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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임창순 |
날짜 : 03-11-25 22:55
조회 : 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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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매(臥龍梅)란 가지가 눕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경기도의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에 두 그루 있다. 육칠 년 전에 일본에서 기증 받은 우리 나라의 토종 매화다.
내가 와룡매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88올림픽 덕분으로 해외 동포가 가장 많이 공부하러 왔던 그 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당시 재외 국민교육원에서 해외 동포의 대학 입학 예비 과정을 맡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온 재일 동포 두어 명이 찾아와 와룡매를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일본 미야기현(官城縣)이라는 곳에 이 나무가 있는데, 한국이 원산지라 하여 확인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매화에 대하여는 화투짝에서나 눈에 익은 것 외에 별로 아는 게 없던 때였다. 학교 생물 교사들에게 전화하여 와룡매라는 매화를 아느냐고 수소문하였지만, 수확이 없었다. 한국에 그런 매화가 없다는 나의 결론이 내려지자, 그 이야기는 곧 씻은 듯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두 해도 지나지 않아 나는 센다이한국교육원의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다. 칠 년 만에 다시 와 본 일본이었고, 일본 체류기를 책으로 낸 경험이 있는데도, 막상 센다이에 와 보니, 여기는 또 여기대로의 새로운 문화가 있는 미지의 나라(領地)였다. 임진왜란에 군사 삼천을 징발한 일이 있는 다테(伊達政宗)라는 영주가 일본의 장군인 도쿠가와(德川家康)이요, 이를 세운 이가 다테라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다테문화라는 것을 잘 들여다 보면, 지금까지의 일본 동쪽지방문화에서 한국 문화로의 변신과 같은 것이었다. 다테는 원로 가신으로의 유학자를 존중하게 되는데, 그 유학자라는 사람들은 임란 이후의 조선계 성리학에 심취된 사람들이고, 이런 학풍은 선비와 무사가 결합된 다테문화를 빚어낸다.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징병 분배로 잠시 조선을 ‘유람’한 일이 있는 다테는 운하를 파서 조선식 농산 장려에 힘쓰며, 조선 도자기를 비장하면서 기리꼬메끼(切込燒)를 굽게 한다. 조선의 어느 왕실 무덤에서 파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익(天翼)을 비보(秘寶)로 하며, 그 후손들은 한국식 서당을 만들어 데라고야(寺小屋)라 한다.
내가 센다이에 와서 놀란 것은, 다테가 임란 때 가져왔다는 식물들이, 사백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 고고한 꽃을 피우며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한국에 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상하였다. 내가 소문을 듣고 찾아본 이곳의 한국 식물은, 매화와 후지(등(藤)나무)였다. 후지는, 센다이 시내의 민가에서 잘 관리하고 있는데, 무더운 개화기가 되면 입장료를 받고 개방한다.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안내문만 있을 뿐 다른 이름은 없다.
와룡매는 모두 네 그루를 확인하였다. 형무소 안에 한 그루, 센다이시민공원 안에 한 그루, 그리고 두 그루는 현내의 동해안인 마쓰시마(松島)라는 관광지에 있다. 마쓰시마는 일본 3대 관광명소 중의 한 곳인데, 그곳의 즈이간지(瑞巖寺)라는 절에 홍매․백매라는 이름으로 보호되어 있다. 사실을 보호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즈이간지의 신주인 다테를 보호하는 신수(神樹)가 되어 있다. 시쳇말로 하면 다테마사무네라는 이곳 영지의 시조를 지키는 보디가드가 되어 있는 셈이다.
와룡매가 한국에 오게 된 배경은 대략 이렇다.
당시 수원농림학교가 관할 내에 있는 가미(加美)농고와 자매 결연을 맺게 되어, 나는 가미농고의 우지이에(氏家) 교장과 농담을 해도 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된 어느 날이었다.
“와룡매는 한국 거 맞지요”
“다테가 조선서 가져왔으니 한국 거 맞고 말고요.”
“한국에는 와룡매가 하나도 없다는데 어찌 생각하나요?”
“그럴 리가.”
