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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타샤와 자작나무 / 송호근
  글쓴이 : 류인혜 날짜 : 04-05-21 07:06     조회 : 2488    

조선일보 2004년 2월 6일 /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에서

나타샤와 자작나무 / 송호근


자작나무는 군락을 이뤄야 제격이다. 홀로 초라해 보이던 깡마른 나무가 군락을 지으면 금세 늠름해지며 혁명의 냄새를 피운다. 러시아 혁명에서 빨치산들이 피로에 지쳐 돌아오던 아지트도 자작나무 숲이었고, ‘닥터 지바고’가 달빛을 틈타 혁명군들을 등졌던 곳도 자작나무 숲이었다. 말년에 농사꾼이 되었던 파스테르나크의 농장 뒤편 숲은 온통 자작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승냥이가 떼지어 몰려드는 곳은 자작나무 숲이다. 자작나무 숲은 늑대들이 눈 덮인 설원의 방황을 호소라도 하듯 토해내는 울음의 여운을 고요히 간직한다. 바람이 서걱거리는 자작나무 숲에 들어서면 검게 변한 낙엽마다 그런 기억들이 묻어난다. 열정과 사랑의 끝을 예고라도 하듯, 행여 눈물이 비칠까 마른 몸을 흰 수피로 둘렀다.


수색(水色)에서 일산(一山)으로 오는 길, 산비탈에 초라한 자작나무 숲이 서 있다. 소양강을 따라 춘천을 빗겨 올라가는 길섶에도 작은 자작나무 군락들이 있다.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내려온 자작나무들은 거대한 숲이 아니다. 그것들은 스쳐 지나가는 국도 부근에서, 때로는 산골 깊은 곳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잊혀진 기억을 지펴내는 작은 향연이다. 자작나무 숲은 권총 자살한 마야코프스키의 시(詩)를,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가로질러 흐르는 ‘고요한 돈강’을, 지바고가 라라와 마지막 며칠을 지냈던 바리키노의 설원을,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 속에 묻힌 크고 작은 봉기(蜂起)들을 상기시킨다.


일제시대 시인 백석(白石)에게 함흥은 ‘바리키노’였다. 본명은 백기행,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에 유학한 영문학도이자 시인이었던 백석은 귀국 후 조선일보를 사퇴하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전근한다.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향톳빛이 비쳤다. 함흥으로 간 까닭이 그의 고향 정주(定州)로 가는 길목이었거나, 첫 시집 ‘사슴’(1936년)을 가득 메운 향토적 생활로의 귀향의식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시집 ‘사슴’에 실린 ‘정주성’). 그의 시심(詩心)은 제삿날 찾아드는 할배 귀신, 오지항아리 술을 채먹는 삼촌, 더부살이 아이, 바느질하는 어미, 손자, 나그네, 붓장사가 함께 모여 모닥불을 쪼이는 밤에 서로 뒹굴며 가난한 시간을 보내는 그런 공동체였다. 그 시심의 원경(遠景)은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白樺’)


자작나무가 둘러처친 그의 시세계로 무작정 걸어 들어온 여자가 있었다. 22세의 기생 자야(子夜·본명 김진향). 자야는 생활고 때문에 권번(券番·기생조합)으로 들어가 예인(藝人)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新女性)이었는데, 독립운동 혐의로 감옥에 갇힌 그녀의 후원자를 만나러 함흥으로 갔었다. 백석과의 조우는 우연이었지만, 불꽃이었다. “단 한번 부딪힌 한 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김자야 ‘내 사랑 백석’)


그들의 ‘바리키노’, 함흥의 시간은 짧았다. 부모의 강권으로 백석이 세 번이나 결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백석은 도망쳐 태연하게 자야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야는 홀로 함흥을 떠났다. 경성 청진동에 은거하던 자야를 찾아 백석은 태연하게 시 한편을 전했다. 자야가 ‘삼천리’에 발표했던 ‘눈 오는 날’을 시화한 백석의 사랑 고백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 ‘마가리’로 떠나고, 자야는 경성에 남았다. 자야는 그가 또 태연하게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백석은 만주에서 몇 년 방랑생활을 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함흥을 떠날 때처럼 그들은 서로를 기다렸다. 그러나 38선이 그어지고 전쟁이 터졌다. 재북(在北) 작가가 된 백석은 사회주의풍의 시를 자주 써야 했지만, 그것의 배경에는 항상 자작나무가 둘러처친 토방(土房)의 공동체가 있었다. 자야가 남한에서 기다림의 얘기를 출간한 무렵(1995년), 백석(白石)은 북녘 어느 산골에서 죽었다. 자야가 지어준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을 게다.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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