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수필 세계를 음미하는 어려움

원형갑

필자는 60년대와 90년대에 두 번 피천득 세계를 음미했다. 각각 200자 원고지 100여 매씩이었으까 비평 치고는 꽤나 진지한 셈이다. 그러나 30년간에 걸친 이 집착에도 불구하고 아직 피천득 세계의 진수(眞髓)에 젖어 봤거나 만나봤다는 생각은 가져본 일이 없다. 특히 이번에 「수필문학」지에 2회 연재한 「피천득의 창작의식」에 있어서도 피천득 수필의 정체를 밝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脫功利的 의식활동’이라는 관념적 주제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탈공리적 의식세계는 필자가 60년대의「수필문학」지에 썼던 ‘소년적 순수성으로서의 피천득 세계’의 변형일망정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애초에 마음먹고 있었던 ‘피천득 수필의 실체 찾기’와는 분명히 거리가 멀어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3,40년 간을 비평으로만 살아온 자신을 심문(審問)해 보기도 했다. 어떤 작품이든 문학작품인 이상 우선 음미해야 하는 것이 비평가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음미는커녕 우선 칼을 뽑아드는 것이 우리 비평계의 풍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우리 수필계의 풍속도를 따져보기도 했다. 가령 수필활동을 순수한 문학활동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회비평이나 문화비평활동으로 생각한 나머지 어떤 입장에 서서 주장하거나 변명하고 옹호하는 것을 주로 하는 습성 말이다. 혹시 필자가 그러한 경향의 수필활동에 기웃거린 나머지 피천득 세계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사실 이 문제는 적어도 비평문학으로서는 아무렇게나 듣고 지나쳐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비평이 사실규명이나 가치평가를 앞세우다 보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필자에게 피천득론을 다시 써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어온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시도해볼 생각이다. 물론 필자가 이런 방법 문제까지를 생각하게 된 것은 30년간에 걸친 피천득 수필과의 씨름이 필자로서는 너무 힘겨웠기 때문이나 또한 피천득 수필에 흥미를 갖고 있는 후배에게 혹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사실 피천득 세계처럼 교묘한 문학 세계는 또 없다. 표면상으로는 지극히 명료하고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구성됐으며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알아보려고 할 때 우선 앞길이 캄캄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피천득 수필은 그 본(本)이 될만한 유형(類型)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문학사적으로 유형을 만들 수 없을 만큼 피천득의 수필은 그 한 사람만의 독특한 창작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게 된 피천득 수필의 연구방법은 다음과 같이 매우 알기 쉽고 간단하다.

