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오후, 동숭동의 거리가 무늬처럼 흐르고 있다.

하늘이 서쪽 끝에서부터 말갛게 씻겨지고 있었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속삭이듯 봄비가 내린다.

뽀얗게 물안개처럼 내리는 봄비가 나의 어깨 위에 사뿐히 그리고 다정하게 내려와 앉는다.

약속장소인 ‘蜜茶苑’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얘기를 하는 모습들이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찻집,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있어서 행복한 마음으로 가서 앉는다. 무심히 오가는 행인들이 환하게 내다보이는, 길가 쪽 통유리의 가운데 테이블이 이곳에 올 때마다 즐겨 앉는 자리다. 유리창을 좌측으로 하고 앉아 있으면 길거리의 풍경과 약속한 사람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비록 기다리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실망스럽지 않는, 또 하나의 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편안한 곳이다. 가깝게 지내는 한 선배는, 창을 통해 보이는 저녁노을에 반사되는 플라타너스의 불붙는 듯한 선홍색이 좋아서 가을이면 이곳에 와서 차를 마신다고 했다.

약속시간 십 분이 지나고 있지만 약속한 사람은 오지 않는다.

전화를 해 볼까 잠깐 생각도 하지만 약속을 못 지키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좀더 기다리면서 그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주문한 비엔나커피의 부드럽고 향긋한 생크림맛을 음미하며, 음악을 들으며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며…. 이곳에는 낯익은 문인들이나 연극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편이어서, 작품을 통해서보다는 그들의 평소의 모습과 간간이 들리는 일상적인 대화가 도리어 신선할 수가 있다.

이곳에서 무엇보다 나를 끄는 것은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거리의 풍경이다.

지하철 출구와 연결된, 조금전 걸었던 이 길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모습과 표정도 다양하다. 아직도 비가 완전히 그치지 않은 듯 우산을 쓴 사람이 대부분이고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도 많이 눈에 뜨인다. 아름다운 음악과 향긋한 커피가 있는 아늑한 실내와는 달리, 유리 한 장 너머에는 지금 또 하나의 세계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쓰고 있는 우산만큼이나 각각의 색깔과 각각의 모양으로….

약속시간 이십분이 지나면서 조금 불안해진다. 약속장소를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갑작스런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비는 아직도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을 가방에 넣은 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는다. 돌아보니 그녀의 하얀 얼굴이 웃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무슨 말인가를 했고 손을 마주 잡으며 반가워했다. 그녀는 약속시간을 착각하고 삼십 분이나 일찍 나와서 기다리다가 약속장소를 잘못 알았나 하고 뒷건물 ‘첼로’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찻집이름이 더 멋있어서 어쩌면 이 장소가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쨌든 만났다는 기쁨에 우리는 우산 쓰는 것도 잊은 채 비오는 동숭동 거리를 들뜬 마음으로 걸었다. 예술의전당 고전음악 감상시간에 슈베르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강좌에 강사로 초빙되었던 그녀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가려서 자칫 희미해져 있는 슈베르트의 모습을 아름답고 또렷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나이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대학에서 음악공부를 한 동생생각에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 음악에 대한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 만나면 편안함을 느끼는 친구 같은 사람이다.

오늘은 함께 연극을 보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원작 ｢콘트라베이스｣.

2년 전에도 이 작품을 공연한 적이 있었지만 별르기만 하다가 놓쳐 버리고 못내 아쉬워했었는데, 이번 재공연은 그녀와 나에게 퍽 반가운 기회인 것이다.

미리 예약한 표를 매표소에서 받아들고 지하의 극장으로 내려가니 이미 삼분의 일 정도 객석이 차 있었다. 평일의 낮공연인데도 이 정도라면 이 연극의 흥행은 성공인 것 같다. 대부분 남녀 대학생인 것 같은데, 책가방을 들고 연극을 보러 올 수 있는 그들의 여유로움과 정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대학교 때 주말마다 기숙사에서 나오면, 명동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생각이 난다.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느릅나무 밑의 욕망｣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추송웅이 연기한 ｢빨간 피터의 고백｣ 등 그때는 지금과 달리 순수연극이 많아서 그야말로 연극의 전성기였다.

