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두레박>

헌 신을 버리며

며칠 전에 컴퓨터 청소를 하다가 실수해서 중요한 자료들을 거의 잃어버렸다. 사진은 일부 건졌으나 한글 자료는 하나도 복구를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일들의 대부분을 열어보지도 않고 방치해두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꾸 쌓이고 잊혀지는 자료가 늘어나서 30기가나 되는 정보가 잡동사니처럼 하드 디스크에 뒤죽박죽 저장되어 있었다. 그 많은 자료와 언제 다시 조우를 할 지는 예측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6기가로 날씬하게 몸매를 줄인 디스크에는 숨겨진 쓰레기가 없어서 정보를 찾아내는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오랫동안 반복된 기억과 습관들이 쌓인 의식의 지하실도 그와 같을 것이다. 지식과 굳어진 사고가 막아서고 있는 기억의 창고에는 무의식의 방으로 분류되는 방대한 공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부적절한 언행들 속에서 숨어있는 나를 알아채고 의식의 세계로 불러내는 일은 마치 하드디스크를 청소해내고 집안의 짐을 정리 정돈하는 것과 같다.

요즈음은 11년만의 이사를 앞두고 매일 짐을 한 가지씩 정리하고 있다. 하루씩 날을 잡아 책과 옷, 부엌살림 등을 줄여나가는 중이다. 어제는 신발장을 모두 뒤져서 오래도록 신지 않고 넣어둔 신발들을 골라냈다. 그 중에는 작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신발도 몇 켤레 남아 있었다. 돌아가신 분의 소지품은 이미 주인과 함께 생명을 잃고 있는데 그것을 아직도 추려내지 못한 것은 언젠가 또 신을 수 있으리라는 미련과 그 분에 대한 애착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발은 여러 켤레를 돌아가면서 신으면 수명이 길어져도 편한 것을 집중적으로 신다 보면 그 신만 닳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정든 물건을 선뜻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는 큰맘을 먹고 너무 오래 신지 않은 것과 낡은 것들을 내놓기로 했다. 헐어버린 것은 버리고, 신을만한 것은 달라는 분이 있어서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

한참동안 신을 정리하다가 신발장 한 구석에서 아주 오래된 구두를 한 켤레 찾아냈다. 그것은 대학교 졸업식 때 신었던 중간 높이의 검정색 구두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무려 26년 전에 신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굽을 갈고 간수를 잘 해서 까진 곳 하나 없이 새것과 같다. 1978년 2월의 마지막 월요일에 있었던 졸업식도 기억 속에 새롭게 되살아났다. 그때 참석했던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생생하고 식사를 하면서 감돌았던 분위기까지 실감나게 느껴져 왔다.

왜 많은 노인들이 오래된 일은 더 잊지 않고 기억하며,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일에 현재까지도 비슷한 영향을 받는지를 깨닫게 된다. 아직까지도 비디오 테이프에 담겨있는 오래된 영화처럼 반복해서 상영되는 기억을 불러내어 그 때의 감정을 들어주고 그 세월 속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변치 않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해준다.

헌 신을 버리며, 그 때 누군가에게 몹시 미안하고 난처했던 기억도 덜어내기로 하고, 자유롭게 새신을 신고 걷는 꿈을 꾸어본다. 그러나 아직 말짱하게 보관된 그 신을 이번에도 신발장 안에 도로 넣으며, ‘그래서 이 구두를 과연 어찌 할 건데?’하고 자신에게 물어본다.

내일은 26년간 어두운 곳에서 잊혀져 있던 그 신을 신고 눈부신 5월의 햇살 사이를 걸어보아야겠다.

* 이 글은 가정사역연구소(가정과 상담)에서 매월 발행되는 '행복한 우리집'에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