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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반인자 |
날짜 : 03-11-25 22:53
조회 : 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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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석치마을 고샅에 들어서면 맨 먼저 반기는 게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장수목리라고도 하고 한자로 괴목(槐木)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이 아름답고 재질이 뛰어나서 나무중의 보배로 여긴다. 우리나라에도 천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20여 그루가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국제 공항으로 건설하고 있는 영종도에는 용궁사라는 절이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사찰로 조선시대 끝 무렵에는 흥선대원군이 십여 년간 칩거했다. 이 절 앞네 천삼백 년 된 느티나무가 두 그루나 있다. 직지사 바굴관 옆에는 절 식구들이 많았을 때 괴목을 파서 물 2톤 정도 들어갈 물통이 있다.
길을 가거나 또는 산을 오르다 커다란 나무가 있으면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게 된다.
‘와 오랫동안 살았구나.’ 백년 아니 이백년, 나이를 꼽아보며 숙연해지면서 경의감마저 느끼게 된다. 수목도 천년을 살고, 썩는데도 천녀이 지나야 한다니, 인간의 삶에 비하면 얼마나 유구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안은 한 톨의 솔씨가 싹을 튀워 잔솔이 되고 해가 거듭되면서 성장하여 마침내 노송이 된다. 솔씨의 최고의 경지는 노송이 되는 것처럼 생명의 목적은 이런 바람직한 성숙에 있다.
우리 자녀들의 모습은 어떤가. 아직 어려 힘도 없고 손이 많이 간다고 얕잡아보기 쉽다. 마치 한 톨의 솔씨를 보듯. 조그마한 가슴 안에는 얼마 후 성장하여 위대하게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실현시킬 잠재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짓밟아 으깨지만 않는다면 그 생명력이 움트고 성장하여 큰나무로 성장하듯이.
하늘의 뜻을 받아 땅에 내린다는 우리 마을의 당산나무. 여름철엔 시원한 그늘 밑에 앉아 하얀 수염의 어른들이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하고 개구쟁이 녀석들은 제기도 차고 땅뺏기와 줄넘기도 하는 재미있고 즐거운 놀이터다. 할아버지와 손녀들이 자연스레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정신적인 안방 구실도 한다. 할머니의 어렸을 때도 있었다고 하니 사오백년은 넘었을 거라고 한다. 나무기둥이 넓고 크다 보니 옹이가 썩어 커다란 구멍에 올빼미가 집을 짓고 알을 까서 새끼를 기르거나 아른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해마다 동제를 지낸다. 제주는 탈이 없고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이 된다. 시장에 가서 제수를 살 때는 정결해서 말이 없고 물건값도 깎지 않는다. 이날은 동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모여 마을의 안녕을 빌고 경건해진다. 구경을 하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정갈해지고 얼룩진 생활이 되지 않도록 마음의 걸레질도 한다.
어머니의 너그러움 품속처럼 우리 동네의 때묻은 삶도 세월이란 풍상에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신목(神木)인 우람한 느티나무.
마음 아픈 궂은 일도 이곳에 다리를 쭉 뻗고 낮으면, 그까짓 하찮은 일로 무에 그리 속을 태우느냐, 말없이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지는 듯하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왕매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심의 울분을 터트리는 것 같아 한껏 속이 시원하기도 했으니....
고등학교도 한반이고 동네 친구인 인숙이가 있었다. 어둠이 느티나무도 잠들게 하는 늦은 시간쯤 나무밑에 앉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갔다가 기관실에서 기계에 휘말려 시신으로 돌아왔다. 49제를 지내고 절에 안치했다. 저도 그절에 여승이 되겠다고 다짐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친구.
‘느티나무야’ 이럴 땐 친구에게 어떤 도움말을 해주어야 되겠니? 몇 번을 가슴으로 외쳐봤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나무밑에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면 신비스럽기도 하고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고 한 알의 밥톨처럼 작아진다. 이 느티나무도 뭉개버렸을지도 모를 한 톨의 보잘것없는 씨가 싹을 틔워 묘목이 되고 가뭄이나 태풍도 견디며 고달픈 세월을 넘기었으리라. 껍질이 쩍쩍 갈라지는 아픔도 침묵으로 풍파를 다 견디었겠지. 무성한 짙푸른 잎이 온종 하늘을 덮어 주듯 찾아오는 이들의 허물을 감싸주며 덮어준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보낼 때 그 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주지만 느티나무도 원목판이기에 훌륭한 장롱이 된다. 예전에 임금님은 괴목의 장롱만 사용했단다.
느티나무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잎파리의 초록물을 먹고 그늘의 시원한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자랐다. 그가 내뿜는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를 피부 깊숙히 내 몸안에 돌게 했으니 보호자요, 변함없는 연인임에 틀림없다. 물안개가 잠포록히 끼일 때 내가 아침 이슬처럼 홀연히 사라져도 묵묵히 버티며 이대로 우리 마을을 지킬게 아닌가. 신앙의 수호신 뿐만이 아니라 환경의 수호신 역할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이렇듯 나무는 나이가 들어야 더욱 볼품이 있어 고목이라고 부르며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면서까지 아끼고 사랑한다. 학덕이 높은 스님을 고승이라 부르며 존경한다. 세상에 전해지는 고승들은 대게 나이가 많은 노승들이다. 그들이 젊어서부터 학덕이 높은 것은 아니다. 수없는 죽비의 아픔도 참아내고 스스로의 채찍도 견디었으리라.
층계를 밞아 올라가듯 쉬임없는 각고의 시련과 고통의 수반위에 연륜을 쌓아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전신이 풀려 느슨하고 나태해지려 할 때 나를 키우며 삶을 다듬어주고 힘이 되어준 청정한 느티나무를 떠 올려본다. 내 친구는 초목마저도 숨죽이는 깊은 선방에서 높은 경지에 오르려 오늘도 숨가쁜 뜀박질을 하고 있는지?
동인지 11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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