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친구를 만나고 싶다

박 정 숙

차창에 부딪치는 빗방울이 떨어졌다가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물이란 흘러 내려야 원칙인데 차의 진동 때문에 빗방울은 빠르게 지붕을 향해 달린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경쟁을 하는 듯하다. 앞만 보고 살아 온 내 지나온 삶과 같다.

내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오십을 향해 달려간다.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어느새 그렇게 세월이 흘렀나 하는 생각에 자신을 돌아보니 벌써 흰머리가 희끗거린다.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다고 주름살 걱정을 하고 색깔 화려한 옷을 고르며 좋아하는 언니들을 보고 주책이라며 곱게 늙으시라 핀잔을 주었는데 이제 내가 늙어가고 있는지 흰머리가 자꾸만 거슬린다.

나이 사십을 먹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어떤 이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이제 한번쯤은 지난 세월을 돌아봐야 할 때 인 것 같다. 지나 온 세월의 발자국, 별로 바르지도 평탄하지도 않는 내 삶의 발자국을. 그리고 살아오면서 만났던 크고 작은 인연들을 맺은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도.

만나는 인연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자던 내 삶을 지표가 너무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현실에 얼마나 속상했던가. 너무 많은 것을 움켜 쥔 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는 일상들에 삶의 포기라는 극단의 생각까지 했던 적도 있었는데.

버리는 것을 한번쯤은 생각해야 했고 잠깐 멈춰서 갈 길을 확인하는 것도 필요했었다. 소낙비 내리고 난 후 맑은 하늘의 찬란한 햇빛이 고마운 줄 알듯 내 생도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이 사십이 다 가기 전 조금은 정리를 해 보고 싶다. 늘그막에 잘 산다는 말보다는 잘 살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것이 어찌 나 뿐이겠는가 마는.

누군가 그랬다.

‘늙어 갈수록 용돈은 호주머니 깊숙이 감추어라.

자식들에게 주머니까지 털어주는 속없는 노인이 되지 말라.

주머니돈, 쌈짓돈 잘 간수했다가 속 맞는 친구 만나걸랑 막걸리 한 잔 사고 손주 녀석일랑 오거든 용돈이라도 쥐어 주는 현명한 노인네 되라’고.

어쩌면 현실에 맞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아직은 손주 볼 때는 아니지만 마음에 맞는 친구하나 두었다가 스스럼없이 순대 한 접시에 막걸리 한잔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사이겠는가? 정말 많은 것 같으면서도 막상 찾아보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한 사람도 남지 않는 것이 진정한 친구 찾기인 것을 .

이제 더 늦기 전에 이런 친구를 만나고 싶다. 잔뜩 체면 차려가며 고상한 척 하려고 노력하다가도 우리 둘이 만나면 허물없어지는 친구. 호주머니에 달랑 천 원짜리 두 장뿐일 때 망설임 없이 한 장씩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 꼬챙이 하나 들고 한 입 베어 먹다가도 서로의 모습이 우스워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 젖혀도 흉이 되지 않을 친구.

늙을수록 친구밖에 없다던 어느 방송의 아나운서의 말을 되새기며 유안진 님의 <지란지교>를 읊조려 본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오던 비가 개이고 무지개가 무등산 줄기에 걸쳐있다. 차창에 맺혔던 빗방울이 차의 진동에 따라 지붕을 향해 줄달음친다. 나도 내 삶의 미래를 위해 오른쪽 발에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