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언 50대 중반, 인생 여정을 등반에 비유하면 하산길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초로의 양어깨가 요즘들어 천만 근도 더 되는 듯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앞으로 남은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서일까.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야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도 없을 텐데 한치 앞도 헤아리지 못하는 우둔함에 혼자 쓴웃음을 자아내던 적도 참 많았던 것 같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 고 했던가? 지난봄 큰여식을 시집보내고 겨우 한숨을 돌리고 나니 이번엔 둘째가 제 차례를 기다리느라 길어진 목이 한뼘이나 되어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어느사이 스무 살, 아름다운 나이를 먹은 셋째가 환한 웃음으로 집안을 향기롭게 하고 있는 지금이다. 아장걸음으로 재롱을 피우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루의 피로를 덜어 주던 지난 시간들이 아직도 선연한데 생각해 보니 세월은 참으로 빠르기만 한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내 무릎이고 품안이고 예사로 안겨들곤 하던 것들이 이제는 가끔 장난으로라도 한번 안아 볼 양이면 마치 물 묻은 손에 미끄러지는 비누처럼 어느새 빠져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막연한 거리감을 던지며 그들만의 공간을 공유하려고 하던 것도 꽤 오래 전부터인 것 같다.
거기에다 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내려오는 막내 아들녀석은 저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친구 만나랴, 데이트하랴, 여행하랴 아예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이다. 그래도 퇴근이 이른 날 에는 모처럼 도타운 정이라도 나누고 싶어 시간을 기다리는 저녁 식탁에서야 몇 마디의 간결한 얘기를 나누다 황망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긴 시간, 독립된 공간에서 각자의 할 일로 집안은 고즈넉하기만 하다.
"품안의 자식" 이라는 말처럼 자식은 성장하면 부모의 품을 벗어나 독립된 인격체로서 살아간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른 것이 아님을 실감하는 요즘, 나의 마음은 흡사 귀중한 그 무엇이라도 잃어버린 듯 공허한 상실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것을 우리는 흔히 농사에 비유해서 자식농사라 한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만으로 가을의 수확을 약속 받는 것은 아니다. 제 때에 잡초를 뽑고 김도 매 주며 시시로 약도 쳐야 되고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거름을 주는 등 갖은 정성을 다 쏟아야만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벼를 말하는 쌀 "米" 자는 여든 여덟 번의 손길이 닿아야만 가꾸는 이의 땀 흘린 보람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가 새겨진 것이리라. 내가 자라던 그때만 해도 전통적인 윤리관이 철저히 지켜지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격한 훈육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점점 나이를 먹어 온 것이다.
나의 부친께서는 언제나 근엄하고 말씀이 없던 편이셨던 터라, 오늘날 내가 아이들에게 쏟는 사랑만큼 부친의 사랑을 넉넉히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생활해야 했으므로 이해와 나눔의 사랑은 자연스러이 터득할 수 있었어도 맘껏 소유하고 싶은것에 대한 갈망은 늘 아쉬운 채로 머물를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제 설움에 겨워 숨어 우는 눈물도 꽤 많이 흘렸던 것도 같다.
그러나 물질이 궁핍하고 엄격한 통제가 늘 뒤따르던 시절이기는 했어도 희미한 등잔불이 봉창에 물들이는 시간에 밤이 늦도록 부모님과 마주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장래 이야기로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였으며 겨울 지낼 걱정, 양식 걱정으로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통하는 포근함이 그때는 있었다. 비록 부모님과 함께 식구들이 모두 한 상에 둘러앉아 나누어 먹던 단출한 밥상이긴 했어도 유년 시절의 그 정겨움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주춧돌과 같아서 늘 그리움으로 점철되곤 한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아련히 나의 뇌리 속에서 점점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고도화된 문명과 함께 찾아 온 뿌리의 흔들림, 가정이 하는 역할이 소외당하고 부모의 권위가 실추되어 가는 현실, 그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겸손과 절제를 모르고 극도의 이기심과 나약함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들을 차츰 잃어 가는 것이다. 내가 선고로부터 받은 가르침으로 내 자식들을 길들이고자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요, 잘못하면 자식을 크게 어긋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아비로 전락될 우려마저 없지않은 현실 앞에서 어쩌면 이 시대는 가문의 질서를 위한 엄격한 훈계보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버지도 어머니 못지않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베푸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어렸던 아이들이 자라 품안에서 벗어나 제 갈길을 간다 하더라도 이미 그 옛날과 같은 자식이 아니라고 서운해야할 만큼 자신과 자식을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다. 이는 아득한 감정을 아무리 표현해 봐도 소용없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개방된 사고와 변화된 문화권을 조심스러이 인정하고 싶음에서이다. 며칠 전 어느 TV프로에서 백로의 삶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본 일이 있다.
