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이요"

두 녀석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함께 대답을 하였다. 중학생들이 아직 자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이는 내게 야릇한 미소를 보내며 내가 어떤 음식을 말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답을 벌써 알고 있는 것 같은 믿음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믿음에 대한 당당함을 피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일부러 '짜장면 곱빼기'의 '짜'와 '곱'자에 힘을 주어 큰소리로 말했다. 그이는 내기에서 진 사람처럼 일없이 성근 머리카락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좀 더 맛있는 음식을 시키지 않고서……"

풋감을 씹은 표정으로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그이가 그렇게 기가 죽은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광주에서 맞선을 보고 그 후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이는 그곳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었고 나는 오빠 댁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어서 자투리 시간을 서로 내기로 했다.

그이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곳 지리에 익숙했지만 나는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서울 나들이하고는 그때가 두 번째였다. 그래서 약속 장소에 동생이 데려다 준 이후로 나는 줄곧 그이를 강아지처럼 따라 다녀야 했다.

그는 복잡한 시장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그 다음에는 시장 주위를 뱅뱅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 쫓아다녔고 마침내 후미진 골목에 있는 이층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을 크고 화려한 도시로 상상해 왔는데 그곳에도 그런 비좁고 지저분한 음식점이 있어 당황했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아가씨를 넓은 서울에서 하필이면 탁자가 겨우 다섯 개만 있는 촌스런 중국 음식점으로 데리고 온 이유가 뭘까?

근사한 점심을 살만한 돈이 없을까?

대충 간단한 점심이나 먹고 헤어지고 싶은 걸까?

아니면 장가도 들지 않은 나이에 적금 붓는 재미로 사는 절약형 총각인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내 귓전에 '짜장면 곱빼기 두 개'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매에 묻은 땟 자국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와 잘 어울린 주인은 주방을 향해 같은 말로 소리쳤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상대방에게 먼저 정중하게 물은 다음 주문을 하는 것이 신사의 예절인데 그는 그걸 아예 무시 해버린 것이었다. 하기야 그렇게 허름한 중국 집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은 속옷에 넥타이를 매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몹시 언짢았다. 깔끔하고 자상한 예절, 편안한 분위기 등을 배려하지는 못했을망정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행동은 내 이해의 폭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장과 면을 고루 섞어 맛있게도 먹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배가 고프기도 했을 것이다.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에게 투정이나 푸념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잘못했다가는 내 앞에 놓여있는 자장면까지 뺏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악착같이 자장면을 먹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오빠는 나를 읍내로 데리고 가서 자장면을 사 주었다. 구수한 냄새에 취해 객기를 부려 한 그릇을 몽땅 다 먹을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런데 막상 자장면을 받아 놓고 보니 먹어도 먹어도 양이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억지로 억지로 다 먹었다. 복부의 포만감으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나중에는 아예 오기로 덤볐었다.

그런 오기가 슬며시 마음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자장면을 깨끗이 먹고 물까지 한 컵 다 마셨다. 무례한 이에 대해 흥분하느니보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일이 점잖을 것 같았다. 물론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렇게 맛있는 짜장면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절반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면서 "짜"를 힘주어 말했다. 그이는 나를 쳐다보더니 두 손을 덥석 잡고

"우리 결혼합시다."

라고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결혼을 했고 그이는 그 투박한 성품대로 거짓도 허세도 없이 생활해왔다. 성실함과 은근함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짜장면 한 그릇에 미련 없이 일생을 걸었던 나의 무모함이 억울하다 싶어 가끔 그에게 투정을 하면 그이는 민망하여 해명을 하곤 했다.

만나기로 한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고 약속 장소를 멀리 벗어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중국요리 집을 찾았다느니, 비천한 대접을 받았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다느니 하고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쩨쩨한 사람의 변명쯤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적어도 상대방에게 정성과 호의가 부족했었다는 나의 항변을 상쇄시킬 수는 없었다.

한참 자존심으로 버티는 이십대 아가씨의 콧대를 뭉개버렸다는 이유로 결혼 후에 줄곧 '짜장면'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보상이라도 하듯 더욱 맛있는 음식을 추가해서 사주곤 했다.

