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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수필 8

한니발의 슬픔

류인혜


한니발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로마를 평생의 적으로 삼겠다고 아버지 ‘하밀카르’와 함께 바알신전으로 올라가 서약을 했다. 그들이 고향 카르타고를 떠나서 에스파냐로 이주를 할 때의 일이다. 아홉 살 때의 그 결심을 잊지 않고 오랜 세월동안 찬찬히 로마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왔다. 아무도 그의 내면에 있는 욕망을 짐작하지 못하였다.

역사적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불리는 싸움을 시작하려고,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정확한 정보와 빼어난 전술로 승리를 거듭하던 한니발이다.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로마인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을 피하는 노련한 로마인의 전술에 전쟁은 답보상태에 도달한다.

전선의 중요한 기점인 ‘카푸아’가 로마 군대의 포위망에 싸여 있게 되자 그는 몰래 기병대만 이끌고 나와서 로마로 향했다. 도시의 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그 로마를 둘러싼 성벽을 따라 산책을 감행했다. 포위당했다는 한니발이 말에 올라타고 성위에 우뚝 서있는 모습을 쳐다본 로마시민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많은 전쟁을 치른 로마인이라도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담대함을 직접 목격하여 기가 질렸을 것이다. ‘한니발이 문밖에 서있다’ 는 그 후에 생긴 격언이다. 적이 문 앞에 와 있는데 어찌 잠을 자고 있을 것인가.

한니발은 포에니 전쟁에서 기록자를 동행한다. 기록자는 그의 그리스어 교사인 ‘실레노스’라는 그리스인이었다. 그가 직접 쓴 사료는 지금 존재하지 않지만 한니발이 46세 되던 해에 태어난 그리스인 ‘폴리비오스’와 그보다 200년 뒤에 살았던 로마인 ‘리비우스’는 실레노스의 기록을 일차사료로 참조하여 글을 썼다. 사소한 일이라도 기록으로 남게 된다면 세월에 따라 중요한 역사적 가치로 평가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는 역사에 대한 접근 방식을 두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는 호소하거나 주장하고자 하는 것의 예증으로 역사를 이용하는 방식인데 그것을 마키아벨리에게서 전형을 찾았다. 군주론을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또 다른 대표작인 ‘정략론’의 원제목이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논고>라고 나온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이용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두 번째 접근방식을 택한 사람으로는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까지를 쓴 ‘테오도어 몸젠’과 오현제 시대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른 ‘에드워드 기번’을 들었다. 이 두 사람의 접근방식은 서술이었는데 그 역사의 서술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역사가 과정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역사는 단순히 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암기하는 결과의 요약이 아니라 거대한 흐름을 이끌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거대하게 흘러가는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시선이 무엇을 보느냐가 사료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대한 기준이 된다. 시대가 어떤 성격을 가졌나, 상관없이 서술의 방향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심판의 잣대로 인함인가 아닌가는 충분히 논의 되어야 할 문제이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인간과 인간의 소산인 체제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심판의 근거가 시대의 요구에 따랐느냐’다. 한 사람의 개인이 살아온 것은 한 나라의 역사 속에 묻히게 되지만 그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전 시대를 바라보는 후세의 정확한 시선이다.

《로마인 이야기》중에서 <한니발의 전쟁>을 읽으면서 적과 아군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인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궁금했다. 글을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이 모두 친 로마파인 것이다. 한니발이 어째서 추운 겨울날 알프스를 힘겹게 넘어 로마로 향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왜 쓸데 없는 분란을 일으켜서 로마인에게 고난을 안겨 주었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역사를 대하는 내 시선이 아직은 지극히 단순하다.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가의 냉철함을 먼저 배우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 눈꺼풀을 덮고 있다. 주변의 가까운 이들과 피치 못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을 때, 큰 싸움이 나기 전에 방비를 한다면서 전전긍긍했다. 반대편을 연민으로 대하여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혼자만 알고 숨겨야 할 전략을 내보이기도 했다.
여론의 궁지에 몰리면 손을 내밀어 잡으며 어서 도망을 가라고 방해꾼들을 돌려세우기도 했다. 결국은 적이 도망가면서 휘두른 칼에 깊은 상처를 입고 나서 조금 성숙해진 처세술을 익히며 정신을 차렸다. 명장 한니발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와 대적하는 동안 로마의 군대가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에 조금의 위로를 받는 식이다.

만약 다시 한니발이 집문 앞에 서 있다 해도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기다리다 지친 그가 물러나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용감하게 문을 밀고 나가서 그와 부딪쳐 싸울 것인가를 두고 망설일 것이다. 가끔 용기를 내어 이제라도 문밖에 서있는 한니발을 물리쳐보고자 했지만 아무리 애쓴다 해도 독한 마음으로 싸워볼 까닭을 찾을 수 없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씀을 좌우명처럼 맹신한 결과이다. 그렇게 반백년 이상을 살아온 개인의 역사에서, 개선문을 세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찌되었던 잘 싸워왔다’ 한 마디 할 수 있는 당위성을 찾고 싶다. 어떤 기록자를 곁에 두어야 역사의 올바른 판단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무수히 도전해온 한니발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새삼스레 궁금해진다. 초상집에 가서 실컷 울다가 누가 죽었소? 하는 격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으로 인하여 전전긍긍하지 말고 전쟁에 숙달된 로마인들처럼 노련해져야 한다. 적을 맞이하면 칼을 들어 싸울 결단이 있어야 되는 동시에 꼭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피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승리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는 진정한 승리이다.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졌을 때, 적진을 유유히 돌아볼 수 있는 두둑한 뱃장을 지녔지만 평생을 로마라는 거대한 나라를 적으로 삼은 한니발의 마지막은 슬픔이었다. 그는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형성된, 보이지 않는 허망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저버렸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자를 곁에 두었기에 역사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2005)