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자란 탓인지 아니면 성격에서 오는 것인지 어려서부터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만난다든지 웃어른들을 뵈면 특히 수줍어서 피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1년 반 동안 배우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너무 부끄러워 서당선생님을 항상 피해다니던 일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유호익 담임선생님이 결혼을 하셨다. 우리들 아동 대표들은 약간의 축하금을 거두어서 댁을 방문하였는데 결혼식 준비로 선생님댁은 대단히 붐비고 있었다. 귀한 꼬마손님이라고 우리를 환대했지만,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 멀리 도망을 가버렸다. 선생님댁의 어떤 젊은 분이 우리를 쫓아와서 결국 붙잡혀 들어가 음식을 먹고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멋적어진다.
1950년 입학했던 서울의 용산중학교를 6. 25 전쟁으로 중퇴하고 고향의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키가 크다고 해서 반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차렷", "경례" 등 구령을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심부름을 하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다소 숫기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가난한 우리 시골에서는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현대 교육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옛날 말로 道를 닦는다든지, 외국에 유학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다. 항상 가난 속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이웃사람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느끼며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자신있는 대학생인가를 스스로 물으면서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대학을 마치고 덕성여고의 교사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선생님'이라 불리우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털벗지 않은 복숭아처럼 시골티나는 나의 외모나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실력을 생각하며 부끄러운 마음이 컸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선생님 소리도 어느 정도 귀에 익어가고 자신이 없어도 자신이 있는 것처럼 떠드는 데도 다소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무렵 나는 30이 훨씬 넘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역시 아주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남편으로서 나의 여러 가지 막중한 책임을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었다. 그 후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첫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 참으로 일생 중 가장 수줍고 부끄러운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만리타향에서 새로운 인륜이 맺어지고 우리 집안에서 나는 이제 마지막 세대가 아니라는 엄숙한 현실을 느끼면서 어깨가 무거워지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나 두 아이의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그 당시로서는 항상 수줍고 자신이 없어 불안한 부끄러움 속에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곤 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아내나 아이들에게 자격에 손색이 없는 남편이나 또는 아버지인지에 대한 해답은 나보다는 그들에게서 듣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근 10년에 걸친 유학생활을 끝내고 가슴 설레이는 마음으로 대학의 강단에 섰을 때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은 역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학교 앞의 좁은 길을 꽉 메우며 들어오는 학생들을 바라보거나 강의실에 꽉 찬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과연 그들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줄 것인가에 대해 자주 고민하곤 했다. 경동시장 가운데를 지나면서 양옆에 늘어선 상가에서 1원을 둘러싸고 삶을 다투는 그들에게 나의 학문이 어떠한 연관이 있으며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곤 했다.
사실 한 시간의 강의를 위해 며칠밤을 새운다고 충실한 내용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내 모든 능력의 집합일 수밖에 없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뿐이다. 강의실에 들어갈 때 굳게 다짐했던 강의의 내용을 생각하며 끝내고 나올 때 빨리 내빼고 싶도록 허탈감을 느낄 때도 가끔 있다. 어쨌든 이것은 무한에 대한 도전이며 필사적인 노력을 다해야 하는 끝나지 않은 부끄러움과 수줍음의 연속이기도 하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인가 글을 써보고 싶다고 느꼈고 또 쓰기 시작했다. 따라서 문학은 역사와 함께 내게 있어서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1990년대 이미 50대를 넘으면서 수필을 써보겠다고 마음먹고 굳이 꼭 하지 않아도 될 등단의 길을 거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내 마음의 속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럽고 또 알량한 문장력은 더욱더 내 수줍음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명색이 수필가라고 하지만 그 이름에 나는 아직도 익숙해 있지 않다. 그래서 첫 번째 수필집인 {하이델베르크의 추억}을 내고 나서 문우들의 축하모임을 부끄러움 탓에 기피해버렸다. 앞으로 얼마만큼 의미있고 읽혀질 수 있는 글을 쓰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부끄러움과 수줍음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11월 20일 의외로 나는 교육부장관실에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다. 그의 하는 일이나 내용을 떠나서 내게는 과분한 영광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 새로운 부끄러움을 더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는 내 생각의 새로움이나 생동감있는 노력을 계속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끄러움과 수줍음은 나의 일생동안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남처럼 민첩하거나 지혜롭지 못한 내 성격에서 그래도 '수줍음'이란 매력이나 인력(引力)이 내 삶을 훨씬 풍부하고 윤택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항상 부끄럽고 고지식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순박하면서 그를 통해 우러나오는 집중적이고 열정적인 노력으로 꿈을 실현시키려 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열매를 맺게 되었는지 나 스스로는 평가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모습이었다고 자위할 때도 가끔 있다.
내게 건강이 있고 나를 사랑하며 도와주는 모든 분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특히 내게 항상 할 일이 있고, 또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일생동안 느껴온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은 바로 내 삶의 未完을 일깨워주면서 至善을 향하게 해 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생동의 에너지가 되어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끄러움과 수줍음이 계속되는 한 나의 삶은 보다 더 값지게 될 것이다.
내가 삶을 끝내고 저승의 문턱에 다가설 때, "너처럼 부끄럽고 수줍음 많은 사람은 좀 더 있다가 오라"고 쫓겨날 행운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역시 수줍게 생각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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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모습찾기
내가 내 모습을 보는 것이나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어쩌다가 거울 속에 보이는 내 모습에서 매우 어색함이나 또는 낯설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나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상적인 내 모습과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다르기가 일쑤이다. 지나치게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고, 또 나 아닌 다른 사람같이 생각될 때도 자주 있다.