백로들이 제각기 짝을 만나고 둥지를 틀어 알을 낳고 그 알을 품은 지 보름만에 부화된 새끼를 한 마리의 훌륭한 어미새가 되도록 키워내는 과정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은 것이었다. 이때 새끼를 기러내는 어미 백로의 사랑은 그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본능적인 것으로 온갖 자연 재앙으로부터 처절히 방어하는 것이며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먹이를 물어 나르고 그것을 알맞게 나누어 골고루 빠짐없이 어린 새끼들 입으로 넣어 주는 것, 그러면서도 날으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몸매 유지에 세심한 일에서부터 점차로 먹이를 조절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 그 이상이었다.
여름 한나절 내리 쪼이는 뜨거운 태양을 어미새는 고스란히 감내해 내면서 전신의 깃을 펼쳐 새끼들에게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본능적인 사랑은 눈물겹도록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이었으며, 뜨거운 모성애가 자아내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드디어 새끼는 서투른 날개짓으로 선회비행을 하게 되고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묵묵히 이 모든 것을 지켜만 보던 어미 백로는 서서히 새끼들 곁을 떠날 준비를 한다. 어미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는 동안 지치고 늙어 버린 육신으로 새끼들을 둘러본 뒤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나 머나먼 여정에 나서는 것이다. 틈틈이 맑고 깨끗한 강가에서 충분한 휴식과 영양을 섭취해 가면서.......
지난 시절, 아내와 함께 고생인 줄도 모른 채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내밀히 가져왔던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보상심리를 이제는 내 스스로 미련을 두지 말고 잘라 버려야 할까보다. 새가 깃이 자라서 혼자 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어미 곁을 떠나듯, 자신들도 부모들의 풍부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자라 적당한 시기가 되면 그들만의 고유한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서서히 자율성과 독립심이 싹트게 되고 일에 대한 성취감과 함께 뿌듯한 이별도 느끼게 될 것이며 때때로 좌절로 인해 새로운 도약의 계기도 스스로 마련해 나가는 것이리라.
내일은 오랜만에 겨울 산행에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어 본다. 텅 빈 들판의 어귀에서, 물기에 젖은 낙엽을 밟으며, 사람 사는 길을 다시금 되새기고 싶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떠나버린 겨울 산행이 마냥 허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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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연지에서
시내에서 남쪽으로 8킬로쯤을 벗어나면 예하리 라는 작은 마을에 연못하나가 있다. 연못이라면 농경지 수리이용 때문에 마을 뒤편에 하나쯤 엎드려 있게 마련이지만 내가 찾아가는 곳은 이와 품격이 다르다. 제방에 들어섰을 때 늙은 팽나무와 움츠린 노송들이 찬바람에 수군거리고 못은 가슴 속을 드러낸 채 허탈한 눈만을 뜨고 있었다. 바로 이 못이 내가 즐겨 찾는 연지 이다.
삼천여 평은 실히 넘을 것이다. 못가엔 서걱이는 갈대 잎 소리가 일어서고 말라빠진 연꽃 대궁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다. 청둥오리 몇 마리가 쏜살같이 날개를 턴다. 하늘빛이 고웁다. 꽃을 피워 맺은 연방이 이미 식용, 약용으로 꺾이고 지금은 얼음위에 누워버린 연잎과 줄기들이 파수병처럼 서서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나는 버릇대로 제방의 끝에 있는 연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이곳 연지를 처음 본 것은 이미 오래 전 초여름이었다. 수면 위에 물안개가 쓸려가고 그 사이사이로 방패만한 초록 잎새가 넙죽이 퍼져, 온통 연못을 덮어가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들른 연못에서 연잎이 들어찬 광경을 보고 나는 수천 수만의 연꽃송이가 가슴안에 피어나는 꿈을 매일 밤 가질 수 있었다. 그 뒤로 찾은 연못은 나의 가슴이었고 나의 가슴은 바로 연못이었다. 못은 오래된 진흙의 늪이었다. 오래 전 수리용으로 만든 것이었으나 복토가 채이고 농경지가 늘어나 그 본래의 구실을 잃어갈 즈음, 새로운 저수지가 생기는 바람에 이 못은 이무기나 사는 전설 속의 못으로 변모하고, 마을 노인네들의 휴식처로나 이용하자는 의견이 앞섰을 것이다.
이때 한 두 뿌리의 연근이 번지고 또 번지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못 전체가 연을 품고 말았을 것이다. 늦여름이 기울 때, 연못의 아침은 햇살이 피워내는 꽃송이로 황홀한 장관을 이루었다. 연초록 대궁의 가는 가시들을 밟고 올라와 하늘보다 더 넓은 연잎을 펼쳐보고 그 틈 사이로 긴 목을 학처럼 눈부시게 들이고서 수천 송이의 연꽃을 사방천지에 널려 놓는 것이야말로 어찌 황홀하지 않을 수 있으랴.
