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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운영자 |
날짜 : 03-11-25 20:01
조회 : 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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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로 척박한 현실을 살아내기
앙드레 지드의 ≪아내의 학교≫
金 玉 南
이순(耳順)에 이른 지드는 상상력의 고갈을 겪고서 인간의 '성실과 위선'을 테마로 3부작(제1부 <에블린의 일기> 2부 <로베르의 항의 서한> 3부 <쥬느뷔에브>) 소설을 쓴다. 그가 난생 처음 여성의 입장에 서서 서술한 ≪아내의 학교≫는, 여성에게 결혼이 얼마나 환상이며 허구인가를, 결혼이 당면한 현실임에도 그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보여 준다.
그가 이순에 이르기까지의 행로를 짚어 보면 ≪아내의 학교≫ 이면에 웅크린 결혼의 위악성에 눈뜨게 된다. 지드의 어린 시절은 통과 의례를 거치지 않은, 즉 진정한 의미의 탄생이 이루어지지 않은 유충 상태의 연속이었다. 동물이 가진 본능적 성의 표출이 의식 전체를 지배, 이 때부터 시작된 자위 행위는 그의 유년기를 어둡게 했다. 반면 당시에 접한 자연은 자유와 호기심을 발아시켜 풍부한 감수성을 가져다준다. 이는 ≪지상의 양식≫에서 드러난 감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청년기의 지드는 정착을 거부하는 보헤미안적 기질로 인간의 자유로운 생을 위해 열정과 욕망의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유년기의 환경이 남긴 하릴없는 상흔(傷痕)이었다. 이러한 그의 청년기에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마들렌느 롱도와의 특이한 부부 관계다. 그에게 모친의 사망은 개인적으로 비애였으나 도식적 모럴의 종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 집안의 사촌누이인 마들렌느 롱도와 결혼하지만, 이 부부의 미묘한 관계는 여태껏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4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부인은 처녀였으며, 그녀가 지드를 일생 동안 따라 다닌 동성애 문제를 알고 난 이후에 둘의 정애는 더욱 두터워졌다고 하니 상식의 선에서 쉬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드의 생애가 그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혹은 긍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그녀를 향해 보이고 싶은 충동이 대부분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다니 반드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지드는 인생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여행에서 마련하였다. 마치 엉겅퀴 씨가 뿌리를 내릴 기름진 땅을 찾아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그러나 한 곳에 고정되어야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는 게 씨앗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는 부단히 정신적 굴레에서 일탈과 소생을 반복했다. 여행은 한계에 이른 내면의 감정적 불안이 그 곳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일탈 욕구와, 정착을 거부하는 보헤미안적 속성과 연합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획기적인 전기를 성취함으로써 지드는 예속을 거부하는 변모와 편력의 문학가가 되었다.
그러나 변모·편력 때마다 전력을 다하여 세계와 대결하였으며 그 때마다 그는 자살을 감행했다가 수도 없이 다시 부활했다. 언제나 젊은 세대와 같이 살았고 따라서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를 위대한 정신의 해방자라고 하며, 실존주의 문학의 시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년의 지드는 오랜 편력과 방황을 거쳐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된다. 내부적 욕구와 외부적 모순의 갈등을 부단한 자기 성찰을 통해 조화롭게 엮은 그의 문학에 1947년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었다.
가장 가까운 여성(어머니, 아내)들의 고집 불통인 부덕이 지드에게 여성에 대한 흥미를 잃게 하여 동성애에 빠지게 하였다고 한다. 이 ≪아내의 학교≫는 아내와 남편과 자녀가 각자의 입장에서 결혼의 허상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점은 여성인 '아내'에 맞춰져 있다. 여주인공 에블린이 맹목적인 사랑에서 벗어난 매서운 눈초리가 바로 지드의 비판 정신이다.