독일어권 나라에서 최근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이 작품은, 연극에 관심 있는 사람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까지 가세해서 관심을 끌고 있는 만큼 오늘 우리의 기대도 크다. 책에 있는 내용을 연출하여 배우가 어떻게 표현을 해 관객에게 전달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사다.

무대에 불이 밝혀지고 방안 전축에서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이 흘러나오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여러분 들리시지요, 브람스 ｢교향곡 2번｣ 2악장에 나오는 베이스 소리. 콘트라베이스 소리 말입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연출한 연극이다. 그는 악기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연주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존재이다. 콘트라베이스는 언제나 다른 악기를 그늘에서 받쳐 주기만 하는 존재이고, 그의 삶 또한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먼 시시하고 초라한 삶이다. 그에게는 짝사랑하는 여인이 있지만, 소프라노 가수로서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기에 자신의 사랑을 알릴 방법이 없다. 아니, 그 여인은 그에게서 너무나 먼 거리에 있기에 자신의 존재조차 알릴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이 눈에 띄지 않는 미미한 존재여서, 자신의 사랑조차 큰소리로 표현하지 못하는 초라한 삶이 아닐까, 라며 주인공은 관객에게 묻는다. 마치 오케스트라 맨 뒷좌석, 사람들 눈에조차 띄지 않는 곳에서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처럼….

배우 명계남. 영화 ｢초록물고기｣를 기획하고 연극 ｢불좀 꺼 주세요｣ ｢북회귀선｣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내가 보기에는 관객을 많이 의식하는 배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을 보는 동안 그 생각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 연극 뿐 아니라 요즘의 연극들은 예전의 순수연극과는 달리 관객들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함을 볼 때, 젊었을 때 우리가 보았던 연극에서 배우들의 순수했던 연기가 그리운 요즘이다.

무대에서 마지막 장면을 끝내고 우아하고 품위 있게 미소를 띄고 인사를 한다.

힘찬 박수를 연거푸 보내고 출구로 나오니 출연배우가 문 앞에 서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다.

다른 연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관객을 의식한 이벤트이다. 무대에서 보았던 콘트라베이스 같은 소시민적인 체념이 주는, 그래서 한 발 더 친근감이 가는 그런 모습은 그에게서 이미 사라지고 없다. 피로감과 다음 공연에서 오는 긴장이 그의 얼굴에 배어 있어서 우리에게 뜨악함을 느끼게 한다. 결코 연극배우는 무대에서만 볼 것임이다.

어느덧 일몰의 시간, 하루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동안 비는 말끔히 개이고, 해 지는 서쪽 하늘이 투명한 색으로 동숭동 거리를 덮고 있다.

이곳의 거리는 어둠이 오면서 서서히 생기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초라했던 간판들의 네온사인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우리를 반기고 있다. 학교 다닐 때 가끔씩 오던 문리대 자리, 삐걱거리던 나무계단과 낡은 피아노가 있던 학림다방, 빨간벽돌의 교회, 자장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던 중국집 자리….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각자의 추억을 되새기며 동숭동 거리를 걷는다.

비록 우리의 삶이 콘트라베이스 주자처럼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용기 없는 우리네 인생이라 할지라도. 가끔은 이렇게 자신을 확인할 수 있고, 좋았던 옛날을 혹은 힘들었던 그때를 추억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을 얼마나 윤택하고 조금은 자신 있게 만드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그녀가 문득 말한다.

“저기 저 집이 음악이 좋은데 차 마실까요.”

마주 보이는 길 건너 예쁜 이중창으로 비추는 주홍불빛이, ‘슈만과 클라라’라는 간판만큼이나 다정하고 아늑해 보인다. 우리는 그들을 만나러 급히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들 곁에서 외로운 삶을 살았던 브람스도 만나기 위해.

어느새, 동숭동 거리의 불빛이 화들짝 피어난 목련처럼 환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