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마을에 이는 바람
-어느 중년의 고백-
-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보듯 보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거울이 주어지면 거울을 피해버린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그래서 나 아닌 다른 누구의 모습으로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보려고도 한다.-
김 전무는 요즘 들어 부쩍 아내 보기가 겁난다.
아들 녀석 보기도 겁나고, 딸아이 보기도 겁난다.
아니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무섭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집 앞에 바로 차를 세우지 못하고 한 바퀴 다시 돌고 나서야 마지못해 들어간 게 벌써 몇 번 째던가.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가.
실체를 알 수도 없는 서운함들은 자꾸만 쌓여 가고 덩달아 나는 겉돌아지기 일수다.
10대 그룹, 5대 그룹 하며 회사가 커져 가는 것을 좋아하던 때도 옛말, 요즘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왜 그리도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의사가 되라는 부친의 강권을 뿌리치고 법학을 택한 그에게 다시 부모님의 끈질긴 고시 권유가 잇따르자 그는 그 모든 요구들로부터 벗어나고자 중소기업체에 취직을 해 버렸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는 4년에 한 번씩 직장을 옮겼다. 더 큰 회사로, 더 높은 지위로 그는 산악인이라도 된 듯 출세의 등정을 계속해 나갔다.
그로부터 20년, 그는 국내 최대 그룹의 기획조정실 전무이다.
그룹에 관련한 거의 모든 정책이 그의 머리에서 나오거나 그를 거쳐갔다.
말하자면 실세 두뇌인 셈이다.
아무도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고, 그만큼 그의 앞날도 확실하게 보장된 셈이다.
그런 그에게 요즘 들어 큰 병이 생겼다.
자기를 돌아보는 병, 지나온 날을 뒤돌아봐 지는 병, 다른 사람을 곁눈질하는 병, 자신에 대해 남이 하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병, 잘 가다가도 주춤 주춤 멈춰 서는 병, 특별히 힘든 것은 아니면서도 한숨과 함께 가끔은 아무 데나 주저앉고싶은 병, 실로 그가 전에는 생각해 볼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곤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이다.
어제가 아닌 새로운 한 날을 허락하신 이 특별한 은총에 그는 다소곳이 순복하면서 내 생명이 도 한 날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겐가 감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부쩍 요즘 들어 내일 아침에도 다시 눈이 떠져서 새로운 날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다. 왜 이렇게 변해 가는 지,
이것이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내 원인 중 하나를 발견한다.
그는 줄곧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의 사전에 둘째라던가 '천천히'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동시에 대 여섯 가지씩의 일을 추진해야 하는 그, 늘 긴장과 촉박함 속에 살면서도 그는 그렇게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 삶이려니 생각했었다.
헌데 요즘 들어 자신과 다른 것들을 하나 둘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사이에 큰 아이가 결혼을 할 나이에 이르러 버렸고, 작은 녀석은 휴학을 하더니 입대를 하여 씩씩한 대한민국 국군 장병이 되어 며칠 전엔 휴가를 나오기도 했었다.
아들의 면회를 간다는 사람,
딸의 선을 본다는 사람,
건강진단을 받는다는 사람,
가족 나들이를 간다는 사람,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회사 일이 아닌 자기들의 일을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이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사는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감이 전신을 휩싸왔다.
한 번에 열 가지 이상의 크고 작은 일들도 무리 없이 처리해 내며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도 된 양 그 많은 일들을 일사불란하고 만족하게 처리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스스로의 잠재능력에 감탄까지 하던 그가 아녔던가.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자기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에 주눅이라도 든 듯 할 일의 가닥도 제대로 잡아가지 못하는 혼란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 가족, 집, 그리고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러 버린 자신의 나이, 무엇 하나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추스르고 고민하던 것들이 아니었다.
문득 결혼 무렵, 그러니까 이십 오륙 년쯤 전, 아내를 따라 갔던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 제목이 생각났다.
"세월을 아끼랴!" 그땐 코웃음을 쳤었다.
