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을 안은 채 2001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초저녁부터 흩날리던 눈발이 점점 굵어지더니 삽시간에 은세계로 변한다. 눈길이 자꾸만 창 밖으로 쏠린다. 이제 그만 내렸으면…….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가 있다. 연례행사로 다섯 개의 성가대가 차례로 주관하는 행사이다. 작년에도 교회를 가득 채운 성도들과 함께 이 예배를 드렸다. 좋은 날씨 탓도 있었지만 주변의 행사가 뜻밖에 빛을 더해 주었다. 새 천년을 여는 축하행사가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에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운집한 인파와 울려 퍼지는 음악이 하나로 어울리는 열기였다. 우리의 예배도 그 일환인 것처럼 느껴졌다. T.V는 새 세기를 맞는 여러 나라의 축하행사를 줄곧 띄우고 있었다. 예배와 새해인사를 마치고 나는 넘치는 인파 속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올해의 송구영신예배는 나로선 2년째 성가대 대장으로서 이 예배와 인연을 갖게 되었지만 나로선 시무장로서의 끝맺음을 하는 공식 행사이기도 한 것이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떨어지는 기온에 쌓인 눈이 꽁꽁 얼어붙었다. 방배역에서 우면산 순환 도로까지의 상. 하행 3차선 도로는 급 경사진 도로이다. 눈길에 오가는 차들의 움직임이 힘겹게 보인다. 오르지 못해 삐걱거리는 차,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차, 좌우로 미끄러진 차들이 즐비하다. 종무식이 끝난 탓인지 관계 공무원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택시도 버스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도로는 어느새 거북이 걸음의 승용차로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마침 둘째아들 내외가 연말을 같이 보내기 위해 미국에서 와 있었다. 늦으면 안 된다며 남편이 서둘렀다. 지하철이 새벽 2시까지 연장 운행된다고 했다. 승용차를 세워두고 지하철로 가는데는 이견이 없었다.

두꺼운 코트에 미끄럽지 않은 부스로 중무장을 하고 우리는 집을 나섰다. 순환도로에 인접해 있는 우리 집에서 방배역에 이르는 경사진 얼음판 길은 우리를 무척 어렵게 했다. 운 좋게 택시를 만났다. 기사는 집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방배역 까지만 이라도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도보로 7분 거리를 30분이나 달달거렸다.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광화문 역에 내리고 보니 교회까지의 얼음판 길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아들의 큰 손 이 나를 꽉 붙잡고 있었다. 밤 10시 45분! 늦지 않게 왔다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일기가 불순한데도 많은 교우들이 아래위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순서에 따라 대표기도를 드렸다. 정성껏 준비된 '새로핌' 성가대의 찬양, 이수영 목사님의 감격적인 메시지, 새해를 맞은 환희, 성도의 교제, 강단 위에서 포옹, 은퇴를 앞둔 나로서는 순서 하나 하나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게되었다. 예배가 끝나고 서로 서로의 축복을 기원하며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발길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전동차를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였다. 연장 운행 이여서 더디 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윽고 방배역 출구로 나왔다. 경사진 오르막 얼음판 길, 아들의 따뜻한 손이 다시 내 손을 이끌어주었다. 어머니를 향한 마음씀씀이가 미덥고 포근하다. 아버지는 가끔 뒤돌아보며 앞장서 올라간다. 며느리도 아들 곁을 지키며 걷는다. 아무도 말이 없다. 일사불란하게 발만 내려다보며 발자국에 녹은 눈길을 철벅철벅 걸어올라 갔다. 미끄러지지도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얼마만의 손잡기였나? 아들의 체온을 느끼며 상념에 젖어본다. 딸이 없는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 집안 친척들도 늦둥이를 향한 사랑이 남달랐다. 형과 사촌들끼리 어울리게 되면 어느새 말이 통하지 않는 작은 폭군 (Innocent creature). 못 말리는 응석받이가 되어버렸다. 잘 넘어져서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 소지품 관리가 엉성해서 스쿨버스에 가방을 두고 내릴 때도 많았다. 고등학생 시절, 남산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옷을 벗어두고 매점에 다녀온 사이 주민등록증, 학생증, 지폐가 들어있는 지갑을 몽땅 도둑 맞고도, 집에 돌아와서야 알게된 일, 경기고 재학시절, 생활관 2층 침대에서 내려오다 천장에 머리를 찌어 병원에서 세 바늘이나 꿰매고, 3박4일의 생활관 교육이 끝나는 날에야 이를 담임선생에게서 전해 듣고 놀라워했던 일, 애처로운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었지.

4주간의 방위훈련, 해외 언어연수, 등으로 집을 비웠을 때의 허전함, 어느새 자라버렸구나 하는 대견스러움에 흐뭇해하면서도 나의 전부를 차지해버린 아들의 존재를 실감했다.

유독 땀을 많이 흘려서 손을 잡으면 금새 땀 범벅이 되곤 했다. 성장하면서 없어진 증상이었지만 다한증 수술을 생각 해보기도 했었다. 모자가 손잡고 나란히 걷고있는 것을 바라보며 며느리 될 아가씨가 “마마보이?” 하고 질문했던 손, 결혼해서 미국 유학을 보내놓고 둥지를 떠난 아들내외를 그리며 눈물을 삼켰던 나날들, 삶이란 다 그런 것이려니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어리게만 느껴지던 아들의 늠름함이 지금 나를 감싸주고 있다. 든든하고 큰 의지가 되어주고 있다. 넘어질세라 챙겨주는 효성스런 아들이 더 없이 고맙고 눈물겨웠다.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희열과 가슴 뿌듯함에 의욕이 솟구쳤다. 북받치는 마음을 달래며“수고하였다” 등을 두드리며 안아주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2002년 새벽 2시, 모자지간의 정겨운 다섯 시간 반의 빙판 길 여정이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새해의 서기(瑞氣)가 아들의 손을 타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2001.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