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늘 느끼는 것이지만 유럽의 영화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전혀 가감 없이 삶을 그려내고 있지요. 어쩌면 제가 그런 영화만 봐서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럽의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것들은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겪고 있는 그리고 내 삶에서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일상적이고 사실적이라는 뜻이지요.
이 영화 또한 그러합니다. 내 이웃의 은밀한 삶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지요. 혹은 우연히 알게 된 친구의 비밀일지도..

우리네 영화가 인간의 느낌, 특히 성을 강조하고 극대화하고 미화하는데 반해서 지나칠 정도로 시시콜콜하게 아름답게 그려나가는데 반해서 이 영화는 성을 현실에서처럼 삶의 지극히 당연한 한 부분으로 다룹니다. 이들이 그려내는 성행위에는 절차도 느낌이 고조되어가는 과정도 없습니다. 그 흔하디흔한 몇 마디 애정 어린 말조차 없고 성행위로 들어가기 이전의 애무조차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저 매일 먹어야 하는 끼니처럼 당연하고 혹은 하지 않으면 안 될 업무처럼 사무적이기조차 합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지요. r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의 현실에서 성은 바로 그렇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아닌 중년의 성의 실상이 그러하지요.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여배우의 벌거벗은 몸을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로 잡아 시선을 한참 붙들어놓고 거기에다가 신음, 교성을 극대화시켜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행위란 할 수 없다는 것처럼, 이것이 정석이야 하고 우격다짐으로 들이대는 우리 영화와는 정말 다릅니다. 마초의 시각, 남성위주의 시각으로 여성의 몸을 관음증에 걸리기나 한 것처럼 샅샅이 훑어 내려가는, 표현 또한 남성위주의 그런 우리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오르곤 하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취화선'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영화도 대단히 많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게 그렇습니다. 여성의 몸을 밭으로 표현하고 목을 뒤로 꺾을 정도로 거칠게만 다루는 그런 행위가 대체 어째서 사랑의 행위인지 도무지 저는 모르겠더군요. 그런 식으로 성행위를 있는 것 없는 것 등장시켜 화려하게 꾸며댄 우리 영화에 익숙한 이들은 유럽의 영화를 보면, 아니 거창하게 말할 필요 없이 이 영화 인티머시(Intimacy) 정사 하나만 보면 무척 실망할 겁니다.

정사,
제목이 대단히 음탕해보이지요. 은밀하고 아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을 다룬 듯이 보이니까요. 영어 제목은 intimacy 정교입니다. 간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내용을 보면 그 정황상 정사라기보다는 간통이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그런 의미로 인티머시라고 했을 텐데 정사라는 제목을 취한 이유는 아마 관객이 많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붙였을 겁니다. 호기심을 자극해서 봐주기를 바라는 거지요. 뭐 흥행사나 영화를 만든 이나 한 마음이었을 테니까 별다른 느낌은 없습니다. 아마 그런 제목을 보고 호기심으로 보러 온 이들은 속았다는 불평을 쏟아낼 테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영화평을 꼼꼼히 챙겼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테지요.

정사(Intimacy)라는 제목을 들먹였을때 많은 이들이 우리 영화 '정사'와 혼동하더군요. 이 미숙과 이 정재가 등장했던 그 '정사' 말입니다. 저는 이 미숙이 열연했던 정사에 대한 느낌이 좋지 못합니다. 솔직하지 않은 포르노에 가까운 영화라는 것이 제 생각이었지요. 중년 여인의 갈급함을 다루던지 두 사람의 사랑을 다루던지 그랬어야 했습니다. 생활에 전혀 부족함 없는 여인이 치부란 하나도 없는 듯 곱게 포장한 모습으로 젊은 청년과 사랑 아닌 욕정을 나누는 듯이 보이는 그 영화는 제 심사를 심히 비틀리게 했었지요. 사랑 아닌 자극이 목적인 듯 보였으니까요. 그 영화에서 중년의 여인이 생활에 시달리는 것이 나오던가요? 하다못해 꿈을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나오던가요? 오직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면만 나오지 않던가요? 위에서 말했듯이 한국영화가 여인을 보는 시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나 할 수 있을 테지요. 그에 반해 이 영화 '정사(Intimacy)'는 전혀 곱지 않습니다. 주인공도 삶도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또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해야 옳겠지요. 좋은 영화가 그렇듯이 소품에도 주인공들의 일상에도 온갖 소품과 장소를 세심하게 배치했음을 알 수 있는 영화기도 하지요. 나름대로의 작품성을 갖추고 있는 영화인데도 우리 관객들에게는 정사에서 기대했던 은밀한 욕망 그리고 자극적인 내용들,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지 않아서 그런 점들이 실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영화는 한바탕의 꿈이라는 본분에 충실한 영화들이 한국에서는 더 환영받는 게지요.

주인공들은 대단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혼자 사는 이혼남인 제이는 술집 바텐더지요. 그는 어느 일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요즘 많이 듣는 표현인 '존재의 진공' 상태지요. 황폐한 그의 정신상태는 그가 살고 있는 집안 모습에서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극히 기본적인 가구만 있을 뿐 방안에는 침대마저 없습니다. 짐은 풀지도 않고 가구는 살 염도 안 하지요. 결혼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과거지만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고 그는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했지요. 하지만 어느 날인가 이것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문득 떠나옵니다. 물론 어느 한 순간 갑자기 한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여간 스스로 가족을 떠나온 이 남자는 살아갈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저 하루하루 지탱해 나갈 뿐.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