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윈 데이

서 종 남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10월 31일은, 우리의 정월 대보름과 흡사한 미국의 민속절인 ‘헬로윈 데이’이다. 미국에서는 귀신 쫓는 날이라는 이 때가 다가 올쯤이면, 온 나라가 귀신 캐릭터들과 호박축제로 들뜬다.

붉은 호박에 눈, 코, 입을 조각하여 유령 모양을 새기고 그 속에 불을 밝혀 잭 랜턴을 만들어 문 앞에 놓거나, 각종 무서운 귀신모형들로 곳곳에 장식을 한다. 모양은 귀신이지만 호박 속에 촛불이 켜지면 그 빛은 따스해 보인다. 거리마다 빗자루를 타고 가는 마녀에서부터 갖가지 귀신들의 형상을 디스플레이 해놓은 것은 물론, 호박을 파는 농장 같은 곳에는 귀신들의 집이나 굴을 만들어 놓고 오가는 손님들이 구경하거나 실제로 들어가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는 심리적 욕구에서 이런 행사를 마련한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할지도 모를 공포의 대상들을 생활 속에서 만나다 보면, 조금은 친근해 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심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 때가 되면 펌킨파이나 펌킨케이크 그리고 펌킨쿠키 등을 굽고, 호박으로는 유령을 조각하거나 표면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여 아이들을 들뜨게 한다. 호박 추수가 끝나고 호박 축제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행해지는 이 세시풍속에서는 이웃 간의 재미와 정을 나눌 수 있는 민속절을 마련하고, 그 많은 농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판로도 개척해 주는 지혜로운 그들 생활경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의 가정들은 헬로윈이 오면, 미리 사탕이나 초콜릿을 준비해 놓는다. 왜냐하면 그 날 밤, 온 동네 아이들이 “트리크 오어 트리트(Trick or Treat)”라고 외치며 찾아오기 때문이다. 말인즉 “짓궂은 장난을 받을래, 아니면 캔디를 줄래”하는 뜻이다. 사탕을 주면 “감사합니다(Thank You)”를 연발하며 가고, 주지 않으면 가끔 짓궂은 개구쟁이들은 “우우”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대문에 그림을 그리는 등 장난을 쳐 놓기도 한다. 그러나 장난을 치는 일도 드물거니와 주지 않는 집 또한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어느 대학에서도 체육 행사가 끝나고 학생들이 흥겨워서 여럿이 학교 앞 음식점에 몰려가면 어떤 집에서는 음식으로 대접해 준단다. 그러면 학생들이 “잘돼라, 잘돼라”를 외친다고 한다. 그러나 거절하는 집에는 “망해라, 망해라” 외치는데 이것은 실제로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재미로 하는 장난인 것이다. 대학생들의 젊음을 발산하려는 뒤풀이 행사이지만 귀엽게도 보인다. 헬로윈 데이는 이처럼 미국의 아이들이 하루를 허용된 장난으로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민속절인 것이다.

우리 막내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이 행사를 위해 미국 집에 초대되어 가기도 하고 또 우리 집에서 잔치를 해주기도 했다. 그 날에 초대를 받으면 엄마들은 특별한 의상을 준비해 주어야 한다. 과자를 받으러 “Trick or Treat”를 갈 때는 모두 분장의상을 입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드라큘라나 요술공주, 백설공주 또는 삼총사 복장이나 가장 무도회에 가듯 분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기도 한다.

초대한 집에서는 아이들이 나가기 전 저녁을 먹이고, 그 댁 엄마는 커다란 자동차에다 아이들을 모두 싣고 집집마다 내려주며 마을을 돌다가, 아이들의 주머니에 선물들이 가득 차면 집으로 데려온다. 밤길이니 조심도 되지만 그곳은 집들이 크고 뚝뚝 떨어져 있어서 걸어 다니기에는 너무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가져온 음식들을 먹으며 오락도 하고 신나게 논다. 그러다 밤 10시가 되면 각각 가져온 슬리핑백에 들어가 거실이나 리셉션 룸 등 큰방에서 함께 자도록 한다. 때로는 아이들을 10여 명 이상 초대하기에 모두 침대에서 재울 수 없어, 으레 자신의 세면도구와 의상 그리고 슬리핑백은 준비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여럿 모이면 재잘대고 자려 들지도 않지만, 마침 날도 귀신 쫓는 날이니 그 댁 엄마는 아이들을 모두 눕혀 놓고는 잠재우는 체면술책을 읽어 주기도 한다. 그러면 대부분 아이들은 재미있어 하다가 잠이 들곤 한다.

