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4.2.20 (금) /고전의 바다

性情의 실험

삼남(三南)을 가로지른 소백산맥 줄기가 지리산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뭔가 아쉬워 남동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어 당도한 바닷가에 통영(統營)이 있다. 수많은 섬들과 점점이 어울리는 바다를 언제라도 허락할 듯 통영은 바다로 내달리고 바다는 통영에 안긴다.

통영 사람들은 등줄기를 부드럽게 낮춘 산맥이 바다와 만나는 접경에서 산다. 그래서 통영 사람들은 바다와 산맥이 부여하는 두 가지 성정(性情)을 동시에 가졌다. 포구에 인접한 저자거리에는 철 따라 바뀌는 갖은 젓갈과 산나물로 뒤범벅된 냄새가 사람들을 홀린다.

뭍사람과 배꾼이 어울리고, 오동나무 장롱에 전복껍질이 들어와 박혀 그 유명한 통영산 자개장이 된다. 정교한 손재주에 자존심을 걸고 사는 소목쟁이들, 바다어장을 가꾸는 젓꾼들, 배타기 전에 반드시 술에 취하는 배꾼들, 지식인과 일본 유학생, 멀리 고성평야에 땅마지기를 가진 지주들, 그리고 흥망을 거듭해온 그들의 후손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 통영이다.

밤이 되면, 야광충으로 번득이는 바다에 대꾸라도 하듯 통영의 시가지는 크고 작은 불빛을 점등한다. 그런데 시가지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 간창골의 ‘김약국’ 폐가(廢家)에는 불빛이 비치지 않는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배기에 오랫동안 버려진 흉가에도 불빛이 사라진 지 오래다. 다만, 죽은 사람들의 혼백이 반딧불처럼 동동 떠다닐 뿐이다.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죽음과 삶의 교차점에서 시작된다. 죽음도 보통의 죽음이 아니다. 비상을 먹고 죽거나 낫에 목이 베어 죽는다. 죽음의 이유는 절절하다. 그 절절함이 그들의 후손들에게 재현돼 바람 나 미쳐버리고, 도끼에 찍혀 죽고, 물에 빠져 죽는다.

죽음과 죽임의 끈질진 연(緣)을 타고 삶이 곡예한다. 유자꽃의 노란 빛과 동백꽃의 빨간 빛이 서로 엉클어져 통영의 사계(四季)를 물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꽃은 철따라 흐드러져 지고 말면 그뿐이지만, 사람들은 꽃빛과 바닷빛이 촉발하는 삶의 부유(浮游)를 감당하지 못해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통영이 아니어도, 한반도에 흩어진 수많은 평범한 촌락들에도 사람들이 저지른 일의 역사가 한 움큼씩 뭍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리라.

그런데 통영에 이르러 더욱 처절한 빛을 띠는 이유는 산과 바다의 항시적 교감을,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섬들이 뿜어내는 절망과 환희의 괴성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약국의 딸들’이 통영 사람들의 ‘성정의 향연(饗宴)’이자 한국의 도스토예프스키적 스토리인 것은 그런 까닭이다.

작가는 토해낸다. 타고난 기질, 그 성정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대끼는 삶의 바닥까지를 뒤집어 보이고 운명과 늠름하게 마주앉고자 한다. 운명이 어디까지 현재의 나를 매혹할 것인지, 그런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는다. 작가는 그 시험에서 이긴다. 이겨야 한다. 식은 땀을 흘리며 지난 날의 성정을 벗어야 한다.

‘김약국의 딸들’을 구성하는 예사롭지 않은 사건들은 사실 작가 스스로를 시험해보려는 무대장치다. 비상 먹고 죽은 엄마가 그리워 자주 흉가에 가는 어린 시절의 성수(김약국)는 병약한 사촌 누이 연순이의 죽음을 목격해야 한다.

어른이 된 김약국은 이제 사랑방에 깊숙이 틀어박혀 말(言語)과 결단을 잃고 가족사의 비운(悲運)이 현실을 덮치는 장면을 숨죽이며 감당해야 한다. 시험은 세째 딸 용란에게서 절정에 이른다.

자신의 성정을 동백꽃처럼 개화시키는 용란, 주워 기른 무당의 아들, 한돌이와 벌이는 용란의 성희(性戱)가 간창골의 평화를 깨고, 그 욕정의 바람이 과거의 비운을 현재로 초대하는 장면 한가운데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악연은 결국 재현된다.

아편쟁이 사위가 휘두르는 도끼에 장모가 맞아 죽고, 용란은 미쳐 저자 거리를 헤맨다. 배꾼으로 태어난 기두는 철저하게 허물어진 용란의 주변을 평생 맴돌고, 기두를 찾아나선 그의 처, 용란의 동생 용옥은 통영으로 돌아오는 배와 함께 침몰한다.

시골 어느 마을에서든 한 번쯤 일어났을 법한 이 비운의 스토리로 작가는 자신과 독자를 몰아넣는다. 성정의 시험, 그 시험은 성공한다.

성정에 그대로 몸을 맡긴 사람들의 얽힘, 그 얽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운명의 재현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두 개의 축이 있다. 소목쟁이로 일에 귀의한 김약국의 사촌형 이중구의 전통적 자존심, 지성으로 무장한 둘째 딸 용빈의 지혜로운 이성. 이 두 개의 축은 성정의 끈질긴 공세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가족의 몰락과 비명의 죽음을 감내하는 용빈의 마음 뒤편에는 언제나 서늘한 외로움의 바람이 분다. 성정을 다스린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통영의 바다는 맑고 푸르다. ‘김약국의 딸들’이 사라진 지금도, 그 모든 장면을 가슴에 담고 서울로 떠난 용빈의 먼 후손이 되어 포구에서 바라봤을지 모르는 작가의 바다는 여전히 맑고 푸르다. ‘김약국의 딸들’로 스스로를 시험한 작가는 몇 년 후 집필할 대하소설 ‘토지(土地)’로 나아가고 있었다.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