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헛함을 메우려는 수련 

권 석 하 

내가 글을 쓴다고 해서 친구들이 자기네들처럼 쉽게 살지 왜 그리 어렵게 사느냐고 한다. 지나친 말이 아니라 여긴다. 글쓰기가 이처럼 호된 극기 수련을 쌓아야 함을 짐작도 못했었다.

작가로서 이순 나이면 하다못해 중진이 되거나 원로 작가로 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 나이에 나는 멋모르고 수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글을 쓰기 이전에는 남의 수필을 읽으면서 그런 글쯤은 쉽게 쓰여지는 줄만 알았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터라 그런지 막상 이 길에 들어서고 보니 써 갈수록 산세 가파른 비탈길에 오르는 만만찮은 고난이 따른다.

수필 한 편 쓰기가 산고(産苦)를 치르듯 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수필가는 수필은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글이라 해서 隨筆을 ‘髓筆’로 적어야 한다고까지 말하는데 나야말로 그 지경을 겪고 있지 않나싶다. 돈쓰기보다 말쓰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야 말로 그보다 더 어렵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여고 시절, 나는 시를 쓰겠다고 문예반에 들락거렸다. 그 꿈을 이루려고 시 창작집 책장이 너덜거리고, 책 표지가 낡아 떨어져 나가도록 읽고 또 읽었다. 시인이 되고 싶어 밤낮으로 끼적거렸으나 시인은커녕 헛장만 치고 다닌 격으로 끝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환경이 바뀌고 나니 그 불타던 의욕도 욕망의 불꽃도 잿불 사그라들듯했다. 그 후로는 글쓰기를 엄두도 못 내고 현실에 매달려 허겁지겁 살아왔다. 한눈 팔 겨를 없이 살다가도 가끔 뱃속이 비면 출출한 공복감이 느껴지듯, 시장기 같은 헛헛함이 엄습하곤 했다. 이런 상황이면 소녀 적에 문학하고 싶던 병이 다시 도지는 건지. 시정(詩情)에 젖어 글을 쓰고 싶은 감정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지난날 글을 쓴 뚜렷한 이력도 없거니와 그동안 글쓰기와 단절한 상태이니 글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 그래도 마음이 허전하면 낙서하듯 장르 미상의 글을 쉬지 않고 무엇이 되든 썼었다. 그렇게 쓴 글이 문학작품으로 근사치에 못 미치지만 헛헛한 심정을 메우기에는 그런대로 일련(一連)의 수련과정이 되기는 했다.

누구나 나이 들면 주머니가 든든해도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허무감이 육신의 헛헛증(腹空症)처럼 정신적으로 한파 들이닥치듯 밀려들기 마련이다. 이 허(虛)함을 지탱하는 방편으로 나는 글을 읽고 쓰며 견디고 메우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기왕 그렇게 글을 쓰며 살아가려면 전문적인 작법과 문장 수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학습을 하다 보니 수필을 쓰게 되었다. 수필과 연을 맺고부터 내 나름대로 사물을 관찰하거나 자연을 대하거나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찰하는 혜안(慧眼)이 생겼다.

수필뿐만 아니라 전문의가 되려면 수련의 과정이 있고, 수녀가 되려도 수련 수녀의 기간을 거쳐야 하듯이 제대로 수필을 쓰려면 치밀한 수련기를 거쳐야 함을 절감한다. 하여, 좋은 수필을 쓰려면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가.

이 길에 들어선 지 어언 십여 년이 흘렀다. 이런 세월이면 명 수필은 못 되더라도 수필다운 글이 나와야 할 터인데 여태껏 마음대로 글이 써지지 않으니 수련의 부족함을 자성하게 된다.

십여 년 넘게 한 길을 걸었어도 수필쓰기에는 부족하고, 통달은 못했으나 삼사 년 전에 ‘파꽃’이란 표제로 수필집을 묶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수필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가 없었다면 아마 꽃을 보더라도 향기롭고 화사한 꽃 보기에만 마음과 눈길을 주며 이끌렸을 것이다. 파꽃 같은 하찮은 꽃이 그렇게 의미 깊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글을 쓰게 되면서 꽃을 대하는 심안(心眼)뿐 아니라 어떤 사물을 바라보거나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더라도 외곬으로 좁았던 시야가 조금은 다각도(多角度)로 면밀하게 깊이 살피며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았나한다.

그 열린 혜안으로 앞으로도 되도록이면 소박하고 자잘한 깨꽃을 찾아나서는 나비의 심정이 되어 글을 쓰고 싶다. 비록 그 깨꽃이 형색은 보잘 것 없이 초췌하지만 그의 결실은 사람에게 이롭고 맛나는 고소한 깨알을 쏟아내지 않던가.

그 수확(收穫)을 교훈삼아 쭉정이 같은 내 인생 어스름에 찾아드는 헛헛함도 메우고, 힘닿는 대로 깨꽃의 결실 같은 알차고 진솔한 글을 써서 독자와 고소한 정을 나누며 참삶이 어떤 모양새인지 더듬어 보고 싶다.

수필쓰기가 고뇌스럽고 만만치는 않지만 이 호된 수련이 헛살이가 아니고 구도(求道)의 길이라 여기니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