다른 음식으로 바꿔 먹으라고 채근하는 그이의 안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추억을 남긴 자장면을 고집했다. 그이는 말하지도 않은 고급요리를 넉넉하게 시켰다. 그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여보, 당신이 사준 짜장면은 언제나 맛이 있어요. 짜장면은 맛있는 음식을 달고 나오니 요술 주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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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룡 휴게소에서 여전히 솔내가 난다. 봄을 준비하는 물 오른 나무에서 땅속 기운까지 느낄 수 있다. 아직은 바람 끝이 차가운데 흙을 비집어 얼굴 내미는 들풀의 풋내가 난다. 이런 향기를 맡으러 나는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이곳을 찾곤 한다. '솔룡 휴게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곳이다. 광주에서 국도를 따라 백양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내가 사는 도심에서 차를 타고 가면 반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산이 사방으로 둘러 있고 소나무가 차 있어 소나무 냄새가 난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사용했는지 모른다.

휴게소는 보통 손님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사방이 확 트인 넓은 평지에 있거나 아래가 다 보이는 산허리에 있다. 쉽게 드나들고 이용하기가 편리하게 되어 있다. 붐비는 손님들 때문에 소란스럽고 최신 유행 음악으로 귀가 따갑다. 잠시 머물다가 가버리고 기억할 만한 추억이 없으면 쉬이 잊어버리는 그런 곳이다.

그러나 이곳 휴게소는 산길을 끼고 돌아 미로처럼 깊숙이 파고든다. 열려 있다기보다는 산들이 감싸고 있다. 현란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산골주막 같은 곳이다. 뜬소문보다는 은밀한 귓속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그러한 곳이다. '유행'보다는 '추억'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아늑한 곳이다. 학창 시절에 즐겨 들었던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온 곳이다.

이것은 혹 나 혼자만의 느낌인지도 모른다. 소란스러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약간은 호젓한 그 곳에서 그런 마음을 느껴보고 싶은 지도 모른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의 산세도 차분하고 조용하다 . 또한 찾아오는 손님이 드문드문해 약간은 한산해 보인다. 관광명소인 백양사를 찾아가는 연인들이나 아이들이 잠시 들러 커피를 마시거나 과자를 사러 온다.

이곳은 내게 기억할 만한 대단한 추억이 있는 곳도 아니다. 또한 자연 경관이 아름답거나 조경을 해서 억지로 모양새를 만들어 손질을 해 놓지도 않았다. 내가 살던 어릴 적 동네처럼 투박하다. 자연의 순리대로 계절에 따라 변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그저 묵묵히 적응해 간다. 싹 트고 꽃 피고 열매 맺고 겨울 바람에 눈꽃도 피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와 도심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털어 내고 어머니 품 같은 고향의 정감을 맛보려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만의 공간을 생각해 왔다. 여럿이서 함께 공유하는 세상살이도 즐거움을 주지만 거추장스러운, 더러는 버거웠던 감정의 상처들을 털어 내고 나 자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사람 사는 맛을 느끼지만 결국은 희노애락의 판단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다락방이나 골방에서처럼 혼자 있어도 외롭다고 생각되지 않은, 빗소리, 바람소리에도 상상의 꿈을 피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소라 껍질 속 같은 이 곳에서 나는 그런 편안한 기분을 느껴보려고 했다. 남들에게는 별반 관심 없는 휴게소라 해도 난 내게 의미가 있는 곳으로 정하고 싶었다. 어느 곳이든 마음 편한 곳이 휴식처가 아닐까?

분주한 일상사에 지쳐 비켜가고 싶을 때, 헝클어진 감정의 가닥을 바로 잡아야 할

때 나는 숨바꼭질하듯 이곳을 찾곤 한다. 소리도 없이 철 따라 변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앙탈부리지 않고 묵묵히 순응하는 겸손을 배우려 한다. 한꺼번에 소란을 피우지 않아도 좋은 곳, 포장된 감정을 표백하는 곳, 나는 이곳에서 소박한 자연의 모습을 닮으려 한다. 대책없이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밀려 다니지는 않는지, 남의 인생을 흉내내고 있지는 않는지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다가올 미래를 꿈꾼다.

나만의 공간이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