분홍빛과 흰빛, 자색빛과 노란빛이 어우러져 잎과 물빛 등으로 사위를 물들여 놓곤 배시시 번져 은은한 윤곽, 아 이곳이 서방정토가 아닐까? 살금살금 기어 나오는 연지가 어느덧 나의 내부에 이르르면, 나는 석가모니의 미소에 진리를 깨닫는 듯도 하고 심청이의 환생된 모습에 감격하기도 하면서 알지 못할 불심에 저절로 손을 모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속세의 온갖 잡념이 맑게 씻기우고 새로운 내 자아의 탄생을 강렬하게 인식하게 된다. 살아온 날이 부끄럽고 오욕칠정이 내게만 넘친 듯 하여 연지에 앉은 채로 무심의 복판이 흘러들게 된다. 이때쯤이면 연당의 사방은 탱화로 가득차고 나는 법당에 앉은 선사로 변신되는 듯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연잎 속에 고인 수정빛 이슬은 눈 속까지 굴러들고 마악 터지려는 또 다른 수천 개의 연꽃 봉오리들은 숨이 막힐 듯이 안으로 안으로 고요함을 다스리고 있다. 이때 가만히 흔들리는 꽃잎의 둘레, 눈썹이 흔들리운다
바람이 연지에 흐르고 내가 또한 연꽃 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아침이면 나는 내낸 연지를 돌며 번지는 반성과 회오의 번뇌에 돌아설 줄을 모른다. 진흙 묻은 내 삶의 꽃봉오리를 또다시 씻기 전에 는.....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은 이 연꽃을 불심의 바탕으로 삼아 가장 고귀하게 가슴속에서 피워 냈던 것일까. 어릴 적 할머니는 이 연꽃밥을 이용하여 연밥죽을 쑤었고 , 뿌리로는 연밥장아치, 연화누룩 등 귀한 식품을 만들었다. 지금도 연밥죽의 향기는 내 코에 이르르고 있다.
어찌 그뿐이랴. 잎은 연인(蓮人) 이라 하여 쌈도 싸먹는다. 더욱 연육(蓮肉)은 "補中益氣 止血(보중익기 지혈)" 등에 크게 효험이 있어 한약의 재료로 쓰이지 않는가. 불교에서는 연꽃을 만다라화 라 일컫고 부용이라 하여 그 우아하고 은근한 자태를 그려내고 있다. 불상아래엔 연화대를 받쳤고 법당은 연화로 채색했으며 지붕엔 연와를 얹었고 젊은 벼슬아치에게 연관을 씌웠으며 왕실까지도 부용막을 드리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우리의 문화와 선인의 생활속에 연꽃은 예술미와 얼이 깃들여 전통의 미를 피워냈던 것이다. 보은의 상징으로 수많은 연꽃의 소재는 물론이려니와 옛 가사에도 많은 문인들은 이 꽃을 노래했다. 연꽃은 찬란한 불교 예술만큼이나 우리 문화와 접맥되었으며 불심의 향기만큼 소중하고 그윽한 우리만의 향기이었을 것이다. 초가을이면 나의 꽃가게엔 시투룩한 연실들이 다섯 개씩 묶이어 수십 뭉치가 옮겨 오게 된다. 언뜻 보면 징그럽게도 못생긴 듯한 모양들을 하고 두루 주머니 같은 머리를 휘두른다. 가을철 꽃꽂이용으로 팔려 온 것이다.
시장거리 에서도 곱게 늙으신 할머니들이 이 연밥뭉치를 수북이 담아 놓고 팔게 된다. 시커멓게 쭈글해진 주먹만한 뭉치는 물 뿌리개 주둥이 같기도 하고 벌집모양 같기도 한데 노파들은 지루함에 못이겨 연실뭉치의 잣톨만한 연밥을 빼내어 까먹고 있다. 그리고선 지나는 이들을 보고 이가 빠진 허한 웃음을 보일 때, 노파의 얼굴과 연실의 모양이 너무도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은은한 미소에 번지는 삶의 달관이 아닐까. 그리하여 장미, 백합, 안개 꽃 등 화려한 꽃더미 속의 무리에 쫓겨, 울퉁불퉁하게 못생긴 연실들을 보노라면, 더한 뜨거운 애정을 느끼게 된다. 젊은 날의 그 눈부신 사랑을 대한 것같이 나는 슬픔의 껍질을 벗는 것이다. 그것은 세진에 찌든 나를 다시 이 연지 앞에 세우게 하기에 충분하다.
참으로 연은 뿌리와 줄기, 잎과 꽃, 꽃수술과 열매까지도 모든 이에게 베풀며 남김없이 주는 것이다 진흙 깊숙이 태어나서 무심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보은의 사상만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다. 연당을 나와 연꽃이 떠나버린 연지를 바라본다. 새 봄과 함께 다시 가득히 채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무 의 깊이쯤에서 어떠한 욕망도, 허세도, 미움까지도 버리고 새로운 사계의 내 소중한 욕망을 꿈꾸어 보는 것이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지명에 이르러 이제 연의 일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진흙 속의 세태 속에서도 내 삶의 기쁨을 연꽃처럼 피워낼 수 있을 것인지, 겨울 연지를 떠나오면서 자꾸자꾸 뒤돌아보는 것이다.
청둥오리 몇 마리 날개 접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