그래서 어떤 소설에서인가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 때문에 매우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의 겉모습은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겉모습이 아닌 나의 전체적인 그리고 참된 모습은 어느 곳을 통해서도 올바로 보기가 쉽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있고, 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보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 내가 쓴 글, 내가 하는 말 등을 통해 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말하거나 쓰고 느끼는 것 역시 내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합친
다 해도 진실된 내 모습을 그리고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나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한 번도 자신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남자라면 키도 크고 건장해 보이기도 하고, 구비해야 할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남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보다는 외모가 아닌 내 모습에 대해서 불만스러울 때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것은 내 성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내 생활 자세나 내 능력 등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물론 나 나름대로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내 성격이나 현재의 형성이 어떻게 되어왔는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연히 KBS 1TV의 [신한국기행]이란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어 내 고향을 찾아 옛날 살던 집과 친구들, 다니던 학교 또는 그 지역의 문화유적들을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 시간 미만의 길지 않은 프로그램이지만, 그를 위한 방송국 연출자의 준비는 매우 다양하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준비할 것도 많고 또 진행자가 나에 대해서 알고자 하여 묻는 것도 대단히 많았다.
이 프로그램을 구성할 책임이 있는 작가는 나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고 있다. 어디서 태어났으며 부모님은 어떠하셨는지, 성장과정과 초등학교 또는 친구관계, 학습활동 또는 취미 등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알고 싶은 것이 많은 것 같았다. 어떤 것은 나도 쉽게 대답할 수 없고, 또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나의 생각지 않은 장점이 드러날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알 수 없는 내 약점을 발견될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음악이 있는가?, 하모니카를 불 줄 아는가?, 무엇을 하며 놀았는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였는가?,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도 또는 즐겨 읽은 책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등 다양한 질문은 한참 생각해야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소득은 곧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여기서 나의 모습을 찾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옛 집과 고향의 산과 들판 및 마을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지난날을 생각할 수 있는 기쁨이다. 나의 발걸음이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던 옛 집의 구석구석에서,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그 어는 곳에 있건 잊을 수 없고 꿈속에 항상 등장하는 중요한 소재로서의 내 어린 시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난 시절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나의 모습을 형성해 온 시작이요 일부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 성격이나 인생관의 형성에 관계된 문제이다. 내 성격이나 세계관을 어떻게 규정하건 그것은 오랜 동안 내가 경험하고 살아온 생활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것은 어느 순간의 작은 일에서 올 수도 있었고, 아니면 서서히 만들어 질 수도 있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때 일기를 쓰면서 그날 그날의 하는 일을 다루기 보다는 한 가지 문제를 소재로 그날을 메꿨던 생각이 난다. 그것은 곧 많은 것을 깊이 생각한 데서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비탈에 선 나무'였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전쟁 속에서 아버님을 사별하고 어머님 슬하의 외아들로서 고독과 비애를 한꺼번에 느끼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내가 초등학교 때 활발하던 성격은 중등학교 이후 매우 비판적이거나 비관적인 면으로 흐르게 되었다. 물론 중등학교 이후 계속 맡았던 학급의 반장이나 학생 회장 등 공적 생활에서의 책임은 봉사하면서 나를 다른 사람과 적응시킬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수줍은 편이었고, 많이 생각하며 글을 쓰거나 비판적이었다. 내 내면적인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지만 세상의 일들에 대해 때로는 냉소적으로 또는 해학적으로 좀 웃기면서 또는 반발하면서 성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방송국의 작가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나의 아픈 곳을 찔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나와의 긴 통화에서 "戰亂이라는 주변환경의 악조건과 아버님과의 불행한 사별로 내면적으로 응축되면서, 또 고생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문제에 대해 좀 비판적인 면으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았는가? 특히 내가 전공한 유학과 사회 문제에 대해 신랄한 비평을 가한 이탁오 연구라든가, 또는 여성문제에 대한 진보적인 견해를 비롯해서 보다 자유롭고 진보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가능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사실 나는 이 문제를 항상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내 성격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내가 대학 4학년의 연습 시간에 {論語}를 통한 孔子思想의 비판을 통해 서양문화에 대한 東洋文化의 낙후라는 원인을 찾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차원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리고 독일에서 학위논문의 주제를 정할 때도 李卓吾를 대하자마자 즉시 매료되었던 것 역시 그러한 내 성장과정과 생각이 바탕으로써 작용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유서깊은 산정호수 옆 산 위에서 푸른 호수를 내려다보면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내 모습을 새로 찾고 있다. 나의 진정한 모습이 저 호수의 맑은 물 위에 비쳐져 있을 것만 같다.
또 한편 마치 굵은 나무를 베인 자리에 나있는 나이테를 보고 있는 듯하다. 출발점을 따라서 다시 출발점으로 가까워지는 나이테와 내 삶을 같이 비교해 보고 있는 것이다. 되찾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거나 불만족스러워도 상관없다. 다만 내 나름대로의 인생과 연륜이 점점 성숙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몹시 그립고 정다울 뿐이다. 바로 이것이 나의 귀중한 재산이며 또 커다란 기쁨이다. 소박하고 진실한 내 모습의 발견은 고향에서만 가능해지고, 그래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고향을 닮으면서 내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首邱初心이라는 옛말처럼 결국 자기가 태어난 곳을 되돌아 보게 되고 자기가 성장한 과정과 그로 해서 형성된 자기의 사상이나 人生哲學을 되돌아 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중요한 인생의 철학이 노년기에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 자신도 이번 기회에 내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진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