우선 피천득의 수필이 70여 편밖에 아니된다고 해서 그 모든 수필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것은 없다. 그 수필들은 모두가 200자 원고지 10매 내외짜리들이고 또한 그 지향성들도 거의 같기 때문에 공연히 연구자를 혼동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나 문제를 다룬 것들만 우선 골라내어 그것만을 텍스트로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을 과연 피천득은 어떻게 요리하고 있는가? 그것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 인물의 객관적인 내용 중에서 과연 피천득은 무엇을 선택했고 어떤 것들을 내버렸으며 또한 어떤 방향으로 그것들을 이끌어 갔는가. 말하자면 그 소재의 취사선택(取捨選擇)과 지향성(指向性)만을 아는 것으로도 피천득의 수필세계는 대체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피천득의 작품 하나라도 예를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령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피천득 세계 속의 인물이라면 누구나 우선 ‘아인슈타인’을 꼽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유태계 미국인은 유명한 20세기 물리학자일 뿐 아니라 「아인슈타인」을 쓴 피천득의 수필 또한 어떤 아이슈타인 이해자보다도 훌륭한 아인슈타인 이해이며 에세이로써도 가장 아인슈타인답고 훌륭한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수필 속에 인용되고 있는 아인슈타인 자신의 ‘상대성 원리’에 대한 해답이 더 재미 있다. 필자 같으면 마치 필자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아는 체한 나머지 그의 유명한 수성(水星)의 위치라든가 또는 지구표면에서 뛰고 있는 100미터 경주에 있어서의 경주 기록을 지구표면에서 재었을 때와 비행기에서 재었을 때의 차이 같은 것을 들어 봄직한데 피천득은 그런 까다로운 것을 동원하지 않고 아인슈타인 자신의 멋진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남자가 예쁜 여자와 1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 그 한 시간은 1분으로 생각되겠지요. 그러나 그가 뜨거운 난로 옆에 1분 동안 앉아 있으면 그 1분은 1시간이나 되게 느껴질 거요. 그게 바로 상대성이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진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는 더 재미있다. 아인슈타인이 살고 있는 마을의 한 어린이가 수학문제로 골몰하다가 아인슈타인에게 찾아갔다. 촌영감 같은 아인슈타인은 귀여운 어린 아이가 찾아준 것을 기뼈하여 친절을 다해서 맞아 주었다. 그리고 모르는 게 있으면 또 오라고도 했다. 이 소문은 금세 온 동네에 퍼졌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이 얘기를 듣고 바로 아인슈타인에게 사과드리려고 찾아갔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내가 애기한테서 배운 게 더 많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수필가 피천득의「아인슈타인」은 철저하게 아인슈타인에게 입각해서 ‘아인슈타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거의 완전하리만큼 아인슈타인에 동화(同化)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앞세우는 법은 없다. 그리하여 우리 피천득의 독자들은 피천득이「아인슈타인」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했으며 얼마나 많은 아인슈타인에 관한 책을 읽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여기에 동원된 인물들과 책들을 살펴봤다. 우선 제목이「아인슈타인」이니까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가 암시적으로 들어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자를 밝힐 것도 없는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 있으며 또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레이버의「아인슈타인의 물리학관」이 상정(想定)되고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등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재(實在) 말을 나누고 있는 인물로는 아인슈타인과 어린 소녀, 그리고 그 소녀의 엄마 해서 3사람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 책들과 그 인물들을 실질적으로 묶어 놓고 있는 말의 종류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 「아인슈타인」을 엮어 놓고 있는 말의 종류는 말할 것도 없이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어(日常語)들이다. 그는 그 어렵기 짝이 없는 책들을 지극히 쉽고 평이한 일상어로만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그 쉽고 평이한 일상어야말로 이 수필대가의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사실 수필세계일수록 쉬운 일상어에 대한 말을 많이 하고 문제 삼기도 하지만 그러나 정작 그 쉬운 일상어의 정체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하는 경우가 없고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피천득의 거의 독무대라고 해도 고언이 아닌 그 순수세계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쉽고 평이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 대화어(日常的 對話語)의 세계란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사실 지금 우리가 음미하고 있는 「아인슈타인」만을 보아도 일상적 대화어로서는 이뤄질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런데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만이 아니라 학문의 뿌리까지도 일상적인 대화어로서 뒤흔들고 있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피천득이 별나게 좋아하고 있고 또한 누구보다 자유롭게 구사해 오고 있는 그 일상적 대화어의 정체를 우선 알아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피천득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름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무엇보다도 흔히 말하고 있는 문학비평상의 기법(技法)주의나 구성(構成)주의 또는 일반적인 작품론으로서는 다룰 수 없는 것이 수필의 세계이고 특히 피천득 세계는 서구의 에세이와 같은 성정옹호적 문장(性情擁護的 文章)의 세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제까지의 그 모든 수필론들에게서 산견(散見)해오고 있는 것처럼 그 어떤 목적도 주제의식도 없이 써 놓고 있는 것 같은 글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필자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없고 써 먹어 본 일도 없는 후써르의 ‘자연적 인식’이란 용어가 불현듯 떠올라 사로잡힌 채 아직까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自然的 認識’이란 용어는 현상학(現象學)으로 유명한 후써르(Edmund Husserl, 1859~1938)의 철학활동 중에서도 초기에 속하는 「순수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고(考)」(1913)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제시된 용어인데 이 책 이름이 너무 긴 까닭으로 흔히는 ‘이덴’(考)으로 불려지고 있거니와 또한 그 ‘자연적 인식’이라는 이제까지 논의되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그만큼 서먹서먹한 낱말이라고 할 수 있고 어쩌면 아직 용어가 되지 못한 또는 용어가 될 수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천득 세계를 유심히 음미한 후부터는 어쩐지 그 ‘자연적 인식’이라는 후써르의 말을 수필을 음미하기 위한 기본적 용어로 생각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피천득의 수필들을 그처럼 애독하게 됐고, 또한 피천득의 수필이야말로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어떤 시집 어떤 소설보다 유명하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피천득의 소박하고 오묘한 자연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의 수필 속에서 거의 격의 없이 만나고 있는 그 소박하고 평이한 일상적 대화의 세계야말로 가령 세계 최고의 순수 물리학자에게 수학을 배우겠다고 찾아간 어린 소녀와 또한 그를 반갑게 환영해 맞이한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 딸아이의 무례를 사과하기 위해서 아인슈타인을 찾아간 그 어린소녀의 어머니와 그녀를 맞이한 아인슈타인의 놀라운 답례, 그리고 또한『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책과 그 책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한 피천득의 묘한 자기 반성 그리고 이 수필 「아인슈타인」을 쓰게 된 피천득의 수필가적 자기반성, 그러한 「아인슈타인」의 내용들이 서로 어울리게 되는 지향성(指向性)이야말로 바로 금세기 초의 현상학적 철학자 후써르가 새로 만들어 제안한 ‘자연적 인식’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후써르가 중요시하고자 했던 것은 흔히 인간만이 진, 선, 미(眞善美)를 판단해 낼 수 있다고 서양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로고스(logos)란 것이 개입해 들기 전의 인간적 인식상태(人間的 認識狀態)를 말하고자함이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성서식(聖書式)으로 말한다면 하늘에 창조신인 여호와와 같이 계시는 로고스가 아니라 그 로고스 이전에 진 선 미를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가리키고자 했던 것이다.

