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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정원 |
날짜 : 03-11-25 22:50
조회 :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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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 반지를 낀 내가 혜담 스님 일에 적극적인 걸 보고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부터가 궁금한 모양이다.
이년 반 전 그날이 오월 넷째 주 토요일인 것만은 확실하다. 문예반을 데리고 인사동으로 전일제 특활을 하러 갔었다. 팔 월 말에 퇴직을 앞두고 있던 터라, 내게는 마지막 야외 수업이었다. 삼십명쯤 되는 학생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찾집 이름을 둘러보게 할 예정이었다.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골라 이유를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분과의 만남이 이미 그 전날부터 예고되어 있었다는 걸, 그 날에야 알았다. 신문 문화면에서 고려 불화를 재창현한다는 스님의 기사가 실렸는데 마음이 끌렸다.
“본인이 토굴에서 수행 정진하던 어느 날 새벽, 관세음 보살님을 친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어 고려 불화 재현 작업에 몰입한 지 어언 이십 년입니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꼬박 작업해도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7～8 개월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수전증으로 인해 떨리는 손으로도 그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것도, 고려 시대 화승들의 혼이 내 안에 살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함께 실린 사진으로 보아서는 비구 스님인지 비구니 스님인지 구분이 안 갔다. 계태사라는 절도 이름으로 보아 충청도 어느 산골쯤 있을 듯해, 만나뵙기는 힘들겠구나 하고 말았다.
문예반을 데리고 인사동에 갔을 때는 비가 내렸다. 공사중이라 포크레인이 오고가고 길까지 질척거려 도저히 학생들을 풀어 놓을 수가 없었다. 찻집 이름 찾기고 뭐고 다 접어둔 채, 경복궁 민속 박물관에나 들여보낼 요량으로 안국동 쪽으로 데리고 갔다. 육교를 건너다 보니, 백상 기념관 벽에 걸린 프랭카드가 눈에 들어 왔다. 바로 그 스님의 전시회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우리 저 곳부터 관람하자며 들어간 일 이층 전시실엔, 상당히 큰 아미타좌불도며 아미타삼존도며 미륵 하생경 변상도며 수월관음도 등이 걸려 있었다. 비단에 채색을 하고 금가루를 개어 일일이 문양을 그려 넣었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층 전시실에서 마주친 스님의 모습은 예상과는 달랐다. 풀먹인 먹물빛 삼베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해 보이는 몸체 였다. 뺨 또한 발그레해서 소녀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합장을 하며 ‘어서오십시오.’ 하고 입을 열자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삭발은 했지만 흰머리의 언뜻언뜻 보임과 거칠고 굵은 목소리가 주는 힘이 정진한 세월을 가늠케 했다.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 시대에 그려진 불화는 왕족과 귀족들의 생활상이 담겨있어 화려하고 위풍당당합니다. 여러 화공들이 창출해낸 구도와 인물배치, 색감과 문양들은 감탄을 금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문화 유산을 지키지 못해 100여점 남아있는 원화들이 대부분 남의 나라로 유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는 대할 수 없다는 것이 참을 수 없어서, 이 빈승이 재창현 작업에 매달린 것입니다.’
가슴이 떨리도록 매료된 것은 정작 나여서, 학생들을 경복궁에서 돌려보낸 후,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학교를 나온 후, 의외로 수원에 있어 찾아가기가 용이했던 그 절에 가서 기어이 제 23 천성 존자를 그린 오백나한도 한 점을 모셔왔다.
스님이 신도 한분과 와서 직접 내 방에 걸어주고 가신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주황빛이 전체에 깔려 붉은 노을을 연상시킨다. 황천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에 다리를 쉴 겸 바위에 걸터 앉은 나한님 앞에는 합장을 하고 선 동자가 있다. ‘깨달음을 주고 가소서.’ 하는 표정이다. 걸터앉은 나한님의 얼굴이 스님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내가 그 동자가 된 듯한 착각까지 든다.
어떤 때는 화면 전체가 동자꽃 만발한 들판으로 보일 때도 있다. 여름에 우리나라 산지에 피는 동자꽃은 끝이 갈라진 다섯장의 주황빛 꽃잎이 주는 색감이 아주 강하다. 스님께서도, 이건 내가 힘이 넘칠 때 그려진 거라고 하신다. 여러 점의 불화 중에서 유독 내가 마음을 빼앗긴 이유도, 스님의 개인적인 예술혼이 짙게 깔려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회갑을 바라보는 연세임에도 스님을 뵈면, 그 표정이나 몸놀림이 얼마나 천진 스러운지 동자승을 보는 듯하다. 옛날 노스님과 살던 동자가, 스님의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못오자 혼자 떨다가 죽었다. 그 동자의 무덤에 난 풀에서 핀 꽃이 동자의 뺨처럼 붉어 동자꽃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동자가 고려 화승으로 다시 나고, 또 혜담 스님의 혼이 되어 저 동자꽃 빛깔의 나한도를 완성시킨 건 아닐까. 그 후 난, 부산서 열리는 스님 전시회에 가서도 안내를 했다. 지난 봄에 열린 ‘고려 불화 특별전’ 에는 아예 큐레이터 역할을 맡아 보름간을 오가며 스님께 들은 대로 관람객들에게 설명을 했다.
간혹 내 손가락에서 묵주 반지를 발견한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쳐다보곤 했다. 그러면, 난 그 날 인사동을 거쳐 안국동에서 맺어진 인연을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이종옥(jongoklee39): 불교에도 조회가 깊으시고 그림 또한 취향이 깊으시네요, 팔방미인이시조.아름답고 후륭한 글 잘보고 느끼고 갑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행복한 하루 되세요~^*^~ -[07/15-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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