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이 또 한 번 마침표를 찍었다.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만 생활한 지 꼭 일 년. 스스로 이름 붙인 안식년의 마지막 문장도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야 비로소, 수련을 닮는구나.”
교단을 내려서면, 물 속도 물 밖도 아닌 수면에 이파리를 펼치는 수련처럼 편안한 마음이 될 줄 알았다. 수면에 떠서 핀 흰 꽃송이라도 당장 가슴의 연못에서 보게 될 줄 믿었다.
이삼 년 전부터, 절여지지 않은 언어로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생각에 수업을 하다가도 멈춘 적이 더러 있었다. 자연스레 벋기를 원하는 감정의 넝쿨들을, 교사라는 위치가 주는 부담감의 가위로 더는 잘라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여인이 되겠노라는 인사말로 학교를 물러 나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교사라는 이름을 벗고나서야 알게 됐다.
이십여 년 동안, 교단의 높이 만큼 올라서서 주변을 내려다보고 살았다는 사실을. 꼭 그 높이 만큼의 오만함으로 내가 맡은 학생들과 그 부모들을 대했었다는 것을.
언어를 다룬다는 사람이 그간에 써온 말들은 또 얼마나 거칠고 위협적인 것이었는지. 나보다 키가 큰 남학생을 다루느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 외에는 갖다 댈 것도 없었다.
그 차가운 인식들이 허리에 매단 납덩이가 되어, 남보다 조금은 돋보이는 모습으로 살아 왔다는 자긍심마저 물 속으로 끌어내렸다.
차라리 한 해를 놓고 쉰다는 쪽으로 마음먹으니 편했다. 아직도 시계를 보면 몇 교시가 끝났겠구나 할 정도로 몸에 배인 일관데, 그만큼의 시간은 반대로 써야 풀려나지 않겠나 싶었다.
그러면서 겨울을 보내고 난 삼월의 어느 날. 불현듯 그곳이 떠오른 건, 거기에 수련이 피는 연못이 있어서였을까. 초여름이면 바닥에 깔린 그 흙에선 여러 가닥의 줄기가 나와 녹빛 이파리를 수면에 띄우곤 했다.
여러 등분한 원의 한 조각이 살짝 빠진 채 생겨난 듯한 말발굽 모양의 윤기 나는 이파리들 사이에선, 꽃잎이 겹겹이 붙은 흰 봉오리가 올라와 살그머니 벌어졌다. 노란 꽃밥을 가슴 한가운데 안고 피어나는 수련이었다.
그 꽃이, 물 위로 이파리와 꽃대를 내밀어 피는 연꽃과 다르다는 걸 가르쳐준 이는 머리 희끗희끗한 국어 선생님이었다. 저녁이 되면 잎을 오므려 잠을 자는 꽃이기에, 수련(水蓮)이 아닌 수련(睡蓮)이라고 한다는 걸 일러준 이 또한 그분이었다.
고운 자태이기는 해도 가까스로 턱을 물낯에 대고 피어난 것처럼 숨가빠 보이는 그 꽃이, 단발머리인 내게는 탐탁지 않았었다. 거기다, 물 속도 물 밖도 아닌 수련의 그 치우치지 않은 자리정함에 평상심(平常心)이란 의미까지 부여하는 데는 답답함마저 느껴졌다.
“평상심이란 무엇을 꽉 끄러 쥐고 있지도, 탁 놓아버리지도 않은 보통 때 마음이 다. 점심녘에 꽃잎을 펼쳤다가 어둑어둑해지면 하루를 접는 수련은 낮과 밤의 이 치 또한 몸에 익힌 꽃인지 모른다.”
평상시나 평소나 평일에 담긴 따분한 느낌보다는, 일탈이나 파격이 지닌 색다른 느낌 쪽에 마음이 쏠리던 게 그 무렵의 나였는데. 마흔의 중간에선 나이가 되고 나니, 수련에 대한 눈이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물 위에 올라선 자세로만 살다가 오히려 물 아래로 내려가 버린 양이 된 내게, 노선생님이 일러주던 평상심의 의미는 더할 나위 없는 경계였다. 일전에, 물 밖에서 피는 꽃과 물 속에서 피는 꽃에 대한 집착을 다 버릴 때도 그것이 경계가 됐었다.
산에 오르면서는 뭍에서 피는 꽃에만 지나치게 매료되어 있었고, 바다에 뛰어 들면서는 바다 맨드라미라는 물꽃 - 연산호만이 최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듯이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등산을 할 여건도 스쿠버 다이빙을 할 여건도 모두 잃게 되자, 뭍꽃과 물꽃에 대한 애착 또한 거둘 수밖에 없었다. 내 어리석음의 소치가 부끄러워 꺾어진 목을 하고 다니다가, 다시금 고개를 든 날. 물 밖도 물 속도 아닌 물의 표면에 일상의 꽃이 피어나 있음을 보고는 놀랐다.
이번 역시 한시라도 빨리 그런 평정에 이르고 싶은 마음에, 사월 들자마자 수련을 구하러 꽃시장엘 갔다. 수련이 피는 연못을 만들 만한 뜨락은 없으니, 둥글넓적하고 입이 벌어진 자배기에 진흙을 퍼담고 애기수련이나마 키워볼까 해서였다.
황해도 장산곶에서 나는 꼬마수련을 따로이 각시수련, 또는 애기수련이라 한다고 들었는데, 꽃시장에 딱 한군데 나온 작은 이파리의 수련이 그것인지는 몰라도 자배기에 키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심을 때 줄기에 매달려 있던 꽃봉오리 몇 개는 동전보다 좀 큰 얼굴을 며칠 폈다 오므렸다 하다가 져버렸다. 하지만, 앞면은 녹빛이고 뒷면은 자줏빛인 이파리는 연이어 물 속 줄기에서 나와 그 반들반들한 손바닥을 폈다. 나올 때는 손가락을 오므린 모양으로 잠깐 물밖에 솟았다가도, 금세 그 줄기를 늘어뜨리며 수면을 향했다.
자배기 수련을 들여다보며, 지나친 당당함도 움츠러듦도 아닌 평상심을 배우려 애쓰다 보니 어느새 팔월의 끝이다. 더는 물 밖과 물 속을 들락거리지 않고 물낯에 마음을 띄울 자신이 생겨, ‘감히 수련을 닮게 됐다.’ 고 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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