어찌됐든 피천득의 수필세계가 인간의 생활세계를 확실하게 나누고 갈라내는 로고스적 판단의 세계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의 수필(생활세계)은 언제나 로고스 이전의 자연적 인식의 레벨(영역)에서만 이뤄지고 있고 또한 그러한 인간의 자연적 인식세계를 어떻게 하면 로고스의 칼날을 피하여 살아 있는 그대로 인간끼리 서로 주거니 받거니하며 공감(共感)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피천득의 수필세계도 단적으로 말해서 로고스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거니와 기대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로고스의 칼날이 어른거리는 것 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예로 들어본 「아인슈타인」에서 어떻게 독자와 날카로운 로고스적 판단이 필요한가 생각해 볼 만하다. 「아인슈타인」속의 서로 엄청난 지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지능차(知能差) 같은 것은 아랑곳도 없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그 자연적 인식의 공감세계야말로 보다 높은 인간의 지혜를 만들어 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항상 살아 있는 감각을 중요시해마지 않았던 프랑스의 과학철학자(科學哲學者)의 한 분의 말을 이 피천득의 「아인슈타인」에 연결해 보고 싶다. 60년대 초까지 그러니까 백여살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지 않고 「촛불의 불꽃」(61) 등 30여권의 인간의 인식문제에 관한 책을 쓴 바시라르(Bacheland)의 「과학정신의 형성」(38) 속에 제시된 말인데 ‘인식론적 절단(絶斷)’이 바로 그것이다. 과학철학자니까 누구보다도 알고 있는 사실을 믿고 내세우기 좋아하며 인간의 로고스적 인식능력을 중요시해야 되는데 이 가스톤 바시라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보면서 놀란 나머지 아예 그 로고스적 인식능력을 끊어 버리자고 제안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대성 이론 이전의 로고스적 인식론이 얼마나 완고한 이데올로기였었는지 그 로고스주의(이데올로기)야말로 인식론적 장애물(認識論的 障碍物)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 만일 뉴튼의 우주이론이 그대로 보편타당성으로서 아인슈타인을 지배하고 있었더라면 그의 상대성 원리도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뉴튼의 우주이론이 과학적인 정신일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편배달을 비롯하여 전보기사(電報技士) 등 각종의 자격시험을 거쳐서 비로소 뒤종 대학의 과학철학교수가 된 바시라르는 곧 인간에 있어서의 순간적 직관력(直觀力)을 중요시하게 되고 항상 상상력이 아니고서는 시를 쓸 수 없는 로트레아몽(Lautreamont, 1846~1870)과 같은 시인에 있어서의 독창적 언어작을 주목하게 되어 그후로는 죽을 때까지 인간의 상상력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글머리에 소개된 에밀리 디킨슨의 시귀절이 재미있다. 그는 그 디킨슨의 시귀절이 아니었던들 「아인슈타인」을 쓰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천득의 이 놀라운 단언은 30년대 초까지 시인이었던 시인 피천득이 왜 수필을 쓰기 시작했고 수필을 즐기게 되었는가를 말해주고도 남는다. 이 디킨슨의 4행시 한 절(節)이야말로 그가 아인슈타인을 수필로 다룰 때의 소중한 행복감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러한 문학적 작업에 대한 자각(自覺)과 자긍심(自矜心) 그리고 경계심(警戒心)을 동시에 나타내 준 그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천득의 문학적 행위에 있어서의 성격상 좀처럼 나타내본 적이 없는 이러한 자기만족적인 행복감과 자각 내지 자긍심과 경계심의 토로가 「아인슈타인」한 편을 쓸 때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그의 이 행복감과 자각, 자긍심, 경계심은 그가 수필을 창작할 때마다 반드시 그를 지켜보고 있는 그의 마음인 동시에 그의 수필창작의 스승인 것이다. 그는 수필을 창작할 때마다 그런 마음, 그런 스승을 불러내야 했고 곁에서 반드시 지켜 보게 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마음 그런 스승이 그를 지켜보지 않을 때는 그는 수필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피천득이 그리도 존엄하게 생각했고 두려워한 그 에밀리 디킨슨이 과연 어떤 시인이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 같다. 아무래도 피천득의 수필 스타일이나 성격이 그 디킨슨의 영향을 주로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가 번역 출판한 「세계명작시선」속에도 세계적 시인 20명 중의 한 사람으로 디킨슨이 꼽혀 있고, 그 40편의 시들 중 디킨슨의 시 두 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한 편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글머리에 제시된 시(詩)와 진(眞)의 일치를 노래한 ‘나는 미를 위하여 죽었다’여서 그가 얼마만큼 19세기의 미국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1세기 전의 이 미국여류시인에 대한 피천득의 짤막한 한 토막의 소개가 재미있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12~1889)

