 솟구쳐서 그만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보람 있는 삶이 될까 여러 날 곰곰이 생각을 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뭔가를 해보아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고 독학이라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론이 섰다. 이렇게 쉰아홉이란 나이로 독학에 의한 학위공부를 시작했다. 혼자 해야만 하는 공부이니 국문학이 제일 쉬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국문학이 어디 생각처럼 쉬운 학문이던가?

공부하는 동안 시련이 닥쳐왔다. 지병인 당뇨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던 중 심근경색이라는 몹쓸 병에 걸려서 응급실과 수술실을 오가다 심장수술을 받고 한 달 만에 퇴원을 했다. 그 후 일 년은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공부는 해서 무엇하랴 하는 생각에 허송세월만 보내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나이 예순세 살 봄에 학위를 받을 수가 있었다. 나이가 많다고 특별상도 주고 매스컴에도 자주 오르내리고 광고도 나가게 되었다. ‘학연저널’에서 수기를 써 달라기에 수기를 써 주었더니 두어 번 활자화 되어 나왔다. 이에 힘입어 나도 글이라는 것을 써 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중앙일보를 들추다 서정범 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 수필반이 있다는 것이 보여 눈이 번쩍 뜨였다. 날이 밝자마자 중앙문화센터에 등록을 하고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늘 존경해 왔던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첫날 교수님을 대하니 첫 말씀이 “이곳이 수필을 배우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왔느냐?”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당뇨로 윗니는 네 개밖에 없고, 머리는 허연 할머니가 반바지에 티셔쓰만 걸치고 거기다 검은 배낭을 메고 절룩거리며 교실에 들어갔으니 당연한 말씀이시다. 그렇다고 어디 기가 죽을 나인가. 일주일 후에 작품 하나를 써 가지고 합평을 받아보니 기운이 다 빠졌다. 수필쓰기가 노출증이 심한 나에게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건방졌던 내 생각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일단 마음을 정했으니 쓰긴 써야겠는데 도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책방에서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을 한 권 구입해서 여러 번 읽었더니 수필이란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으나 갈 길은 너무 멀었다. 다시 ‘한국의 명수필’을 사다 다섯 번을 읽었다. 읽기만으론 부족한 것 같아 아이들이 쓰다 버렸거나 광고지 뒷면과 A4용지 뒷면에 다섯 번씩 써보고 나니 조금은 자신이 생겼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을 어떻게 적절히 표현하는가가 아직도 연마해야 할 과제이다.

누구나 내 나이쯤 된 사람이라면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아왔다. 특히 어머니와 단 둘이 일곱 살에 월남하여 맨주먹이나 다름없었던 서울에서의 고달픈 삶. 비록 자유의 땅이지만 낯선 서울에서의 서툴렀던 도시생활과 한국동란으로 겪어야 했던 피란살이 등 후대에 남겨주고 싶은 사연이 많다. 더불어 고향의 자연 환경과 생활 풍습, 향토 음식 만드는 법 등을 컴퓨터 한 모퉁이에 담아 두면 언젠가는 동생들이나 아이들이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비록 내가 쓴 글이 나의 프로필이 속속 드러나고 과거에 대한 반성이 주를 이루어 부끄러운 내 인격이 드러나겠지만 쉬지 않고 쓸 것이다. 반짝이는 순발력이나 은근히 미소 짓게 하는 글이 못 되면 어떠랴.

산모롱이를 돌아 들어가면 새로운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곳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소박한 삶도 보게 된다. 혹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 온 사람이 내 독자가 된다면 반가워 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하게 된다. 이런 독자에게는 어줍짢은 내 글이 그들의 메마른 가슴을 축여주는 물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여행을 하다보면 낯선 곳에서 우리 민족의 발자취를 발견하게 되고 뜻밖에 학문적인 소재도 얻을 수 있다. 내가 겪었던 지난 세월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삶이었기에 글을 쓸 소재는 많다. 문득 내 글에서 나와 같은 과거가 있는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내용이 들어있다면 반갑지 않으랴.

사람이 되기도 전에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어서 부담도 많이 된다. 수필쓰기를 시작한 후로 문인들로부터 보내온 수필집을 많이 받게 되어 그 소득이 크다. 그 분들의 수필을 읽다 보면 잃었던 보석을 발견하듯 반갑다. 수필을 많이 읽다보면 박학다식해진다는데 그런 것이야 욕심이겠지만 열심히 읽다보면 작은 것에도 글감이 있고 산뜻하고 맛깔스러운 글도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잘 익은 과일을 따서 맛깔스럽게 즙을 내어 마실 때 혀끝에 와 닿는 느낌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수필을 쓰기 위해서 끊임없이 나를 탐구하겠다. 그리하다보면 목적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야무진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