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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03-11-25 20:02
조회 : 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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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탈
이희준 작 이행원 연출
김옥곤
무대가 밝아지면 고구려 고분의 석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무대 중앙 뒤편의 침상에는 왕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무대 전면으로는 사람 크기만한 토우(실제 남자들이 분장한) 넷이 무대를 둘러싸고 왕(고구려 유리왕)의 죽음에 대한 내력을 들려주며 가상극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석실 안에 등장하는 사람 형상의 흙인형을 토우라고 설명하고 있다. 순장제(殉葬制)가 폐지된 후 사람 대신 무덤에 넣은 것을 토용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토용이 진시황의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다. 토우(土偶)는 부장품인 경우가 많은데 널리 알려져 있는 신라 토우는 그 크기가 손가락만할 정도로 아주 작다. 따라서 이 극의 내용으로 봐서는 토우 보다는 토용에 훨씬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는 토우로 그대로 적는다.)
말하자면 극 속에서 극이 펼쳐지는 셈이다. 토우들의 춤판과 함께 무대는 암전(暗轉)한다.
다시 무대가 밝아지면서 3천년전의 고구려 시대로 돌아간다. 병약한 왕을 중심으로 새왕비와 권력층에 속하는 신하(이사람의 직함을 모르겠다. 그냥 제상이라 부르겠다.)와 해명태자, 그리고 마치 '햄릿'의 '오필리어' 같은 '수아'라는 처녀가 이극의 중심인물들이다.
극은 실험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세익스피어 극을 패러디한 것에 국악을 배경음악으로 깔아 어떤 분위기를 만들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연극이 진행되면서 내 그런 예감은 거의 들어맞았다.
유리왕은 전처가 죽고 두 왕비를 맞아 들였다. 그중 해명태자의 어머니인 전왕비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데 그것은 지금의 새왕비가 꾸민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 새왕비는 병약한 왕마저 독살하고 나라를 독차지하고자 한다. 이런 흉계를 새왕비는 재상의 도움으로 일을 해나가고 급기야는 왕에게 충성심이 강한 장군까지 끌어들인다.
이극는 가상극이다. 그렇다. 가상극이므로 사실을 뒤엎기 위해 토우들은 해명태자에게 새왕비의 음모를 눈치챌 수 있는 암호같은 노래를 들려준다.
"논배미에 앉은 꿩, 알을 낳았네 알을 낳았네/ 그가 잡아 먹었네."
이런 내용의 노래를 부르다가 태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새왕비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 이런 갈등 구조는 햄릿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다. 물론 해명태자와 햄릿왕자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수아가 실성하는 것도 햄릿의 오필리어와 닮아 있고 새왕비가 장군을 유혹해 정을 통하는 것도 햄릿에서 왕비와 삼촌이 통정하는 것과 같이 그 등식이 묘하게 성립된다.
나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햄릿극을 빌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다 고구려 설화로 살을 입히고 국악으로 분위기를 맞추는 형식이란 것도 쉽사리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극은 대단원에 이르러 병약한 왕이 수아를 품에 안으려하다 태자가 뛰어들어 수아를 칼로 찌른다. 잇따라 새왕비가 왕을 죽인다. (왕위 찬탈로 볼 수 있겠다.) 새왕비는 장군을 믿고 굴종시키려 한다. 하지만 장군은 느닷없이 새왕비와 태자를 칼로 벤다. 장군은 재상마저 베고 재상이 훔쳐 갖고 있던 옥쇄를 탈취한다. 왕위 찬탈의 승자는 엉뚱하게도 장군에게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아마 이극이 노린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한다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작가는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하긴 현대의 우리 정치사도 바로 그런 아이러니의 역사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연극은 배우들의 연기력에서부터 완성도가 크게 떨어져 보였다. 거문고, 대금, 해금 같은 배경음악의 역할도 왠지 겉돌았고, 무대 위에서 춤판이 벌어질 때도 관객의 호흡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기발한 실험극의 소재도 기본기에 충실한 연출과 배우의 연기력에 성패가 좌우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새삼 확인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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