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수필

이 진 화

  무엇인가 기능이 필요한 일들은 그 비슷한 기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자리가 채워질 수 있겠지만 특별한 유대로 맺어진 사이는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代置)될 수가 없다. 깊은 운명과 수많은 영혼의 교류에 의해 맺어진 인연은 제아무리 유사(類似)한 것이라 할지라도 바꿔치기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래된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되고 그가 아니면 안 되는 절대적인 관계 속에 수필이 있다. 내가 쓰지 않으면 태어날 수 없고 가꾸지 않으면 생긴 모습 그대로 내 이름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수필. 그러나 수필이 곧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역동적이고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는 마치 연인과도 같이 자상하고 너그러워서 어떤 생각의 꼬투리도 타박하는 법 없이 조곤조곤 나의 생각과 마음을 묻는다. 어떤 길이든 나와 동행하면서 내 발걸음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지켜 준다. 내가 기쁨 중에 있든, 비통함 가운데 있든, 분노로 가슴이 불타든, 가만히 손을 잡아 주며 그를 향한 눈길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다.

  열과 통증이 이어지고 가족들마저 잠자리에 든 깊은 밤에도 그는 지치지 않고 나의 병상을 지켜 주었으며 그의 동참으로 수많은 고통을 직시하며 극복할 수 있었다. 모든 사건과 현상을 어느 정도 떼어 놓고 보는 시각은 냉철한 듯 하지만 따사롭고 문제에 눌려 침몰당하지 않을 힘을 준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는 변치 않는 자세로 내 곁을 지키며 성숙하고 진실하게 작업에 임하기를 기다려 줄 것이다.

  문학과는 자연스럽게 친숙해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형시라는 그릇에 담아 내놓으면 잘 썼다는 칭찬을 받았고 백일장에 나가면 입상을 했다. 그러나 중고등 학교 시절에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끙끙 앓으며 6년을 보냈다. 들끓는 감성과 터무니없는 꿈을 담아내기에는 문학이 너무도 엄격하고 도도한 그릇이었다. 문예반을 맡았던 김 선생님께서는 그 시기에 빠지기 쉬운 감상주의나 문장의 겉치레를 유난히 경계하셨고, 좋은 문학 작품과 영화와 연극을 많이 대하라고 충고해 주셨다. 성실한 자세로 습작을 하면서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언어를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책을 읽고 연극을 보는 일에 대부분의 용돈을 썼다. 그 무렵에 써 모은 습작작품이 대학 노트로 30권정도 되지만 하나도 빛을 보지 못한 채 소각되고 말았다. 그것은 불안한 완벽주의자의 치기였다.

  대학생이 되면서 문학 외에 여러 분야의 책을 폭넓게 볼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심리학이었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인간의 갈등과 소외, 정서적 불안과 부적응, 이상 심리(異常心理)와 이상 행동, 정신 신경증의 원인과 치료 등은 전공(특수교육학)을 위해 꼭 필요한 공부였는데 소설책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물론 기존의 문헌을 덧기운 것에 불과하지만 문학과 전공에 대한 소논문을 쓰면서 두 개의 갈림길 앞에서 서성거렸다. 학문의 길로 갈 것인가, 문학을 할 것인가. 교수 연구실에 앉아서 연구조교로 일을 하다가도 창밖을 내다보며 몽상에 잠겼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인생의 답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결국 학문의 길을 접고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인간 영혼의 문제와 마음에 대한 의문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갇힌 샘이 터져 나오는 듯한 힘으로 하룻밤에 단편 소설 한 편씩을 써내기도 했다. 작품을 정성껏 다듬어서 신문사 신춘문예와 현상 공모에 보냈지만 번번이 낙선이었고, 마지막 한 곳에서는 최종적으로 남은 두 편에 올랐다가 아깝게 밀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여러 달을 앓던 끝에 나는 더 이상 남의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나의 열병을 치료해 준 것이 수필이다.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고 허구가 아닌 삶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수필을 통하여 내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며 살기로 작정했더니 마음이 순하고 편안해졌다. 수필은 마치 천연 섬유로 지어진 옷처럼 내 몸에 잘 맞는다. 오래도록 삶의 여러 모퉁이를 맴돌며 순례하다가 나의 충실한 반려인 수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장황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화려하지 않아도 내적(內的)인 맵시를 얼마든지 드러내며, 통곡하지 않아도 콧날 찡하게 하고, 소리 내어 웃지 않아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잘 다듬어진 수필의 멋이다. 내가 끊임없이 한눈을 팔아도 수수한 수필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킨다.

  나는 인격적이며 신사적인 수필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내놓기 두려웠던 나의 결점과 열등감, 대책 없는 자만심, 아픔과 상처들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훈련을 받는다. 또한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삶을 곡해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력을 키워 간다. 내 인생의 상담자요, 치료자요, 동반자인 수필에 의해 나는 오늘도 조금씩 자라 간다.

바라기는, 무명 같은 나의 수필이 아기의 연약한 몸을 안는 배내옷이 될 수 있다면, 달리다 넘어진 청년의 상처를 감싸는 붕대가 될 수 있다면,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손수건이 될 수 있다면, 병든 몸을 누이는 요와 이불의 호청이 될 수 있다면, 마침내 죽은 자의 관을 내리는 묵묵한 띠가 될 수 있다면, 팔 벌리고 엎드렸던 문학에의 종신서원을 조금이나마 이루어갈 수 있을 텐데, 밤새워 삐그덕 대는 베틀소리가 여전히 곤고하다.

  수필, 그는 늘 내 곁에 있지만 그에게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언제 수필이 원하는 수필을 지어내어 그 몸에 입히고 절정에 이르는 일치의 기쁨을 맛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