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다. 갈 길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저 발길이 머무는 대로 걸음을 옮겨 놓고 있을 뿐이다.
하늘은 파랗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기만 한 창공이다.
말끔히 닦아낸 유리거울처럼 해맑은 하늘에 떠 있는 실날 같은 구름 한 점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나도 저 구름처럼 허공을 맴돌다 아무런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런가?

길은 오솔길이다. 게다가 군데군데 돌이 솟고, 바닥이 패인 울퉁불퉁한 시골의 산길이다.
원래 땅 위에 길이란 없었을 것이다. 걸어 다니는 사람의 무리가 하나 둘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뚫렸을 산길, 들길, 오솔길…… 비바람과 눈보라, 청운의 푸른 꿈과 오색 무지개, 가슴 벅찬 환희와 피맺힌 사연으로 얽히고 설킨 인생행로. 그곳에 숙명 같은 고생살이로 백발만 성성하던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를 연상케 하는 띠풀이 엉성한 뿌리를 드러낸 채 끈질긴 목숨을 겨우 연명해가고 있다.

맨 처음 길을 걷던 사람이 혼자였듯이 나 또한 그렇게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타인과 함께 영원히 같이 걸을 수 있는 길이란 애당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대낮인데도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도 산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이 마냥 아늑한 느낌이다. 푹신푹신한 소파에 앉았을 때처럼 사뭇 편한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산은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두 세계를 반반씩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산은 어떤 험악한 곳에서도 서로의 손을 붙들고, 이끌어주며 마음을 털어놓기가 편한 것일까. 아니면 숭고한 적막으로 세속에 물든 인간의 잡다한 번죄를 한꺼번에 빨아들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산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대사원이다. 자연이 신에게 공양하는 지선극미(至善極美)의 진수성찬이 바로 산이다. 그래서 참된 종교적 깨달음은 거의 산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들판이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승려나 목사의 생활이 아무리 청빈하고 겸손할지라도 산에서 사는 산인[仙]의 경지를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산 속 길을 나는 걷고 있다. 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렇다고 일부러 거드름을 피울 까닭은 더더욱 없다. 마냥 느긋한 심정으로 내 앞에 펼쳐진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만끽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그것으로 선경의 별천지인 것이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결에 묻어온 초목의 향기가 황홀할 지경으로 감미롭기만 하다. 바람이 스쳐간 자리에 도르르 말린 고사리의 새순이 움트고, 피다가 멈춘 꽃잎이 조용히 나래를 펼친다.
산울림처럼 간간이 들려오는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등뒤로 하고 언덕을 내려서니 마을로 통하는 신작로가 벌렁 드러누운 채 나를 맞이했다.
길섶의 찔레꽃이 하얗게 만발해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일제히 일어선 보리고개들이 나를 보고는 한꺼번에 목례를 해댔다.

살구, 개나리, 진달래, 복사꽃이 어우러져 피고 지는 돌각담 길을 나는 걷고 있다. 노란 장다리꽃이 만발해 채마밭에 하얀 나비 한 쌍이 날아와 포르르 날개를 접었다.
해마다 피는 꽃은 작년의 그 꽃이건만 매년 맞이하는 봄은 이미 작년의 것이 아니다. 새 봄인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초로의 사나이에게도 새 봄이 찾아온다는 것은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 어귀다. 가까운 곳에 초가 한 채가 보인다.
빗자루 자국이 곱게 나있는 그 초가에는 흔히 있을 법한 사립문조차 없었다. 손바닥만한 마당을 가로지르면 곧장 방으로 통하는 댓돌이다. 댓돌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남자와 여자의 신발이 한없이 정다워 보였다. 방문을 살며시 열기라도 하면 그 신발의 주인공들 또한 그렇게 누워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집에 들러 냉수 한 대접 청하여 마시고 싶기도 했으나 다정하게 놓여진 남편과 아내의 신발을 잠시라도 떼어놓고 싶지가 않았다. 마냥 한적한 시골길을 나 혼자 걷는 것만으로도 내게 필요한 편안한 휴식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을로 들어서 얼마를 걸으니 샘터였다. 나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맑은 물이 철철 흘러 넘치고 있었다. 투명한 수정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였다. 물 속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그 속에 파란 하늘이 둥실 떠 있고, 하늘 속에 샘물이 흐르고, 샘물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이 투영되어 있었다.

처녀의 유방보다도 더 그윽한 샘― 그 샘터에 모여 앉아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빨래를 하던 먼 옛날의 아가씨들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세속에 물들고 인정에 빛 바랜 가슴을 세탁하기에 여념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주막으로 향했다.
주막에는 촌로 몇 명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흘러가 버린 세월이라는 연륜의 크기만큼 깊게 파인 주름살이 호두껍데기를 방불케 하는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못생겼지만 모두가 흠잡을 데 없이 소박해 보였다.

"지나던 길에 목이 컬컬해서 들렀습니다만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 우리야 뭐―."
굳이 사양을 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잔을 든 갈퀴발 같은 손가락은 나의 가슴팍에 와 있다. 잔에 술을 따르자, 노인들은 시퍼러등등한 혈관을 꿈틀거리며 벌컥벌컥 잘도 마셔댔다.
"한 잔 더 하시죠."
"과할텐디―."
하면서도 술잔을 사양하는 일이란 결코 없었다.
"한 잔만 더 하시겠습니까?"
"이제 슬슬 취하는디유―."

눈꼽이 잔뜩 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잃어버린 정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가뭄 끝에 비를 맞은 초목처럼 활기차 보였다.
"딱 한 잔만……."
"고만 마셔야 하는디유―."
늙은 사람만큼 남은 생애에 대하여 집요하게 애착을 느끼는 사람을 없으리라. 또한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한 잔만 더……."
"고만 집에 가봐야 쓰것는디―."

나도 돌아가야겠다. 그러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무 데로나 가자.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란 이미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만 새로운 길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나는 또 새로운 길을 찾아 거닐며 좀더 흡족한 후회와 방황을 해야겠다.
나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