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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해의 노을

에게 해에 내려앉는 석양이 보고 싶어 지중해에 갔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에 와서 일몰 타령이라니... 룸 메이트는 어이없다는 듯, 일몰은 우리나라의 서해에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여행 일정에 밀려 일몰 현상은 보기 힘들었다. 그러던 에게 해의 석양을 본 것은 그리스와 터키 여행을 마치고 이스탄불에서 이집트의 카이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여행중의 여독으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툭 치며 창 밖을 내다보라 한다.
아! 거기 에게 해에 내려앉는 눈부신 석양의 광채가 마치 붉은 꽃잎이 물에 녹아 내리듯, 그렇게 그림처럼 떠 있질 않는가. 도도하고 당당한 빛의 위세가 천지간을 물들이며 온 세상을 끌어안고 있었다. 노을의 붉은 빛이 하늘 가득히 퍼져 에게 해의 짙푸른 바다 빛은 고대로부터 읊어졌던 '반짝이는 포도주 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현란함 앞에 모든 것이 침묵한다. 나도 이미 그 품에 안겨 전율할 만큼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가슴에 물결치는 감동도 2, 3분간의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태양의 몸체는 이내 바닷물 속으로 잠겨 들고 노을이 긴 꼬리를 감추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나마 잠을 깨워 석양을 보게 해 준 옆 사람이 고맙기도 했고, 좀더 빨리 일러주지 않고 혼자서 일몰 광경에 빠져 있던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서해에서 보았던 석양의 광채는 내가 받은 최초의 충격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여름방학이면 부모님이 계신 서해로 내려가 일몰 현상에 넋을 놓았었다. 그 후 석양은 내 잠재 의식 속에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결혼 후 한동안 그 그리움을 떨쳐 버리려 했지만 그리움은 그대로 살붙이처럼 남아 있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서해는 이미 타관이 되었지만, 어린 날의 추억이 서려 있는 서해 바닷가를 몇 번인가 찾은 적이 있다. 그러나 하루 해 안에 돌아오는 일정으로는 석양을 볼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도 일몰 광경은 볼 수 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돔 지붕 너머로 내려앉는 저녁 노을에서도 그 어떤 우수와 아름다운 감동을 느낄 수 있고, 수평선을 그으며 쭉 뻗어 나간 자유로 저편에도 석양의 광채는 황홀한 무늬로 그려진다. 하지만 석양의 노을은 역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룰 수 있다. 또다시 석양을 보기 위해 모세의 기적마냥 하루에 두 번 바닷길이 열리는 제부도에 가 보았지만, 날씨 관계로 강렬한 빛을 마음에 담아 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석양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까닭이었을까. 사람들은 석양을 보며 인생의 노년을 연상하는데, 내게는 그런 석양이 희망으로 상징되었다.
석양은 지는 해가 아니었다.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지평선에 내려앉는 석양의 광채를 보며, 어린 마음에도 바닷속으로 스며들어 지구를 회전하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태양은 만고에 변함없는 진리라 생각했다. 그것은 하루를 열심히 빛내고 조용히 쉼터를 찾는 안식의 그림자요, 스러지는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탄생을 준비하는 예비의 빛이라 생각하였다.
지중해에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중년이 되고 나서였지만, 영화의 '지중해'를 보고 난 후 더욱 마음이 이끌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태리 병사 십여 명이 파병 되어 간, 지중해 에게 해에서 가장 멀고도 작은 미기스타 섬. 그곳에서 병사들은 통신 두절로 3년간 고립된 생활을 한다. 그들은 세상과 두절된 망각의 섬에서 기다리는 걸 배우며, 아름다운 지중해 풍광과 순박한 마을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이런 시대에 살아 남아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도피뿐'이라는 도입부의 자막처럼, 그 작은 섬은 그들이 꿈을 꿀 수 있는 도피처가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한 병사는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얻은 병사는 처음으로 '산다는 게 실감난다'며, 그대로 남아 있고, '노을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자와 보고싶다'던 병사와 성당의 벽화를 그리던 중위는 노년이 되어 다시 그 섬으로 돌아온다.
영화 속에서 평화스러움의 절정을 이루는 것은 바닷가의 황혼을 배경으로 두 병사와 마을 처녀가 함께 어우러져 춤추는 장면이었다.
삶의 무게가 힘겹게 느껴질 때, 나는 마음의 도피처로 이태리 병사와 마을 처녀가 노을을 배경으로 춤추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쯤 그곳에 가 보리라 마음먹었다.
지중해 여행을 계획한 것은, 현대 속에 고대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는 신화의 나라 그리스의 이름없는 마을에 가 보고 싶은 까닭도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신비라 일컫는 작열하는 태양을 느끼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은연중 마음 속에 자리 잡혀 있는 노을 속의 평화로움 때문이었다.
나는 일몰 속에서 평화를 느끼고 있지만 남편은 사후 세계에서 평화를 찾는 것 같았다. 언젠가 남편은 관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특별 분양하는 묏자리를 신청하고 왔다. 결과는 낙첨되었지만, 재분양의 기회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광릉 내에는 시댁의 선산이 있고, 사후에는 우리 부부도 선산 한귀퉁이에 누울 수 있겠지만, 우리 부부는 선산쪽보다는 새로 분양하는 묘지에 묻히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왜 그토록 석양에 집착하고 노을을 찾아 헤메었던 가를... 그것은 나의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다닌 행위였다는 것을 이제사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이 세상 생을 마감하는 날, 사후의 세계는 바다에 묻히고 싶다. 바닷물에 섞여 수평선에 닿으면, 나는 그의 넉넉한 품에 안기리라. 그리고 저녁 노을의 그 찬란함을 만끽하리라. ( 1998. 월간문학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