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가뭄 끝에 비가 내린다. 오래간만에 내리는 단비라 하겠다. 메말라가던 은행나무도 활기를 찾는다. 비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의 물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단비와 생명의 물이 모여서 큰 강을 이룬다.

사람은 태언 날 때와 죽을 때 강을 건너 왔다가 강을 건너간다고 한다. 그 말의 뜻은 어머니 모태인 양수도 물이고 보면 죽어서 강을 건넌다는 것은 즉, 태어난 고향인 물로 돌아간다는 뜻일 것이라고 한다.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도 강 유역이니 강은 생명의 근원지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문명의 시초인 강이 때로는 영토 분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삼국사기의 온달 이야기는 강을 중심으로 한 영토 회복에 나선 온달이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강을 건너는 도중에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그 후 고구려 때에는 두만강을 북쪽으로 여진족이 있었고, 서북쪽 압록강 건너에는 거란족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도강록에 보면 영토 확장을 위해 패수(浿水) 사건이 벌어지는 기록이 남아 있다. 패수사건이란, 평양성이라는 지명이 중국의 요동땅 평양이라는 설과, 한반도의 평양이라는 설이 있는데, 우리나라 선비들이 사기를 확실히 기록하지 않아 생긴 사건이었다. 요동에서는 한반도의 평양 주위를 흐르는 강이 패수라 주장을 했고, 한반도에서는 요동 땅의 평양성 주위를 흐르는 강이 패수라서 요동 땅도 고구려 땅이라고 주장을 했다. 결국 자료가 확실한 중국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쪽은 고구려가 되는데 그 때문에 한반도의 영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게 된 셈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영토 확장 차원의 싸움이 아닌 강줄기 하나가 민족의 사활을 건 싸움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작은 국토지만 강을 사이에 두고 지방 경계가 그어지고 문화와 풍습의 차이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올 여름 중국에 있는 두만강에 갔을 때였다. 강을 경계로 문화와 풍습은 물론 이념까지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백두산 등정을 마치고 두만강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원로가수가 불렀던<눈물 젖은 두만강>의 노랫말을 떠올리며 푸는 물과 전원 풍경을 연상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노랫말처럼 노를 젓는 뱃사공이나 낚시하는 강태공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강 건너편 북녘 땅에는 인민 복장을 한 보초병인 듯, 총을 메고 군데군데 숨어 있는 모습을 망원경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두만강을 헤엄쳐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사람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 잠복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북에 가족이나 친척은 없지만 목숨을 걸고 넘어 오려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니가슴이 저려 왔다. 어쩌면 두만강은 슬픈 운명을 안고 생겨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에 쫓겨, 우리 독립군들이 굶주림을 참고 울분을 삼키며, 이 강을 건너 조국을 등진 곳이기도 하다. 민족의 슬픈 애환이 서려 있어서일까, 지금 두만강은 푸른 물이 아닌 검붉은 물이 흐르고 있다.

두만강을 다녀 온 후 나는 가끔 가까운 한강을 찾아 산책을 해보곤 한다. 서울의 젖줄인 한강을 옛날에는 아리수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강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한강에도 슬픔과 영광이 함께 하고 있다.

한강 인도교는 6․25때 북한 공산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적군이 아닌 우리군의 손으로 폭파시킨 아픔도 있다. 강은 우리 민족에게 낭만보다는 한과 슬픈 역사로 기억되는 것이 더 많다. 그러나 88올림픽을 치르며 한강은 슬픈 역사를 씻어 내고. 서울의 강이 아닌 세계의 강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오색 불을 내뿜으며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향하는 거북선에는 올림픽 성화와 함께 용고를 울리는 늠름한 수군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기상과 저력을 볼 수 있었다.

철새 도래지로 변한 한강에 있는 밤섬은 마포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밤알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밤섬 주변의 길고 깨끗한 백사장은 서호 팔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 남녀 관계에 엄격하던 조선시대의 체계 속에서 그나마 밤섬만은 자유분방한 예외지대였다고 한다. 이 섬의 남녀는 서로 업고 업히며 정답게 강을 건너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았었다. 동성동본. 반상을 따지지 않고 짝을 지었다는 기록도 조선조 명종실록에 남아 있다. 또 밤섬 한복판에는 암수 은행나무 고목이 있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고려 때 충신 김주가 심었다고 하는데 그 뒤 ‘금슬목’으로 이름나 사랑하고 싶은 남녀가 와서 빌면 소원이 성취되고, 불화한 부부들이 와서 빌면 화목해진다고 해서, 성안의 기도꾼들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믿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금슬목 밑에 찾아가 두만강가에서 보았던 민족의 아픔을 씻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싶다.

그래서 통일이 되어 서로 오가며 북녘 사람들은 한강변에서, 우리는 두만강변에서 산책하는 걸음걸이가, 저 한강 위를 평화롭게 나는 철새 같이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겨레의 ‘금슬목’을 사람마다 가슴에 키워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