다음날 대부분 엄마들에게 아침 8시에 아이들을 데리러 오라고 한다. 일부러 운동을 위해 학교운동장 같은 곳에서 뛰거나 걷기는 해도 어디든 차를 타고 다니는 이들 생활습속은 항시 엄마들로 하여금 자동차 면허를 받기 이전 연령의 아이들을 태워다주고 태워오곤 하게 한다.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면 그 댁에서는 대부분 엄마들의 아침까지 대형 식탁에 차려 놓고 함께 식사를 대접하고 헤어지게 된다.

난 이런 것들이 재미있어 외국인인 우리 집에서도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 같은 신선한 모임 갖기를 즐겨했다. 그 속에서 그네들 삶의 검소함과 성실함을 배우고 한편으론 우리 민족의 따스함과 면면히 흐르는 역사와 문화의 향취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아이들의 과자를 준비할 때는 반드시 낱개로 포장된 것이어야 하고 포장은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밀봉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패나 혹 약물 투입 등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원래는 사탕 등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요즘은 준비가 어려운 노인들이나 사정이 있는 집에서는 돈을 주기도 하지만 드문 일이다.

헬로윈 행사를 보면서, 나는 어릴 적 언니를 따라다니며 보았던 우리의 정월 대보름을 떠올렸다. 막내인 나는 아주 어린 시절이어서 그리 많은 기억은 없으나 우리 고향에선 개보름이라고 하는 보름 전날이나 보름밤에는 해가 지기 전 저녁 식사를 했다. 음양사상에 근거한 여러 가지 민속놀이들이 행해지면,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두가 들이나 언덕에 나가 쥐불놀이를 하거나 보름달을 바라며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소원을 빌기도 했다. 밤이 오면, 가까운 친구들끼리 어느 집 사랑에 모인다. 그리고는 편을 갈라 여러 가지 놀이를 하여 진편은 그릇을 들고 ‘밥 훔치러 가는 놀이’를 했다. 물론 전통 민속놀이여서 어머니들은 미리 저녁을 지으며 넉넉히 마련하여 밥과 반찬을 여러 그릇 준비하여 빈 솥 안에 넣어 두고는 대문도 잠그지 않는다. 그러면 진편들은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한 그릇엔 밥을 다른 그릇엔 반찬을 담아 가져온다. 이것도 게으르게 더디 다니는 편은 이미 다른 팀들이 다 가져가 빈 솥만을 뒤지게 되는데 대부분 여자들은 일찍 집에 돌아가야 하니 서둘러 다니기 때문에 흔히 남자 팀들이 못 가지고 가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가져온 것은 큰 자배기에 모두 넣고 이긴 편들이 주인집의 양념들을 넣어 맛있는 비빔밥을 만든다. 그리곤 얼음이 설설 서린 동치미와 땅에 묻은 독 안의 김장김치를 꺼내다 함께 모여 나눠 먹으며 우정을 돈독히 했다. 우리 또래의 한국인이면 땅 속에 묻어둔 김장독에서 갓 꺼낸 김장김치의 찡-하는 맛을 그리움으로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의 어른들은 별로 놀잇감이 없던 아이들에게 하루를 잘 놀게 하기 위하여 지혜롭게도 이런 풍습을 마련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듯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젊은이들의 꿈도 그렇게 키워 나갔으리라.

고국에 돌아와 헬로윈을 맞으며, 우리 아이들을 위해 펌킨파이를 구우니 저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의 민속절인 정월대보름과 비슷했던 그들의 명절이 기억 속에 살아나, 지난날 그들과의 즐거웠던 추억들이 마음에 보름달처럼 차 오른다. 비록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풍습이 다를지라도 사람 사는 모양은 동서양을 막론하여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서로 다른 문화는 상하개념이 아닌,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수평의 개념으로 화합의 고리 역할을 하는 듯하다.

어느 민족에게나 그들 정서가 담긴 민속놀이가 있다. 이 같이 아름다운 동서의 세시풍속을 바라보며, 사람들 내면에 흐르는 이웃사랑 실천에 대한 바램심리와 요즘처럼 이웃 간 교류가 힘든 메마른 세상에 나눔과 협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