“그때, 가토오(加藤淸正)는 호랑이를, 다테는 와룡매를 씨 말리기로 짰었다는데?”
농담이 지나치면 비례가 되는 법이지만, 이왕 나온 말이라서 평소 심중에 있던 일본의 한국 침략론을 확실하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러고 잊어버렸는데, 일 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우지이에 교장이 평소와는 달리 톤 높은 전화를 걸어 왔다. 즈이간지의 주지를 만나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와룡매의 육종 허가를 얻어냈었는데, 그것이 자기 학교의 실습지에서 움튼 것을 확인하였다는 보고였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 이듬해였던가? 그 중의 두 그루가 곧 수원농림고로 기증되었고, 그런 뒤로도 두 학교의 교류는 점점 심도를 깊여 갔다. 와룡매의 일은 더 물을 필요도 없는 안심사였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삼 년여를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날, 나는 매화를 수천 주 가꾸고 있다는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자연이 와룡매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매화에 대하여 일가견을 갖고 있는 그분이 바짝 열을 올렸다. 마침 매화가 개화할 시기라서 우린 곧 견매단을 모집하였다.
수원농림고는 그 동안 수원농생명과학고라는 이름으로 변심하여 있었다. 그 매화를 기증할 때 계셨던 박 교장님의 안부를 물으니, 벌써 돌아가셔서 이 세상에 안 계신다 하였다. 가슴이 덜컹하였으나, 매화는 잘 있다는 교감님의 전화 응대로 안심을 하며, 토요일 오후에 우리 견매단은 학교로 찾아갔다.
학교에서 우리를 안내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학교의 안내 없이 매화를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내교 소식을 알고 있다는 서무실의 젊은이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귀인을 안내한 것이 무안하여, 우리끼리 그냥 견매만 할 생각을 굳혔다. 온실을 찾아가 그곳의 실습생에게 안내를 부탁하였다.
학생은 우리를 온실로 안내하여 육칠 년생 된 작은 분재를 가리키며 매화라면 이걸 거라고 했다. 빈약한 꽃 몇 송이가 시들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참으로 당황하여 또 한 그루는 이렇지 않을 거란 기대 속에 학생을 재촉하였다. 한참을 찾아보니 분재 틈에 비슷한 매화분이 또 하나 있었다.
나는 울상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와룡매가 이렇게 빈약한 몸으로 분재되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귀인들도 덩달아 입맛만 다신다. 나는 다시 서무실을 찾아가 누구 와룡매 아는 사람 없느냐고 소리친다. 아까의 젊은이가 다시 나와 응대를 한다.
젊은이는, 전근 온 지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겠다면서도 미적미적 앞서 걷는다.
나는 다시 자신을 갖는다. 와룡매는, 이 학교의 위치 좋은 노지에 누워 있는 형국으로 자라 있을 것이며, 일본에서 기증 받게 된 사연의 안내문 정도는 달려 있을 거란 희망을 걸어 본다.
젊은이는 그런 나무를 본 일이 없다고 하면서도 우리를 비닐하우스 쪽으로 안내한다. 젊은이가 멀쑥하게 생긴 매화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거기에 긴 가시 돋친 두어 길 크기의 웃자란 와룡매가 서 있었다. 이게 와룡맨지 뭔지는 몰라도 실습지를 정비하면서 이쪽으로 이식한 지가 얼마 안 된다 하였다.
반가웠다. 비로소 귀인들에게도 체면이 선다. 나는 비로소 목청을 높인다. 희귀 매화로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우리 것이기 때문에 돌려주겠다던 일본인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라는 와룡매의 의미를 강조한다. 개화 직전의 홍색 꽃봉오리로 보아 두 주 모두 홍매일 성싶다. 한 주는 백매였으면 더 좋았을 거란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조차 이 나무의 존재 이유를 잘 모를 성싶은 것이 안타까웠다. 북한산에만 가도 대개의 나무에는 명패를 걸어 놓고 있다. 학교 나름의 어떤 이유는 있겠지만, 학생들이라도 와룡매의 존재 이유를 알게 하고, 더불어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대 역사 의식이 증언수(證言樹)로 분양되는 사업이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동인지 12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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