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임에서 시인인 동인이 나에게 물었다. 수필이란 꼭 체험적 사실을 고집해야만 된다고 생각 하는가. 이에 대해 나는 인생의 년륜이란 것이 대체로 보편 타당한데 어느 정도의 허구는 충분히 상상할수 있는 범주에 속하므로 때로는 가상 현실을 주제로 내세울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고 답한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경솔한 대답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은 유명 소설가인 최인호 선배가 어떤 백일장에서 대상을 탓던 설악산을 흠모하는글의 첫머리에 설. 설악 .설악산....... 이라고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명산에 대한 황홀한 감정을 이렇게 외마디 글자로 전달함으로서 어줍잖은 미사어귀를 동원하는 것 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솔한 공감을 얻을수 있었다.

어떤 산악인에게 산에 왜 오르는가라고 물었더니 산이 거기에 있어서 오른다고 했다고 해서 한동안 명언이라고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별 생각없이 나온 단순하고 싱거운 대답일수도 있고. 아주 심오한 경지에서 나온 선답(禪答)일수도 있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유명한 법어를 남기셨다.

범부가 그런말을 했다면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말이므로 대수롭지 않았을텐데  고승이 남기신 말이니 뜻도 범상치 않을것 같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는데 알고 보니 산은 산만이 아니고 물은 물만이 아니더라. 그러나 인생을 더 깊숙히 살다보니 결국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라는 뜻이 아닌지 주제 넘게 풀이를 해본다.

중국의 황산에 오르지 않고서는 산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 선경을 보고 내려온 선비는 붓을 꺾고 화백은 화지를 찢었다고 했다. 그래서 황산을 올라 선경을 찾아 헤맸다. 황산의 서해 대협곡에 펼쳐진 기암괴석들과 운무에 가린 천하는 가히 입을 다물수 없을만큼 장관이었다. 허나 붓을 꺾고 화지를 찢어 버릴만큼의 감동을 느끼기엔 내 식견이 너무 보잘것 없이 초라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물을 보거나 상황에 부딪쳤을때 그 느낌의 정도는 학식이나 경륜의 차이, 인격등 사람에 따라 천차 만별일것 같다.

아마츄어 마라토너인 후배가 있다. 장장 42. 195키로 미터를 달리는 운동이다. 선수들은 2시간 10분 전후에 이거리를 달리지만 아마츄어들은 대략 4시간에서 5시간 사이에 달린다고 한다. 나는 후배에게 그 지루한 운동을 무엇 때문에 하는지 그리고 그 긴 시간을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던 점들을 물었다. 

후배는 마라톤 자체가 인생이라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 나는 산에 올라 너댓시간을 걷노라면 산천경개도 구경하고 벗들과 이야기도 나눌수 있으므로  그런데서 더불어 사는 인생을 찾는 것이지, 달리는 사람들을 보니까 옆사람과 이야기는 커녕 입만 굳게 다문채 죽어라고 뛰기만 하는데  그런 운동이 무슨 인생 자체냐고 핀잔을 주었다.

후배의 대답은, 반환점 정도까지는 길거리의 인파가 응원해주는 것도 보이고  도로가에 서있는 푸르른 나뭇잎 아름다운 꽃들도 감상하기도 하고 친구들, 가족들, 어제 있었던 일들, 앞으로 마주쳐야 될 일들이 앨범을 열어 보듯이,또 어떨때는 주마등처럼 겹쳐서 펼쳐지다가 30 키로미터 지점쯤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이 닥쳐오면서 점점 머릿속이 비워진다는 것이다. 35 키로 미터정도를 벗어 나면 희로애락도 없어지는 것 같은 가벼운 머리로 변하고 비로소 종착지인 트랙을 들어설때쯤엔 희열이 몰려 온다는 것이다. 이 매력에 빠져 마라톤을 한다는 것이다.

아니..번뇌 다음에오는 성찰 그리고 무심의 경지에 들어서서 얻는 희열을 이 후배가 느끼고 있었단 말인가. 어리게만 생각했던 후배의 대답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감히 성철 스님의 후계자도 아니고, 어떤분처럼 수천번이나 오른 산악인도 아니고. 최인호 처럼 감성이 풍부한것도 아니고, 몸소 자기몸을 내던져 너댓시간을 달리는 후배의 경험을 미루어 짐작할수도 없는 지상담병(紙上談兵)의 범부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몸소 체험한 사실조차 그 느낌을 정리하는데도 빈약한 식견의 범위를 벗어 나지 못하는 주제에  허구의 사실이 어떻고 가상현실이 어떻고 한것이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