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묘소에 가서야, 얼마 전 내 꿈의 의미를 알았다. 까만 비석 앞에 피어 있는 한무더기의 진노랑 금계국을 통해서였다.
꿈에선, 여러 명의 여자들과 어둑어둑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있어서, 어둠이 더 빨리 내리는 듯했다. 한참을 오르자, 나무들 사이로 산사의 처마가 언뜻언뜻 보였다. 이내 앞이 트이면서, 저만치 불이 밝혀진 석등(石燈)이 나타났다. 석등은 산사의 뜨락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석등이 눈에 띄는 순간, 여자들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앞에서 걷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것 때문에, 산을 오른 거였구나’.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침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석등에 제일 먼저 손이 닿았다. 오른 팔로 잽싸게 길쭉한 몸통을 잡아다녀 품에 안아 버렸다. 등 뒤에서 ‘놓쳤구나’. 하는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나마 석등을 차지하려는 손들이 내 어깨 너머로 가슴께로 덮쳐왔다.
그걸 뿌리치며 석등을 더욱 힘주어 끌어 안고 나서야, 그 안에 촛불이 켜져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뜨겁지 않은 게 이상했다. 위에 얹은 돌뚜껑과 기둥 사이의 몸통이 그리 쉽게 빠진 것도 신기했다. 게다가, 내가 해놓고도 나의 행동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평소에 무슨 물건을 놓고 남과 그악스럽게 다투어 본 적은 없었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부지게 손을 내밀어 차지할 만한 배짱이 없어서였다. 뭔가를 가지기 위해 악착스럽게 군 적이 없는데, 꿈 속에서 석등을 그렇게 차지했다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 불켜진 석등이 얼마나 탐났으면 그렇게까지 했나 하는 생각도 물론 들었다.
모양이 그려지는 석등이라면 부석사 무량수전 앞 뜨락에서 본 것뿐인데. 일주문에서 천왕문과 범종루와 음향각과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이 오르막이었으니, 그 기억이 꿈에서의 산길로 나타난 것일까.
그 석등은 연화무늬가 들어간 하대석 위에 기둥에 해당하는 간주석이 있고, 그 위에 또 연화무늬가 있는 상대석이 있었다. 사천왕상이 새겨진 팔각형의 화사석과 촛불을 켜서 넣는 화창으로 된 몸체가 그 위에 놓이고, 뚜껑에 해당하는 옥개석과 보주가 덮여 있었다.
석등은 어두운 금당의 뜰을 환하게 함과 동시에, 불상과 탑과 더불어 조형물로서의 역할도 한다. 또한, 정신의 불을 밝혀 어리석음을 몰아내고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부석사에 다녀올 무렵부터 벌써 이 년째, 글이 써지지 않아 바작바작 마르는 가슴이었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접고나서는, 이제 글쓰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조바심까지 겹쳐 감정의 연못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불켜진 석등을 끌어안는 꿈을 꾸게 했다면, 그건 좋은 예감이었다.
마석에 있는 모란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의 초대장을 받은 건,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뒤였다. 그걸 받고 먼저 떠올린 게, 그분이 누워 계시는 미술관 옆의 모란 공원이었다. 전시회에 가는 길에, 그분의 묘소에 먼저 들를 양으로 흰장미를 한다발 샀다. 칠팔 년만에 찿아가는 길이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물어서야 그분 앞에 섰다.
세로로 세워진 단촐한 비석에서 ‘약전(藥田)’이라는 그분의 호를 확인하는 순간, 눈물이 어려왔다. 그런 내 눈 앞을 환하게 하는 건 장명등(長明燈)의 불빛이 아니라, 비석 옆에 핀 금계국 한 무더기였다. 북아메리카 남부가 원산지로 마치 노랑 코스모스처럼 보이는 그 꽃은 꽃잎의 노란 빛이 얼마나 진한지, 초여름 오후의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도 등불을 연상시켰다.
장명등은 능묘 앞에 세우는 석등을 이르는 것으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의미가 담겨 있다. 구조 역시 받침대와 기둥과 촛불을 넣을 수 있는 몸체와 삿갓 모양의 뚜껑으로 되어 있다. 관가나 주택의 마당에 세우는 등도 때론 그렇게 불렀다. 조선 시대 분묘의 장명등은 돌아간 이의 신분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일품(一品)이상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에게만 세울 수 있었다.
대학 강단에 선 것만 사십 년이 넘는 원로 사학자였던 그분이야말로 - 신사참배 거부로 교직에서 해임되기도 하고, 바른 소리를 하는 교수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으면서도 양심의 소리를 멈추지 않았던 지식인이었으니 - 정신의 품계로라면 일품이 되고도 남았으련만. 벼슬을 한 사람에게만 세운다는 갓을 씌운 비석은 두고라도, 노랗게 핀 금계국 한무리가 장명등을 대신하고 있는 거였다.
“살아계실 때도 대쪽같은 성정이시더니, 돌아가신 뒤 역시 허세로 보일 만한 것은 허락을 아니 하시는구나.”
대학교 삼 학년 때 ‘서양사상사’ 강의를 들은 뒤로, 그분은 내게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해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나가겠다고 했을 땐, 매우 아쉬워하셨다. 그래도 학자가 될 성향이 있다 했더니, 공부가 하기 싫구나 하며 역정을 내기까지 하셨다.
그때 난, 학문 대신 좋은 글을 쓰는 데 전념하겠다고 다짐드렸었다. 그게 벌써 이십여 년 전이고, 그분이 가신 지도 십오 년인데, 과연 그 약속을 지켰나 하는 자책감이 인다. 지금 내게 ‘그래, 얼마나 좋은 글을 많이 썼나?’ 하고 물으신다면, 무어라 대답드릴 수 있을지. 그 속에서 문득 생경한 생각이 스쳐간다.
나로 하여금 산사의 불켜진 석등을 가지게 한 건, 생사의 경계를 잠시 넘어온 그분의 안타까운 손길이 아니었을까. 살아계실 때도 부족한 나를 아끼셨으니, 꿈에서나마 그 석등을 차지하게 하심으로써 어둠이 깔린 내 마음의 뜨락을 밝히려 하셨는지 모른다.
“맥빠져 있지만 말고, 정신의 일품에 도달할 생각을 품어라. 그래야 훗날 외양뿐인 장명등 대신, 꽃수필 내내 써온 사람답게 저 노란 꽃으로 안식처를 밝힐 수 있지 않겠나.”
내 발걸음이 아직은 이승에 머물러 있으니, 그 북돋움의 말씀이 장명등이 아닌 석등의 모양새로 안겨온 것이었나보다.
 이종옥(jongoklee39):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꽃을 소제로 주로 쓰신다니 더욱 반가워요^*^저는 등단 한지는 일년 밖에는 않되었지만 꽃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많은 늦각기의 글 향기속에서 삶을 보태고자 시작을 했어요 앞으로 많은 도움을 부탁드려요...뵙고 싶습니다.....~^*^~ -[07/15-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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