"어떤 보람도 기대할 수 없는 내 희생에 대해서 감사를 느낄 줄 모르는 사람, 너무 늦게 알게 된 평범하고 속물적인 사람. 나는 그의 허수아비 같은 존재일 따름이지 않은가. 이것이 현재 내 목적이요, 운명이요, 숙명이란 말인가. 어리석게도 나는 이 지구상에서 로베르(남편) 이외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다른 지평선을 남겨두지 않았던 것이다."
순결이란 허영이며 가면을 쓴 자만이란 지드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처녀들이 결혼에 대한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상상이라는 비현실의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꿈꾸기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순간이 왔을 때 무기력하기 그지없다. 사람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럴수록 자신에게 엄격해져야 한다. 맹목적인 환상의 세계에서 상상의 날개로 비상하다가 결혼이란 현실의 덫에 걸린 에블린은 그 현실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로베르의 실상을 보기 시작하고 그의 위선을 직시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갑각류가 아님을 자처하며 편견 없는 정신을 표방하는 '성실한 인간'에게는 위선이 없을까 묻게 된다.
딸 쥬느뷔에브의 눈에 비친 부모를 보자.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과시하려고 애쓰시는 분이 아니였다. 실제로 자신이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하는 일에 있어서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지극한 겸손과 선행으로 수년간 어머니는 심정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숨기려는 만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려 하였다. 덕행 그 자체보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에 더 가치를 두었다. 아버지의 말과 행동은 감정이나 생각보다 앞섰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게 미불된, 빚진 듯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런 점을 심각하게 고민했고, 어머니를 사랑한 나를 미워했다."
남편 로베르의 눈에 비친 아내를 살펴보자. "에블린은 결국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바라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녀가 바라는 환상 속의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한 나의 일체에 대해서 비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본능의 지배를 받게 되며, 어떠한 계율과 법칙에 대해서도 복종하지 않으려는 영혼은 필연적으로 모순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의무감이란 영혼의 통일을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부여받는 것이다. 의무감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에블린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인간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진리는 여하한 진리라도, 설령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인간의 영혼을 진리를 담는 그릇으로 생각지 않고 독자적으로 진리를 창조할 수 있는 작은 신성(神性)과도 같이 생각했다.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그들의 딸 쥬느뷔에브의 날카로운 지적을 옮겨 아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어머니 자신도 아버지의 위선적인 태도를 잘 알고 계시면서 뭘 그러세요? 결혼은 남편에게만 모든 특권을 부여하는 의식이 결코 아니에요."
쥬느뷔에브는 그러한 결혼에는 절대로 승복할 수 없으며 서로에게 협조하는 동반자로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내 자신이 쥬느뷔에브에게 동반자에 대한 경계와 조심성을 갖게 한 생생
한 본보기가 되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녀는 비판할 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생활을 갖게 되어서 어줍잖은 남자에게 매달려 자기의 운명을 그르치진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불명예스러운 것은 남편 외에 딴 애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가정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라는 구절이 왜 불현듯 생각나는 것일까? 인간성의 자유를 추구한 개인주의자 지드가 20세기 전반의 불문학에 새바람을 일으켰듯이 ≪아내의 학교≫는 매몰찬 혼돈을 여성들에게 안겨 주었고, 환상과 허구로 축조된 막연한 결혼관과 인생관에 사로잡혀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허우적거리는 여성들에게 각성의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렇지만 그 매몰찬 혼돈 끝에 존재하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우리는 보다 뚜렷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 채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실한 감정은 관습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1세기 전의 세계 여성을 향한 이 소설의 메시지가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 여성들의 가슴에까지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고 있으니 말이다. 흔들리고 있는 현대의 가족관계 속에서 부부만큼 든든히 보이면서 위태로운 관계는 없다. 특히 현대가 앓고 있는 깊은 증세는 결혼이라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아내들의 위치와 생활에 대한 모범답안이란 영원한 숙제요, 심지어는 해답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드의, 정착의 거부와 정신적 굴레에서의 소생 정신과 같이 끊임없는 편력은 보다 높은 자유, 보다 확고한 아내의 위치를 찾아 나가는 아내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지드는 아내들에게 성원하고 있다. 깊은 혼돈 속에서 당신들의 위치를 찾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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