세월을 아끼라니,
나는 내게 허락된 세월을 누구보다 신나게 쓸 것이다.
아니 두 배, 세 배로 아낌없이 쓸 것이다.
물론 허비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만큼 열심히 살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가족들도 그런 그를 인정해 주었었다.
헌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미 자신은 같이 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주 많이 떨어져 혼자서 가고 있었고,
자신의 그늘에서 살고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며 아내까지도 사실은 자신이 자신의 일만에 충실해 있는 사이 나의 그늘이 아닌, 그들 스스로가 어렵사리 직접 만든 그들의 나무 그늘에서 결코 쉽고 편하지 않게 그래서 외롭게, 슬프게, 괴롭게 살아 왔다는 것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던 친구들도, 동창들도, 고향 선후배도, 자신이 생각한 만큼 그렇게 부럽게만 바라봐 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들 중 벌써 여럿이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은행 지점장이던 K는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고향 1년 선배인 박 사장은 지난 IMF로 회사가 부도나자 집안이 풍지박산이 된 채 얼마간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고향 선친의 무덤에 엎드려 약을 먹고 자살을 해버렸다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던 강은 몇 달 전 부친이 돌아가셨다 했고, 고등학교 동창 윤이는 한국이 싫어졌다고 남미로 이민을 가버리고 말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딴 나라의 상황이요 이야기들인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내가 그것들에 조금의 관심도 여유도 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시체말로 그만큼 나만 거침없이 매사가 잘 풀려 나갔던 것이다.
물론 나와 삼 십리 길을 걸어 중학교에 다니던 정은 인천 남동 공단에서 기술과 신용과 성실을 자본으로 탄탄한 기업을 이룩했고, 강원도에 생수 공장을 설립해 사업가로 변신한 여자 동창 순이나 꾸준히 교단을 지키는 덕이, 이번에 부장검사로 발령을 받은 대학 동창 신 검사나 잘 나가는 작가 '정'도 나 못지 않게 한껏 보람과 전성을 누리며 살고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무엇이 삶의 보람이고, 행복일까?
한 번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채 줄곧 앞만 보고 달려가기만 했던 자신이 지금 서있는 이 자리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지난 해 중학교 동창이 경영하고 있는 고향 마을 그의 농장에 들렀던 일이 생각난다.
오랜만에 우리가 찾아가자 너무나 반가워하면서도 시간이 모자라 안타까워하던 그, 그 날 중으로 예약 받아 놓은 수십 마지기 벼 베기를 다 마쳐야 한다면서 사는 게 이렇다며 수줍은 미소를 띄우던 그였다.
목장과 농장과 특용작물 재배를 위한 비닐하우스의 군락, 그 분야에선 성공한 영농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저 지난해인가엔 다수확왕이 되어 메스콤에도 계속 오르내리던 그였다.
그는 내게 그랬었다.
" 난 너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네가 부러운 것은 결코 아니다. 네가 너의 영역에서 그만큼 성공한 만큼 나도 내 영역에선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있고, 또 더 성공할 자신도 있다. 나는 농사꾼이지만 너도 나 같은 친구가 하나쯤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말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다.
어쩌면 내가 생각해 왔던 성공이나 지위는 사실 내 것이 아닐 수 있다.
바람처럼 언제고 떠나라면 떠나야 할 그런 고용인의 자리일 뿐이다.
내 능력이 아직 쓸모가 있을 때는 인정을 받겠지만 어느 순간 나의 능력이 별 것 아니라 인정되면 그 순간 나의 자리는 없어져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친구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만의 자리였고,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확실한 성공의 자리였다.
쉼 없이 내가 발로, 머리로 뛰던 그 때에 그는 손과 가슴과 땀으로 승부를 했던 것이다.
김전무는 갑자기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 걸 느꼈다.
오싹 한기까지 느껴졌다.
나는 무엇인가.
처음으로 내가 나에게 던지는 화두 같은 질문이었다.
