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회 신입회원 가입 안내 |

시나 소설이 무어냐고 우격다짐으로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드문데 비하여 수필계는 아직도 이 화두에서 해탈하지 못한 채 천언만론(千言萬論)을 반복하고 있다. 버젓한 수필문학사나 개론서가 정립되지 못한 처지인지라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뉴턴 이전에도 만유인력이 작용했듯이 이론과 연구의 천착이 미진해도 긴 문학사에 나타난 수필창작의 축적이 곧 그 본질과 기능과 가치판단의 척도가 될 수 있을 터이다.

옹색한 이 자리에서 저 광활한 수필문학 개론에로 돌진할 의도는 없지만 플라톤에서 발원한 세계 수필문학사가 몽테뉴나 파스칼, 베이컨에 이르러 분수령을 이뤘는데, 이 고전적인 '에세이'가 근대 자본주의 분업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찰스 램과 같은 '신변잡기'로 새롭게 단장했다는 사실은 고교생의 안목만으로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우리 문학사 역시 방대한 수필의 범위를 서발(序跋), 서간, 기행, 비망, 전장(傳狀), 애제(哀祭), 잠계(箴戒), 가사(歌辭)에 걸쳐 그 풍성함과 다양성의 보고(寶庫)를 상속하고 있다(최강현 <<한국수필문학 신강>> 인용).

한국에서 '수필문학'은 혜초, 최치원에서 이규보와 박지원을 거쳐 장지연. 신채호. 정인보 등의 고전적 에세이의 명맥이 근대 전반기를 넘어서면서 양주동. 김진섭. 조윤제. 이희승. 김소운 등의 신변잡기로 분장을 바꾼다.

이 신변잡기의 여러 갈레 중 가느다란 한 가닥에서 피천득의 찰스 램과 같은 감각적 수필은 잉태된다. 마침 분단 한국은 모든 분야에 걸쳐 '순수'라는 깃발 아래 역사와 인생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중후한 문학을 전지(剪枝)하던 때라 감각적인 순수문학은 시대와 독자의 기호와 지배층의 의도가 완벽한 합궁을 이루게 되었다.

신변잡기 항렬이면서도 토착적인 흙 냄새와 인정세태가 스민 민족적 정서가 풍기는 앞 세대와는 달리 피천득은 세련된 연미복에다 서구 고전음악이 흐르는 무도회장을 연상케 한다. 우아한 귀족 취향과 형식주의에 빠진 속물적인 윤리의식을 비아냥거리는 대목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매튜 아놀드가 퇴짜를 놓은 속물적 귀족주의를 향한 비판이지 그 본질은 몸맵시 날렵한 청자연적의 여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심을 유발하는 데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따지면 해박한 교양과 세련된 신사도로 화사하고 담담한 사랑만이 연애라고 믿는 사람에게 처절한 비련(悲戀)이나 격정적인 열애가 얼마나 인간적인지를, 사계절이 온통 5월처럼 온화한 인생보다 태풍과 폭염. 폭우. 폭설과 혹한의 시련이 얼마나 사람의 향기를 뿜어내는 문학인가를 상기시킬 수밖에 없다. 청아한 가곡의 밤 청중석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뽕짝을 듣고싶은 심정을 이해해 달라면 무리일까.

태양. 장미. 봄. 신록이 아름답듯이 피천득의 수필은 곱다. 그의 문장은 루쉰(魯迅)의 간결체에서 익힌 듯이 절도가 있고, 수사법은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파 시처럼 화려 고아(高雅)한 이미지로 넘치며, 구성은 소네트처럼 군살을 뺀 서사구조가 그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평한다면 미학적 사대주의자들이 우러러보는 찰스 램보다야 오히려 피천득이 몇 끗발 위라고 서슴없이 주장하겠다.

그럼 됐지 우리 같은 문화적 툰드라 지대에서 웬 분수 넘치는 과욕이냐고 덤비면 바로 이런 완벽한 감각적 순수 신변잡기가 오늘의 한국 수필문학의 지평을 은연중 한계 짓게 만드는 왜소화의 요인이란 점을 먼저 거론하겠다. 피천득의 작품세계가 수필문학의 전범(典範)이자 본령이며 정통이고 주류요 본류인 양 강요당하는 풍토야말로 문제란 뜻이다.

차라리 이 시대에 그와 쌍벽을 이룰만한 신채호나 김소운 같은 작가가 있어 수필의 다양성을 확보했다면 그의 존재는 오히려 안정적일 수 있으련만 한 가지 들꽃으로만 그득한 드넓은 들판이 지닌 단조로움이 그를 향한 투덜거림을 독촉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들꽃이라면 그나마 조금의 위안은 될텐데 그나마 영락없는 장미, 그것도 들장미가 아닌 화원에서 잘 손질된 장미임에랴.

더 놀랄 일이 없지 않는데 예컨대 아래 인용문을 찬찬히 읽어보자.

- 나는 영국과 같이 왕위에 계시되 친히 정치는 아니하는 임금은 국민이 모셔도 좋다고 생각한다. 영국에 왕이 계심으로써 여러 자치령들은 본국과 한 나라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위에 모실 분이 있어 국민들은 안정감을 갖게되며, 또 영국의 유구한 전통이 계승된다는 행복감을 느끼리라 믿는다. 지금과 같이 여왕인 경우에는 한편 더 화려한 감을 준다. 여왕은 우아와 지혜의 상징으로 아름다운 동화를 실현한 느낌을 준다. 영국 역사에 있어 문화가 가장 찬란하던 시대는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때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때이다. <가든 파티>

문학이 단순한 문장 솜씨 자랑이 아닐진대 이 글에 담긴 내용을 굳이 하나하나 분석하고 싶지 않으나 "여러 자치령들은 본국과 한 나라라는 생각을 갖게된다"는 대목만은 다시 주시해 주길 바란다. 남아프리카나 인도를 상기하니 이 대목이 너무나 끔찍하다. 한때는 우리도 남의 왕 '모시기'를 강요당했으며, 그 왕 역시 영국 여왕처럼 "정치는 아니하는 임금"이었다. 말이 난 김에 하자면 엘리자베스나 빅토리아 여왕 지배 때 영국은 약탈과 침략을 강도 높게 자행한 끔찍한 팽창주의를 열었다.

이런 세계관과 역사관 위에서 직조(織造)된 작품이기에 그 작가가 아끼는 인물 목록에 반전 평화주의자 아인슈타인과 친일파에 침략전쟁의 동조자인 춘원이 공존한대도 놀랄 일이 아니다.

작품을 꼭 그런 잣대로 난도질해야 되느냐고 삿대질한다면 우리의 삶을 다 제쳐두고 꼭 아름답게만 써야 하느냐고 조용히 묻겠다. 명수필이란 인도주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절절히 풀어주는 게 아닌가 문학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라고 권하겠다.

연미복도 없지만 있어도 입고 갈 곳도 없는 촌놈이, 아니 남이 입은 걸 봐도 아름답게 보이기는커녕 뭔가 어색해 몸이 간질거리는 나 같은 세련미 없는 자의 푸념일까. 그래도 나는 향수냄새 물씬 풍기는 글보다는 땀과 피와 눈물이 스며있는 글이 더 좋다.

- 임헌영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