'미국의 가장 위대한 여류시인, 메사추세스주 엠허스트에서 태어나 거의 일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별로 사람을 만나지 않았는데, 워싱턴 방문 중 젊은 목사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가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그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칩거했다. 생전에는 시 두 편(수)만이 발표되었다.’

그래서 필자가 일본말로 출판된 『세계 문예대사전』을 펼쳐보았더니 디킨슨은 ‘메사추세스의 엠허스트에서 태어나 거의 일생을 그곳에서 보냈다.’가 아니라 ‘그곳에서 숨어 살았다.’는 표현이 같지 않음을 알았다. 알맹이는 같을지 몰라도 그녀의 인격적 성향(性向)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이 후자의 경우가 쓸모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단 한번의 연애실패 때문에 고향의 옛집에서 숨어 살아야 했던 디킨슨의 고집스런 일향성(一向性)이야말로 피천득의 그것과 같고 단 두 수의 시를 발표했을 뿐인데 사후에도 세 권의 시집이 발간될 만큼 중후(重厚)한 문학적 정열이란 점에서도 오늘날의 한국 수필가 피천득을 상기시켜 준다.

영향을 받는다든가 모방이란 것은 묘한 것이어서 그가 그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성립이 될 수 없다. 성격이나 지향성에 있어서 서로 닮은꼴이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한국 수필의 가장 전형적이고 독창적인 텍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피천득이 19세기 미국의 오묘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디킨슨 세계의 그 대담한 주제(主題)의 형상화(形象化)와 표출(表出) 그리고 간결, 정확하며 깨끗하고 산뜻한 기품(氣品)을 마음껏 풍겨내고 있는 문장상의 묘미에 있어서는 디킨슨의 그런 시풍(詩風)을 많이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피천득의 수필은 오직 피천득의 수필일 뿐이다. 피천득의 개성과 창조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세계문학상 유래가 없는 독창적 문학장르요, 그 산물일 따름인 것이다. 다만 디킨슨의 생애에 걸친 인격적 명제(人格的 命題)들과 시적 명제(詩的 命題)가 피천득의 창작생활에 후견인(後見人)과 같은 구실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천득이 초(抄)해 놓은 디킨슨의 약력에서도 알 수 있거니와 디킨슨이야말로 서양의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인격이 강조된 생활철학을 산 분이고 간결하고 평이한 자연적 인식을 통해서 삶의 세계를 통찰(洞察)한 시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관념에 사로 잡히기를 좋아하는 이데올로기적 지식인에게는 피천득 세계가 오히려 껄끄러울지 모른다. 그만큼 피천득의 세계는 가치관(價値觀)에 물들지 않은 순수인간만을 보는 자연적 인식의 눈이기 때문이다.

- 隨筆文學 1996년 8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