마치 거울 앞에서 우연히 발견한 중년의 한 남자, 그 거울 속에 들어있는 생경한 한 남자를 보면서 그가 누구일까 뒤돌아보지만 거기엔 나 외엔 다른 사람은 없고, 다시 거울 속의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았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 같은 당혹감, 김전무는 내심 자신이 지금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비친 모습을 보고 있을 거라고 애써 부정이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바람이 불어왔다.
선선한 바람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덥기만 하던 날씨였는데 어제오늘의 아침 날씨는 가을 기가 완연히 돌고 있다.
아직 여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에 여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나가 있었고, 기다렸다는 듯 가을이 그만큼 성큼 다가와 버렸던 것이다.
김전무는 차분히 주위와 현실을 둘러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어디만큼 와 있는가.
내 주위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나의 가족들은 얼마큼이나 나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을까.
아내는?
아이들은?
그들은 남편을,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두려움이 다시 일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러 삼십리 길을 새벽같이 출발해 갔던 때, 그리고 시험지를 받자 글씨가 한 자도 보이지 않아 당황했던 순간처럼 칠흑같은 절망의 두려움이 온 몸을 감싸 안았다.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3등 안으로는 붙어야 학비를 내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기에 그게 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 때 우리 집 형편은 결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형편이 아녔기 때문이다.
'트리나 파울루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이 생각난다.
어쩌면 나도 그 애벌래들 같이 그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무작정 올라가는 것만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비의 꿈을 가슴에 품고서가 아니라 그렇게 오르고 오르다 보면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너무나도 막연하고 단순한 기대와 목표 속에 기어오르기만 하는 행위, 그런 나 때문에 밟히고 떨어진 동료와 친구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김전무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 오래 전 아내와 함께 들었던 '세월을 아끼라'던 설교 제목이 새삼 새로운 의미로 가슴에 날카로운 침이 되어 콕콕 찔러왔다.
놓쳐버린 시간들, 보내버린 시간들, 또 다시 맞이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 나만을 위해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한 후회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딴엔 그렇게 성공했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내가 그토록 잘 해 왔다고 자부해 왔던 모든 것들까지 사실은 별로 큰 의미가 되어주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산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었는데,
나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독차지하면 누군가는 나로 인해 울기 마련이었는데,
세상은 한 개의 땅콩과도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두 개의 알 중 하나가 유난히 크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다른 하나는 작을 수밖에 없던 땅콩 알의 진실,
이 나이가 되도록 까지 나는 그런 작은 진리마저 깨닫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아녔던가.
바람이 휭하니 스쳐 지나갔다.
'이제부터라도 당신 자신을 돌아보며 사세요!' 하는 속삭임처럼
지나가는 바람이 한껏 상쾌함을 실어다 주는 것 같다.
그렇다.
더 늦기 전에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챙겨야겠다.
나 자신도 챙기고, 가족도 챙기고, 취미도, 그리고 잃어버렸던 어린 날의 꿈까지도 챙길 수 있는 데까지 챙기고 싶다.
비로소 발견한 내 삶의 마을에 이는 바람, 신이 내게 맡기신 꼭 내가 해야만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
누가 뭐라 해도 이 날까지 살아온 삶만큼 지금 내가 맞고있는 나의 중년 또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저만치 가로수에서 성급한 이파리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낙엽으로 지고 있다.
아직 푸른 기가 도는 철 이른 낙엽이련만 늦은 오후의 햇살을 가슴에 가득 안으면서 별처럼 꽃처럼 지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리 해야 된다는 묵시처럼.
늘샘 최원현(崔元賢)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허균허난설헌문학회 이사,
강남문인협회 수필분과회장이며,
허균문학상과 서울문예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아침 무지개가 말을 할 때>, 시집 <아름다울 수> 등이 있음.
 이인옥: 좋은글 잘 감상하였습니다. 중년의 나이면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해 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며 살아가야겠어요. 고맙습니다. -[06/03-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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