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기차역에서 경의선을 타면 우리 마을까지 33분이 걸린다. 버스 노선은 많고 지하철도 있지만
지나치게 분주하거나 피곤한 날은 일부러 기차를 탄다. 주어진 시간이 비록 짧지만 마음 속의 여행을
떠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봄의 빛깔이 완연하게 어리는 유리창에는 정해진 역할에 맞게 살고 있는 내 얼굴이 비친다. 비쳐진
얼굴 뒤에는 과연 어떤 모습의 속사람이 숨어있을까.

첫 기차 여행을 한 것은 네 살 무렵이었다. 두 살 터울로 태어난 사내아이와 딸아이를 혼자 키우기에
힘겨웠던 어머니는 맏이인 나를 서울의 외가에 맡기곤 했는데 긴 여행을 몇 차례 했어도 생각나는
장면은 한 컷 뿐이다.

어린 동생은 더위 때문에 열어놓은 차창밖으로 인형의 머리를 빼서 던져버렸고, 아끼던 놀이감을 졸지에
잃어버린 나는 한참 동안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외가에 머물게
되었다. 반복된 혼자 남겨짐과 상실에 대한 느낌들은 기억 속에 깊이 스며들어 지금까지도 허기가 되어
되살아난다.

그 허기는 외로움과 의기소침, 또는 욕심과 만용의 옷을 갈아입고 친한 친구처럼 나의 팔짱을 끼지만, 거기
숨어있는 그림자는 타인의 눈동자를 통해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이다.

봄날이 가기 전에, 혼자 하는 33분간의 시간 여행을 하며 내 안의 나를 만나러 가야겠다. 비슷한 진동과
속도로 궤도 위를 달리는 기차가 수십년 너머에 ‘자라지 않는 아이’로 남아있는 나를 깨워서 불러내주기
때문이다.

-극동방송국 <쉼터가 있는 오후> 4월19일 분
:매주 월요일 낮 12시15분-12시50분 사이에 FM 라디오 106.9khz에서 앞으로
6개월간 이진화의 Healing Essay가 방송됩니다.

-하덕규/가시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